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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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르고 벼르다가 결국 읽었다.

왜인지 꼭 읽어야할 것 같았다.

그리고 김훈을 유물론자라고 하는 소리를 자주 들어서 궁금하기도 했다.


한 문장에 한 단어씩 굵고 크게 표시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한 문장에 딱 한가지씩만 말하는 문장들로 이루어진 책이다.

(이것은 이 책이나 김훈 작가대해 지겹게 따라 붙는 코멘트인 것 같지만)같은 낱말들로 이루어져 있어도 주어가 무엇인지, 조사가 무엇인지에 따라 말뜻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을 경험했다.


표현을 좀 빌리자면, 칼로 베어지는 것들만 적혀있는 책인 것 같다. 

그런데 그 사이사이에 베어지지 않는 것들이 다른 어느 책보다도 강렬하고 슬프게 느껴진다.


책을 읽는 내내 참담한 기분이 들어서

참담함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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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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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문명, 문화-신화와 서사는 작은 구멍으로도 와르르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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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온톨로지 - 사랑에 관한 차가운 탐구
조중걸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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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읽다가 보면 사랑에 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아서 제목에 낚였나 싶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어떤 하나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 전제해야할 것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은 먼저,

사랑라는 것은 실증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왜 침묵해야 하는지를 또 설명한다.

(내가 예전에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했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지금은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래도 그때 내 마음에는 그것이 진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들에 대해 분석한다.

섹스, 혈연간의 사랑, 애정. 크게 이렇게 세 가지 인 것 같다.

이것들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인간사 전반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을 도입한다.

그것은 인간이 세계로부터 독립하려는 지향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과 인간은 세계에 포함된 존재라는 사실이다.

두 가지의 길항작용으로 인간의 역사와 예술과 철학 등등을 설명하고,

위의 저 세가지를 분석해낸다.

분석의 결과는 물론 그것들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인데,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사랑이 될 가능성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마지막에 이르러 저자는 사랑의 가능성에 대해 아주 짧막하게나마 말한다.-그런데 이 부분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다.

-인간은 자연에 독립된 존재다.

이 두 가지 명제 사이에서 많이 고민했었다.

둘 다 진실이면 안된다는 법이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마지막 부분이 이 책의 일관성을 보장해주고 있는 것 같다.

사랑을 완전히 해체해버린다면 저자는 인간이 세계에 포함된 존재일 뿐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고,

사랑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는 것들을 그저 믿어버린다면 인간을 세계로부터 완전히 독립시켜보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의 구성 자체도 저자 자신의 관점과 일관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조중걸 교수의 철학에 대한 관점이 설득력 있는 것 같고, 

실증적이지 않은 것에 대해서 침묵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더 알아보기 위해

저자의 또 다른 책인 <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를 읽고 있다.

과거의 믿음이 변화해왔다는 사실이 현재의 이념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는 되지 못한다.

진정한 교양은 먼저 스스로일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사랑이라고 불릴 수 없는 다른 어떤 것이라고 밝히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신과 아름다움이 어쩌면 존재할 수 있듯이 사랑도 존재할 수 있다. 이것과 관련해서도 마지막에 얘기할 것이다. 나는 사랑을 포착하고자 하지 않는다. 단지 어쩌면 그것일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우리의 어떤 경향성과 심적 희구에 대해서 결국 말하고자 할 뿐이다.

철학은 결국 인간 지성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의 문제다.
물질주의자들은 거리낌 없이 스스로가 동물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물론 동물이다. 그러나 이들은 차별성과 차이를 혼동하고 있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 차별성은 없다. 모두가 우연히 존재하는 우연한 동물들이다. 동물에게는 세계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의지도차도 없다. 그러나 인간 내면에는 그것이 분명히 있다. 물질주의자들은 세계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인간의 경향에 완전히 눈감는다. 그들은 지성에 일말의 의미조차 부여하지 않는다. 부여한다면 위선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동물임을 말하며 물질주의자임인 자신을 합리화한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침팬지나 바퀴벌레가 스스로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지적 이상주의자가 저지르는 오만이 최악은 아니다. 오만은 단지 지적 이상주의의 그늘이다.
상스러움 혹은 기만으로 덮힌 물질주의적 천박함이 최악이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과 물질적 향락에 큰 가치를 부여한다. 물론 이것은 취향의 문제다. 법률을 어기지 않는 한 모든 세계관과 거기에 준하는 사회적 행위는 결국 취향의 문제로 귀결된다. 슬프게도 여기에도 위계가 존재한다. 솔직한 사람에서 위선적인 사람에 이르는.
취향은 비난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러나 기만은 비난받는다. 그것은 삶에 해악을 끼친다. 우리의 판단력을 마비시키고 세계에 어떤 희망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물질주의자들은 세계에서 스스로를 독립시키는 이상주의자와 세계에 스스로를 일치시키는 사람 양쪽 모두에 걸쳐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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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듯 천천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이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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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고 보는", 거의 유일한 감독인  것 같다.

