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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듯 천천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이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8월
평점 :
내가 "믿고 보는", 거의 유일한 감독인 것 같다.
몇 작품을 보고 '이 감독님 영화 참 좋다, 더 파봐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기는 한데(다른덴 형제, 이안, 이와이 슌지 등 몇명),
아직 그럴 여력이 나지 않고 있다.
여튼 그 사람이 찍은 거의 모든 영화가 내 마음에 쏙 드는 그런 감독을 발견하는 것은 정말 기쁘고 반가운 일이다.
음악에 대해서 특히 그런데, 어떤 가수의 노래 몇몇 곡을 좋아하는 일은 많은데,
한 앨범의 모든 곡이 다 맘에 들거나, 한 가수의 모든 노래가 다 정말 좋다거나 하는 가수는 정말 드물다.
이런 사람들을 한번 발견하면 마음이 든든하다.
한편,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만드는 작품마다 내 맘에 쏙들게 만들지?'하는 궁금증도 덩달아 생기게 마련인 것 같다.
사실 그냥 무작정 이 사람이 좋아서,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더 알고싶은 그런 마음인 것 같기도 하다.
여튼 고레헤다 히로카즈는 영화 뿐만 아니라, 글까지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쓴 글이라 다 좋은건가 싶기도 하다.
아직 잘 모르겠다. 이 차이를.
이런 사람이어서 그런 영화를 만들었구나, 싶은 부분이 많았다.
그런가...그렇게 농밀하지는 않았을 게 틀림없지만, 나와 함께한 3년이라는 축적된 시간이 딸의 내면에서는 완전히 리셋돼 있었다. `피가 섞였다`는 것만으로는 안 되는 구나. 그리고는 `역시 시간인가......`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쪽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힘이 너무 강하면, 그 이면에서 숨쉬게 마련인 그들의 `일상`이 소홀해진다. 그래선 안 된다. 끝까지 일상을 풍성하게, 생생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야기`보다 `인간`이 중요하다. 목욕을 마치고 어머니는 아이의 머리를 어떤 식으로 말려줄까? 세 식구는 침대 위에 어떤 순서로 나란히 누워, 어떤 식으로 손을 잡을까? 아버지는 눈앞에 나타난 친자식의 무엇을 마음에 걸려할까? 누구와 누구를 비교할까?
가능하면 영화에서도 슬픔이나 외로움 같은 감정을 직접 말하지 않으면서 표현해보고 싶다. 문장에서의 `행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면서, 보는 이들이 상상력으로 빈 곳을 채우는 식의 영화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영화를 만들었다.
감정이 형태를 가지려면, 영화로 피면 영화 밖의 또다른 한가지, 자신 이외의 어떤 대상이 필요하다. 감정은 그 외부와의 만남이나 풍돌에 의해 생긴다. 어떤 풍경을 마주한 뒤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아름다움이란 내 쪽에 있는가, 아니면 풍경 쪽에 있는가? 나라는 존재를 중심으로 세계를 생각하는가, 세계를 중심에 두고 나를 그 일부로 여기는가에 따라 180도 다르다. `천지유정(만물에 사랑이 깃들어 있다)`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인 대만의 허우 샤오시엔 감독이 자주 색종이에 썼던 말인데, 나도 그와 생각을 같이하며, 그와 같은 생각이라는 데 감동한다. 내가 작품을 낳는 것이 아니다. 작품도 감정도 일단은 세계에 내재되어 있고, 나는 그것을 주워모아 손바닥에 올린 뒤 "자 이것 봐"하며 보여줄 뿐이다. 작품은 세계와의 대화다. 이 세계관을 겸허하고 풍요롭다고 생각하는가, 작가로서의 약점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대립은 근원적이다.
"누군가 한 사람을 떠올리며 만들어라." 방송국 신입 사원시절, 선배에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시청자라는 모호한 대상을 지향해 방송을 만들면 결국 누구에게도 가닿지 않는다. 어머니라도 애인이라도 좋으니 한 사람에게 이야기하듯 만들어라." 즉 작품을 표현이 아닌 대화로 여기라고 그는 말했던 것입니다. 이를 염두에 두고 만들면 분명 작품은 문이나 창문을 열어 젖힌 듯, 바람이 잘 드나들게 됩니다. 이렇게 불어온 바람은 내가 자기 표현이라는 말에서 느끼는 `자기 완결감`을 깨끗하게 날려줍니다.
그러나 작가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부자유를 받아들이는 존재라는 체념적인 재도, 그리고 그런 부자유스러움을 재미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감각. 이것이야말로 다큐멘터리적으로 보인다고 나 스스로는 분석한다.
쟈쟈쟈 기분좋은 소릴 내며 오늘도 젖을 짠다 슬프지만 젖을 짠다
기분은 좋지만 슬프다는, 슬프지만 우유는 맛있다는, 이 복잡한 감정을 알게 된 걸 성장이 아니면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 내가 창작을 하며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이 `상`에 집착하며 흘리게 된 출발점은 틀림없이 여기라 하겠다.
