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장면 소설, 향
김엄지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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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은 사라지지 못한다.

R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어두움이 눈앞에 있었다.

8개월 전 미끄러져 5미터 바닥으로 추락한 R은 기억을 잃었다. 아니 완전히 잊은게 아니니 흐릿해졌다라고 하는편이 맞을 것 같다. 그 이후 R은 기억과 망각의 사이를 오가며 조각조각 깨져버린 기억들을 떠올려본다. 시간의 연속성도 없이 R이 떠올리는 기억들은 뒤죽박죽 상태고, 어떤 것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도 알 수 없다. 어쩌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채 망각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왜곡된 기억을 만들어 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8개월 전 자신이 어떻게 추락했는지를 잊었고, 직장 동료L의 장례식과 그곳에서 마주친 직장 상사의 성이 무엇인지, 자신의 아내 목 뒤에 점이 있었는지, 함께 떠난 아내의 고향 해변에서 언제부터 사라진건지 알 수 없는 아내까지 어떤 기억이 잃어버린 것인지 모르고 점점 더 혼란스러워 질 뿐이다.

R은 눈을 감고, 감은 눈 안에 자기를 떠올린다.

그는 R과 같은 수많은 R을 상상한다.

그는 그와 아주 똑같은 R을 상상할 수는 없다.

언제나 R은 R에게서 이미 지나쳐 너무나 먼 것이었다.

책을 읽고 나서 대체 이 책은 어떤 스토리였는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에 대해 몹시 혼란스러웠다. 뭔가 건조하면서 단조롭게 쓰여진 문체에 그리 어렵지 않게 술술 읽어지는 반면에, 어떤 부분이든 명확하게 설명해주지 않기에 약간은 난해하고 해소되지 않는 의문들에 생각할 거리만 많아진 느낌이다. 다만, 두서없이 진행되는 장면들, 기억의 단편, 자신 조차도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R을 보면서, 누군가와 소통을 하고 싶지만 잘 이뤄지지 않고, 그때문에 오해가 생기게 되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자 한게 아닐까 짐작해본다.

<겨울장면>의 소설이 끝난 뒤, 책의 뒤쪽에 수록되어 있는 몇 편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이전엔 접해보지 않은 작가만의 스타일과 문체가 새롭다고 느껴졌고, 그 새로움이 한편으로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정말로 쓰고 싶은 말들은 단 한 글자도 쓰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작가의 독특한 세계관 때문에 그의 다른 작품들도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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