몇 작품을 보고 '이 감독님 영화 참 좋다, 더 파봐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기는 한데(다른덴 형제, 이안, 이와이 슌지 등 몇명),

아직 그럴 여력이 나지 않고 있다.

여튼 그 사람이 찍은 거의 모든 영화가 내 마음에 쏙 드는 그런 감독을 발견하는 것은 정말 기쁘고 반가운 일이다.

음악에 대해서 특히 그런데, 어떤 가수의 노래 몇몇 곡을 좋아하는 일은 많은데,

한 앨범의 모든 곡이 다 맘에 들거나, 한 가수의 모든 노래가 다 정말 좋다거나 하는 가수는 정말 드물다.

이런 사람들을 한번 발견하면 마음이 든든하다.

 

한편,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만드는 작품마다 내 맘에 쏙들게 만들지?'하는 궁금증도 덩달아 생기게 마련인 것 같다.

사실 그냥 무작정 이 사람이 좋아서,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더 알고싶은 그런 마음인 것 같기도 하다.

여튼 고레헤다 히로카즈는 영화 뿐만 아니라, 글까지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쓴 글이라 다 좋은건가 싶기도 하다.

아직 잘 모르겠다. 이 차이를.

 

이런 사람이어서 그런 영화를 만들었구나, 싶은 부분이 많았다.

이 사람 다큐멘터리 감독출신이어서 그런가 꽤나 현실적이고 비판적인 생각을 하는구나 싶었고,

소소한 것에서도 행복을 잘 느끼는 구나 싶기도 했다.

 

예전에는 이렇게 짧막한 글들을 모아둔 글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모든 글이나 책을 읽을 때, 하나로 꿰어지는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굉장히 노력하는 편인데

이런 책은 그런 것을 찾는 것이 굉장히 어렵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의 본질을 찾는 일이 아닌가 하고 요즘은 생각한다.-그러니까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책을 읽는 것이 이제는 부담없고 재미있다.

그럼에도 꿰뚫는 그 무엇인가가 완전히 없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런 것이 없어도 나는 그냥 이 사람의 영화와 글을 좋아할 것 같다.

 

그런가...그렇게 농밀하지는 않았을 게 틀림없지만, 나와 함께한 3년이라는 축적된 시간이 딸의 내면에서는 완전히 리셋돼 있었다. `피가 섞였다`는 것만으로는 안 되는 구나. 그리고는 `역시 시간인가......`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쪽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힘이 너무 강하면, 그 이면에서 숨쉬게 마련인 그들의 `일상`이 소홀해진다. 그래선 안 된다. 끝까지 일상을 풍성하게, 생생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야기`보다 `인간`이 중요하다.
목욕을 마치고 어머니는 아이의 머리를 어떤 식으로 말려줄까? 세 식구는 침대 위에 어떤 순서로 나란히 누워, 어떤 식으로 손을 잡을까? 아버지는 눈앞에 나타난 친자식의 무엇을 마음에 걸려할까? 누구와 누구를 비교할까?

가능하면 영화에서도 슬픔이나 외로움 같은 감정을 직접 말하지 않으면서 표현해보고 싶다. 문장에서의 `행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면서, 보는 이들이 상상력으로 빈 곳을 채우는 식의 영화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영화를 만들었다.

감정이 형태를 가지려면, 영화로 피면 영화 밖의 또다른 한가지, 자신 이외의 어떤 대상이 필요하다. 감정은 그 외부와의 만남이나 풍돌에 의해 생긴다. 어떤 풍경을 마주한 뒤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아름다움이란 내 쪽에 있는가, 아니면 풍경 쪽에 있는가? 나라는 존재를 중심으로 세계를 생각하는가, 세계를 중심에 두고 나를 그 일부로 여기는가에 따라 180도 다르다.
`천지유정(만물에 사랑이 깃들어 있다)`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인 대만의 허우 샤오시엔 감독이 자주 색종이에 썼던 말인데, 나도 그와 생각을 같이하며, 그와 같은 생각이라는 데 감동한다.
내가 작품을 낳는 것이 아니다. 작품도 감정도 일단은 세계에 내재되어 있고, 나는 그것을 주워모아 손바닥에 올린 뒤 "자 이것 봐"하며 보여줄 뿐이다. 작품은 세계와의 대화다. 이 세계관을 겸허하고 풍요롭다고 생각하는가, 작가로서의 약점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대립은 근원적이다.

