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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추억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작가 이정명'하면 많은 사람들이 드라마의 원작소설로 화제가 된 <바람의 화원>이라든지 <뿌리깊은 나무>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신윤복, 김홍도 그리고 세종대왕에 이르기까지... 이제껏 이정명의 소설들에는 등장인물만 보더라도 우리 역사를 소재로 한, 하지만 그 역사에 소설적 재미를 가미한 탄탄한 스토리와 해박한 지식들로 사랑받아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그가 2년만에 내놓은 작품 <악의 추억>은 작가의 기존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작품으로 '정말 이정명의 소설이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새로운 재미를 선사해 준다.
"침니랜드 사람들은 뉴아일랜드를 안개 속의 도시라고 불렀다. 뉴아일랜드 사람들 역시 침니랜드를 안개 속의 도시라고 불렀다. 이름은 같지만 두 도시는 전혀 달랐다."
해협 건너 칙칙한 도시 침니랜드와 경찰청이 있는 뉴아일랜드...
침니랜드는 1킬로미터가 조금 넘는 해협을 사이에 두고 뉴아일랜드와 마주보고 있는 본토의 최남단 도시로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과 배고픈 아이들, 미혼모가 배회하고 이들의 푼돈을 뺐는 범죄자들과 그들을 가두는 교도소가 있는 반도인 반면, 뉴아일랜드는 멋진 금융인들이 활보하는 도시로 화려한 광고판과 번쩍이는 쇼윈도를 자랑한다. 이렇듯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세계가 마주보고 있는 안개로 휩싸인 두 도시의 한 케이블카안에서 살해된 기묘한 시체.. 즉 웃고있는 여자의 시체 발견으로 사건이 시작된다.
정직상태인 형사나 시체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여성 심리분석관.. 사건 해결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승진이 더 중요한 팀장 헐리, 정년을 바라보고 있는 무능력한 경찰 카슨 그리고 의욕만 너무 넘치는 신참 패트릭까지..
정말 말도 안되는 조합들이 한 수사팀이 되어 연쇄살인범을 쫓는데.. 이 조합들만 보더라도 앞으로의 일들이 뿌연 안개속에 갇힌 것처럼 그 해결이 순탄치 않음을 암시한다.
"모두 반도를 벗어나려고 했지만 누구나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행운이 아니다. 다리를 건넌 사람들은 안도했고 다리를 건너지 못한 사람들은 절망했다.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두 종류의 사람이 살았다. 기회를 잡은 자들과 놓친 자들. 주류에 든 자들과 남겨진 자들."
이제껏 역사소설이라는 테두리안에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던 이정명이 2년만에 내놓은 이 작품은 단지 스릴러 범죄소설이라기 보다는 자욱한 안개로 둘러싸여 한치앞을 내다보기도 힘든 도시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을 쫓는 이들의 내면을 심리학적을 분석해놓은 심리소설이자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고발하는 사회소설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든다.
이전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역사팩션이라는 장르에 흥미를 가질 수 있었고, 그 작품을 쓰는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에 많은 이들이 혀를 내두르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역사팩션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안주하지 않고 더 뛰어난 창의력과 상상력으로 더욱더 신선함으로 다가올 것이고, 이정명이라는 작가 또한 새로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인물들이 가진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트라우마, 그리고 그로 인해 가지게 된 과거의 기억들...
줄거리 하나하나 , 놀라운 반전까지 어느것 하나 놓칠 것 없는.. 박진감과 스릴감 그리고 호기심까지 충분히 채워줄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