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가를 처음 안 것은 [모든 것은 빛난다]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신형철의 문학이야기 팟캐스트를 통해 알게되었던 책. 빛나는 것을 찾아 다니다 모든 것이 빛난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의 이야기.

현대를 사는 인간의 불안과 허무주의를 분석하고, 그 해답을 찾는다. 무의미에 허우적거리며 사는 나는 또 다시 답을 찾아 이 책을 읽었지만, 책이 제시하는 해답보다는 분석 자체가 더 인상적이었다. 내가 평생을 느껴왔던 불안의 정체를 정확한 언어로 만나는 경이. 그리고 저자들이 현대인의 정신을 묘사하는 장치가 월리스의 삶과 글이다. 

저자들이 제기하는 해답엥 내가 의문을 가지는 이유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동시네 실천하기 어렵다는 점, 이미 산산히 부서진 거대한 현대의 삶에 비해 너무 미시적인  해법처럼 보인다는 점,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이게 가장 결정적인 이유일 것 같은데 모든 시대는 그 시대만의 삶이 있고 시대마다의 문제를 품고 있을 것이고, 나는 현대에 살고 있으니 현대의 불안을 앓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내가 월리스에게 푹 빠져 있는 이유는 [모든 것은 빛난다]에서 내가 느꼈던 아쉬움과 맞닿아있다. (지금 내가 여기에 빠져 있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일수도 있겠다.) 월리스의 글을 읽다보면, 이 불안하고 예민한 정신, 그런 정신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에 피로를 느끼는 이 정신을 따라가다 보면, 이런 형태로 주어진 이 삶을 받아들이고 살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더 이상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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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음악의 시대는 1600~1750년.


피아노는 아직 없고 하프시코드와 오르간만 있었던 시대였던 것 같다. 하프시코드는 강약 조절이 불가능한 악기. 특유의 음색덕분에 하프시코드라는 걸 바로 알 수 있다. 음반에 있는 하프시코드 연주 버전 곡들을 피아노 연주 버전으로 찾아 들었다. 아무래도 나에게는 이 버전이 훨씬 좋다.


전체적으로 교회나 궁전, 귀족의 음악이라는 느낌.

어떤 음악이든지 밝은 부분, 즐길 수 있는 부분을 반드시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음악에는 그런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바로크 시대에 이탈리아의 문화적 영향력이 강력했고, 그래서 지금까지 이탈리아어가 음악의 공통어로 남아있다고 한다.

소나타는 '소리가 난다', '연주한다'라는 의미. 칸타타는 '부르는 노래'.

자동차와 커피가 떠오를 수 밖에 없는 이름. 아무튼.

협주곡concerto은 독주자 몇 명이 대규모 약단과 '겨룬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악기 연주나 노래가 교양으로 여겨졌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가족들이 모이면 모여서 누구는 피아노를 치고 누구는 노래를 하는 뭔가 유럽 영화에서 본 풍경이 떠올랐다. 콜바넴에서 엘리오에게 피아노 연주를 청하던 장면도.

다들 노래방 가서 노래부르는 것이 자연스럽고, 수 많은 사람들이 가수가 되려고 오디션에 참가하는 풍경이 겹쳐지며

그냥 가족들과 친구들과 취미로 교양으로 즐기는 문화는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페라가 발명된 시기라고 하는데 나는 일단 기악곡 위주로 찾아들었다. 오페라에는 관심이 가지 않는 것 같다. 리날도의'나를 울게하소서'는 여러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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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으로 한 장을 쭉 읽고, 번역본을 읽으면서 이해되지 않았던 문장, 좀 어려웠던 문장/표현 같은 것들을 확인한다.

그런데 번역이 엄청 잘 된 것 같지는 않다. 문단나눔이 원문과 다른 것도 거슬린다. 아무튼 굉장히 재밌게 읽고있다. ㅋㅋ 내 영어 실력이 딱 이 정도라는 것 ㅋㅋㅋ. 읽다보면 늘겠지. 더 어려운 책들 붙잡고 끙끙 댔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수준에 맞는 책 만나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인상깊은 문장 하나를 기록해둔다.


I laughed, because he knew what I was thinking, and very few people ever know what I'm thinking. Then I went in his house.

2장의 중후반부.
메그가 시골로 이사 온 후 처음 친구를 사귀는 대목. 집 근처의 숲 쪽으로 산책을 가고, 텅빈 집들을 탐험하다 한 사람을 만난다. 윌 뱅크씨. 70세 남성.
윌은 메그를 처음만나는데도 메그의 이름을 알고있다. 메그는 어떻게 그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 의아해한다. 윌은 메그에게, 밖은 너무 추우니 집으로 들어가자,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이야기해주겠다 한다(눈이 내리는 겨울이었다).
그러자 메그는 망설인다. 
망설이는 메그를 향해, 윌이 말한다. 네가 정말 아름다운 소녀이기는 하지만, 나는 70세 노인이고 안심해도 된다, 라고 말한다.
그 다음의 문장이다.

1.
메그는 평소에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아이다. 그런데 이렇게 딱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난다. 
누구나 꿈꾸는 순간이 아닐까.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는. 그리고 유년기의 경험은 더 강렬하고 중요할 거라 생각한다. 
메그는 도시에서 그녀가 좋아하던 것들, 자신의 방/자신만의 공간, 어둠 속에서 시간을 알려주던 대학교의 시계탑, 미술 수업, 사진 수업 같은 것들과 떨어져 시골에 와서 살고 있고, 언니과 방을 함께 쓰면서 힘들어 하고 있다. 학교에서도 친구를 사귀지 못하고. 
그런 메그가 친구를 만나는 순간, "반짝"하는 순간이다.

2.
그런데 마음 속에서 "반짝"하는 것을 느끼면서도, 메그가 친구를 만나는 이 순간이 참 따뜻하다는 걸 느끼면서도, 이 소녀에게 내 마음 속 한 구석에서는 "들어가서는 안 돼"라고 말하고 있다.
아이가 집 밖으로 나가 세상과 대면하는 이 순간에, 수 많은 소녀들이 느껴야 할 이 위협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래서 부모들은 끊임없이 아이들을 조심시키고 아이들도 이렇게, 메그처럼 조심하려고 노력하고/망설이는데도, 얼마나 나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지. 
아이들이 조심한다는 것을 어른들은 또 얼마나 잘 알고, 또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술수를 쓰는지. 

물론 메그와 윌은 좋은 친구가 된다. 
하지만 이 순간이 비를려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는 상상도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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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도 쪼끔 읽고, 마르크스도 쪼끔 읽어서
"주노의 변증법"을 어디서 읽은 건지 혼란스럽다.
헤겔의 자기-타자-인간 주체로 이르는 변증법을 마르크스가 창조적으로 읽어낸 개념이었던가....
헤겔이 이미 언급한 개념인데 이 변증법을 마르크스가 새롭게 해석한 것인가....

이제는 내가 읽은 텍스트가 뭐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데...
읽을 때는 정말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읽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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