"누군가 한 사람을 떠올리며 만들어라." 방송국 신입 사원시절, 선배에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시청자라는 모호한 대상을 지향해 방송을 만들면 결국 누구에게도 가닿지 않는다. 어머니라도 애인이라도 좋으니 한 사람에게 이야기하듯 만들어라." 즉 작품을 표현이 아닌 대화로 여기라고 그는 말했던 것입니다. 이를 염두에 두고 만들면 분명 작품은 문이나 창문을 열어 젖힌 듯, 바람이 잘 드나들게 됩니다. 이렇게 불어온 바람은 내가 자기 표현이라는 말에서 느끼는 `자기 완결감`을 깨끗하게 날려줍니다.

그러나 작가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부자유를 받아들이는 존재라는 체념적인 재도, 그리고 그런 부자유스러움을 재미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감각. 이것이야말로 다큐멘터리적으로 보인다고 나 스스로는 분석한다.

쟈쟈쟈
기분좋은 소릴 내며
오늘도 젖을 짠다
슬프지만 젖을 짠다

기분은 좋지만 슬프다는, 슬프지만 우유는 맛있다는, 이 복잡한 감정을 알게 된 걸 성장이 아니면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
내가 창작을 하며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이 `상`에 집착하며 흘리게 된 출발점은 틀림없이 여기라 하겠다.

나는 주인공이 약점을 극복하고 가족을 지키며 세계를 구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 등신대의 인간만이 사는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 그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를 악무는 것이 아니라, 금방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는 나약함이 필요한 게 아닐까. 결핍은 결점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불완전한 그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풍요롭다고 여기게 된다.

어떤 가정에든 다른 집과 구별되는 그 집만의 약속이나 습관이 있기 마련이다. 욕조에 들어가는 방법이라든지, 수박이나 딸기를 먹는 방법이라든지. 딴 집에서 보면 `엇? 그런 식이야?` 하고 놀라는 경우도 자주 있다. 우리 가족만의 남다른 가풍은 사진을 찍는 방법이었다. 고레에다 집안에서는 옛날부터 밖에서 사진을 찍을 때는 남의 차 앞에서 찍는다고 정해져 있었다. 물론 주인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지는 않는다. 그러고서 마치 자가용인 양 자세를 잡고 찍는 것이다.

그러나 스포츠나 영화에 대해,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결국 오락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상시에는 `자숙`이라는 사고방식이 튀어나오는 게 틀림없다. 그래서 자신이 뛰는 이유에 대해, 직업이니까 혹은 즐거우니까 같은 것 외의 다른 이유를 생각해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게 현실이다. 이는 행복한 일이 아니다. 그것을 오락이라 부르건 문화라고 부르건 상관없다. 그러나 의식주보다 하위인, 그저 소비되는 것으로 보는가(이런 경우라 해야 손에 넣을 수 있는 자유도 있다.), 아니면 유럽에서 축구가 그렇듯 사회와 시민들이 우리의(사회의) 공유재로서 시간을 두고 성숫시켜가야 한다고 파악하는가에는 큰 차이가 있다. 후자 같은 인식이 선수와 관객 사이에서 공유되어 있으면, 퍼포먼스에 스포츠 이외의 `목적`은 없어진다.

그런 이야이를 기시다 씨에게 했더니, "나도 멜로디와 가사는 산책할 때 생각나요"라고 알려줬다. `과연......`하고 납득이 갓다. `구루리`의 곡은 이동장면에 정말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하카타와 가고시마에 사는 아이들이 부모 몰래 신칸센의 첫번째 열차를 보러 가는 이야기다. 물론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신칸센 안. 그리고 선로를 따라 달리는 아이들의 장면을 쓸 때 문득 떠오른 것이 `구루리`의 음악이었다. 그러면 완성된 영화 속에서 두 개의 이동은 어떻게 겹쳐질까?