나는 주인공이 약점을 극복하고 가족을 지키며 세계를 구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 등신대의 인간만이 사는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 그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를 악무는 것이 아니라, 금방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는 나약함이 필요한 게 아닐까. 결핍은 결점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불완전한 그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풍요롭다고 여기게 된다.
어떤 가정에든 다른 집과 구별되는 그 집만의 약속이나 습관이 있기 마련이다. 욕조에 들어가는 방법이라든지, 수박이나 딸기를 먹는 방법이라든지. 딴 집에서 보면 `엇? 그런 식이야?` 하고 놀라는 경우도 자주 있다. 우리 가족만의 남다른 가풍은 사진을 찍는 방법이었다. 고레에다 집안에서는 옛날부터 밖에서 사진을 찍을 때는 남의 차 앞에서 찍는다고 정해져 있었다. 물론 주인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지는 않는다. 그러고서 마치 자가용인 양 자세를 잡고 찍는 것이다.
그러나 스포츠나 영화에 대해,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결국 오락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상시에는 `자숙`이라는 사고방식이 튀어나오는 게 틀림없다. 그래서 자신이 뛰는 이유에 대해, 직업이니까 혹은 즐거우니까 같은 것 외의 다른 이유를 생각해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게 현실이다. 이는 행복한 일이 아니다. 그것을 오락이라 부르건 문화라고 부르건 상관없다. 그러나 의식주보다 하위인, 그저 소비되는 것으로 보는가(이런 경우라 해야 손에 넣을 수 있는 자유도 있다.), 아니면 유럽에서 축구가 그렇듯 사회와 시민들이 우리의(사회의) 공유재로서 시간을 두고 성숫시켜가야 한다고 파악하는가에는 큰 차이가 있다. 후자 같은 인식이 선수와 관객 사이에서 공유되어 있으면, 퍼포먼스에 스포츠 이외의 `목적`은 없어진다.
그런 이야이를 기시다 씨에게 했더니, "나도 멜로디와 가사는 산책할 때 생각나요"라고 알려줬다. `과연......`하고 납득이 갓다. `구루리`의 곡은 이동장면에 정말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하카타와 가고시마에 사는 아이들이 부모 몰래 신칸센의 첫번째 열차를 보러 가는 이야기다. 물론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신칸센 안. 그리고 선로를 따라 달리는 아이들의 장면을 쓸 때 문득 떠오른 것이 `구루리`의 음악이었다. 그러면 완성된 영화 속에서 두 개의 이동은 어떻게 겹쳐질까?
괜찮았어요. 많은 시간을 들여 신뢰를 쌓았으니, 비록 일시적으로 부서지더라도 회복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의 결함은 문제 삼지 않고, 상대를 이해력 없는 바보라고 생각한다. 카자에 대한 상상력이 결여된 이러한 품위없는 태도가 무시의 본질이라면, 설사 부시를 향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쪽은 결코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진정한 의미의 反부시가 아닐까. 영화는 남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감독은 신도 판사도 아니다. 악인을 설정하는 것으로 이야기(세계)는 알기 쉬워질지 모르지만, 반대로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관객들이 이 영화를 자신의 문제로서 일상에까지 끌고 들어가도록 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찍는 것 자체가 발견이다. 프로파간다와 결별한 취재자의 그런 태도야말로 다큐멘터리라는 방법과 장르를 풍요롭게 하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 병소를 공격하지 않고 안전지대에서 고름만을 찔러 짜낸대도 결코 명세는 나아지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왔다.
시야가 좁고 상상력이 부족한 인간일 수록 내부에서맊에 통용되지 않는 `아름다운 나라`같은 단어를 중얼거리는 법이다.
이런 격식 차리는 자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시간이 맞으면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은 주저하지 않는다. 그 정도는 `어른`으로 있고 싶다.
지금 취재중인 가수 코코는, 토크를 마칠 때 `그래서 부릅니다.`라고 객석을 향해 말합니다. 자신의 나약함이나 어쩔 ㅜㅅ 없는 현실, 소중한 친구의 죽음 증을 마주했을 때......그럼에도 자신은 노래를 부르는 것밖에 할 수 없기에 고개를 들고 "그래서 부릅니다."라고. 저는 이 말이 "그럼에도, 부릅니다."가 아닌 것이 그녀의 강인함이자 대단함이라고 느낍니다.
작품은 시간을 거치며 변화해간다. 그리고 변화한 나와 다시 만난다. "오랜만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실패까지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결국 문화로 성숙된다. 그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망각을 강요하는 것은 인간에게 동물이 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정치와 언론이 행할 수 있는 가장 강하고, 가장 치졸한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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