괜찮았어요. 많은 시간을 들여 신뢰를 쌓았으니, 비록 일시적으로 부서지더라도 회복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의 결함은 문제 삼지 않고, 상대를 이해력 없는 바보라고 생각한다. 카자에 대한 상상력이 결여된 이러한 품위없는 태도가 무시의 본질이라면, 설사 부시를 향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쪽은 결코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진정한 의미의 反부시가 아닐까.
영화는 남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감독은 신도 판사도 아니다. 악인을 설정하는 것으로 이야기(세계)는 알기 쉬워질지 모르지만, 반대로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관객들이 이 영화를 자신의 문제로서 일상에까지 끌고 들어가도록 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찍는 것 자체가 발견이다. 프로파간다와 결별한 취재자의 그런 태도야말로 다큐멘터리라는 방법과 장르를 풍요롭게 하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 병소를 공격하지 않고 안전지대에서 고름만을 찔러 짜낸대도 결코 명세는 나아지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왔다.

시야가 좁고 상상력이 부족한 인간일 수록 내부에서맊에 통용되지 않는 `아름다운 나라`같은 단어를 중얼거리는 법이다.

이런 격식 차리는 자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시간이 맞으면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은 주저하지 않는다. 그 정도는 `어른`으로 있고 싶다.

지금 취재중인 가수 코코는, 토크를 마칠 때 `그래서 부릅니다.`라고 객석을 향해 말합니다. 자신의 나약함이나 어쩔 ㅜㅅ 없는 현실, 소중한 친구의 죽음 증을 마주했을 때......그럼에도 자신은 노래를 부르는 것밖에 할 수 없기에 고개를 들고 "그래서 부릅니다."라고. 저는 이 말이 "그럼에도, 부릅니다."가 아닌 것이 그녀의 강인함이자 대단함이라고 느낍니다.

작품은 시간을 거치며 변화해간다. 그리고 변화한 나와 다시 만난다. "오랜만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실패까지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결국 문화로 성숙된다. 그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망각을 강요하는 것은 인간에게 동물이 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정치와 언론이 행할 수 있는 가장 강하고, 가장 치졸한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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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아주 사적인, 긴 만남 + 사이의 거리만큼, 그리운 - 전2권 아주 사적인, 긴 만남
마종기.루시드폴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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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말들이 많이 담겨있는 책이다.

 

의사이자 시인인 마종기씨와 가수이자 화학자인 조윤석(이 이름의 소리가 참 마음에 든다. 정갈하고 조심스러운 느낌이다.), 루시드 폴이 주고받은 편지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한 사람이 의학과 문학, 음악과 화학을 동시에 좋아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의사와 시인, 가수와 화학자라는 이름을 동시에 갖는 것은 좀 드문 일이기는 하다.

김혜리 영화 평론가의 책 <그림과 그림자>에 대략 이런 의미의 말이 적혀있다.

'나는 사람이 일과 별개로 취미를 가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자신이 그림을 보고, 미술관을 찾는 것이 자신에게는 대단한 사치라는 맥락이었던 것 같다.)

각자의 삶에서 재능과 환경과 노력의 비율들은 다 다르겠지만, 두 사람 모두 참 치열하게 살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주 사적인, 긴 만남>은 루시드 폴의 에세이에 마종기씨가 덧글을 달아놓은 느낌이었다.

루시드 폴은 지속적인 일과 고민을 이어가던 중이었고,

마종기씨는 은퇴를 하고 쉬면서 이것저것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루시드 폴은 전부터 내가 좀 알던 사람이고,

마종기라는 사람은 이 책에서 처음 본 사람이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루시드 폴의 음악을 좋아하지는 않는다.-예의 그 나긋나긋한 말투는 참 부러워하지만.

최근에 나온 앨범의 1번부터 4번까지의 곡들은 꽤나 마음에 들어서

한 삼일동안 그 곡들만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루시드 폴이 삼바와 보사노바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앨범 후반부에 가면 그런 느낌의 음악들이 나왔었다.

나는 그런 음악들을 즐겨 듣지는 않는다.

혹은 루시드 폴의 나이에 내가 더 가깝고, 그의 고민이 나에게 더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책의 후반부 혹은 <사이의 거리만큼, 그리운>에 와서야

마종기씨의 글을 읽으면서 그의 삶은 어떤 것일까, 하고 상상해 보게 된 것 같다.

고국과 부모님에 대한 마음은 나이가 지날 수록 해결되지 않고 커지기만 한다던

박교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마종기씨의 시들을 읽어본 후 다시 읽어버고 싶기도 하고

마종기씨만큼 나이가 차고 읽어보고 싶기도 하다.

그러면 분명 또 다른 것이 보이고, 다르게 보이겠지.

 

편지를 쓴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요즘 나는 말하자면, '편지쓰기 주간'이다.

그리운 사람 몇몇에게 편지를 부쳤고,

나 포함 친구 셋이서 서로 편지를 써서 일년 후에 보자는 약속을 했다.

그 편지들은 지금 내 서랍속 상자에 보관중이다.

1년 후 나에게 보내는 편지도 한통 썼다.

편지를 쓰기위해 흰 종이를 마주하고 펜을 잡으면 나는 대개

할 말을 찾지 못한다.

내가 흰종이 공포증을 앓고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편지라는 것은 내가 하고싶은 말과 받을 사람이 듣고싶을 만한 말을 잘 골라 써야하기 때문은 아닐까.

이렇게 쓰고보니, 나는 지금까지 내가 하고싶은 말들만 써왔다는 생각이 든다.

 

두사람 사이의 사적인 교류이지만, 제삼자가 읽기에도 참 흥미롭고 마음 따뜻해지는 글들이다.

최근에 읽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에세이 <걷는 듯 천천히> 중에서,

"누군가 한 사람을 떠올리며 만들어라." 방송국 신입 사원시절, 선배에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시청자라는 모호한 대상을 지향해 방송을 만들면 결국 누구에게도 가닿지 않는다. 어머니라도 애인이라도 좋으니 한 사람에게 이야기하듯 만들어라." 즉 작품을 표현이 아닌 대화로 여기라고 그는 말했던 것입니다. 이를 염두에 두고 만들면 분명 작품은 문이나 창문을 열어 젖힌 듯, 바람이 잘 드나들게 됩니다. 이렇게 불어온 바람은 내가 자기 표현이라는 말에서 느끼는 '자기 완결감'을 깨끗하게 날려줍니다.

라는 말이 떠올랐다.

 

<사이의 거리만큼, 그리운>에서 루시드 폴이 이렇게 적기도 했다.

앨범 작업이 마무리 된 직후, 앨범 출시 일주일 전부터는 각종 매체들과의 인터부가 있었지요. 세어보니 대략 40군데 안팎이었는데 대략 일주인간 아침부터 저녁까지 거의 매시간 인터뷰를 했습니다. 매체홍보를 담당하는 분은, 체력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힘들테니 여러 기자들과 함께 하는 라운드 인터뷰로 진행을 하자고 했지만, 제가 일대일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요청을 했지요. 그래야 인터뷰어나 인터뷰이 모두 충분히 만족할 만한 인터뷰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몸은 좀 고단했는지 몰라도, 그 많은 인터뷰에서 제가 했던 이야기들이 신기하게도 조금씩 다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더군요.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요.

 

이 책에는 분명

루시드 폴이라는 사람의 한 면과

마종기라는 사람의 한 면이

그리고 두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가

고스란히 담겨있을 것이다.

 

사람의 삶에서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사랑하고 아껴주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아마도 나는 훌륭한 예술가가 못 되는 모양이지요? 그 어떤 좋은 시보다 나는 그런 인간의 훈훈한 관계에서 감동을 더 받습니다.

이 구절은 요즘 계속 곱씹고, 또 문득문득 떠올리게 되는 말이다.

나는 예술과 같이, 아름다운 삶을 살고싶다고 자주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 구절을 읽고는, 내가 그리고 사람들이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는 등 예술을 사랑하는 것은

그것들이 사람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니 내가 예술과 같은 삶을 살고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의 다른 말이 아닐까,

그리고 또 어쩌면 그런 관계를 만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를 더욱더 예술에 몰입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몇 해 전에 죽은 친구의 시집을 윤석군이 결국 출간해주었군요. 정말 축하합니다. 그 시들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따뜻한 시일 것이라 짐작해봅니다. 한번 읽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 시의 행간에서 두 사람의 우정을 만나겠지요. 그 우정은 시보다 더 아름다울 것입니다. 사람의 삶에서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사랑하고 아껴주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아마도 나는 훌륭한 예술가가 못 되는 모양이지요? 그 어떤 좋은 시보다 나는 그런 인간의 훈훈한 관계에서 감동을 더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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