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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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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그토록 돈을 쓰면서도 알라딘에 리뷰를 쓴 기억은 없다. 좀 부끄럽기도 하고 서재를 새로 연다.

어떻게 하다보니 처음 쓰는 페이퍼들이 모두 이탈리아와 관련돼 있다는 게 신기하다.

저자인 서경식씨는 내 개인적으로는 인연이 깊다. 대학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 그의 <나의 서양 미술 순례>는 서승, 서준식 형제의 재일 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실체를 그들의 가장 가까운 이의 간접적인 말을 통해 느끼게 했고,  무엇보다 그 사건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된 서경식씨와 같은 이들을 알게 했다. 

                 

(*물론 내가 가진 판은 젤 왼쪽에 있는 것이다. 이미지를 가져와보니 이제 서경식씨의 책도 꽤 쌓여간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이야기한 탓에 <청춘의 사신>을 제외하곤 더 이상 구입하진 않았다. 이런 걸 용두사미(?)라고 하나.^^)

그리고 <나의 서양미술순례>를 통해 접했던 미술 작품들은 그때까지 관객으로 피상적으로만 구경하던 미술에 대한 한가지 시각을 갖게 해 주었다. 그것은 한 개인 안팎을 형성하는 역사와 사회적 관계 라는 시선이다. 물론 그것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다. 서경식씨의 예술 에세이가 내게 남긴 것은 무엇보다도 시대나 사회, 즉 한 인간의 환경과 개인이 단절될 수 있다는 나이브한 생각에 대한 반성을 하게 해 줬단 점이었다. 소위 순수주의에 대한 막연한 경멸한 있었을 뿐인 시절, 순수주의란 기만이란 것을 제대로 인식하게 했다고 할까.

그런 그가 본격적으로 디아스포라로서의 한 생에 접근하는 방식이 이 책의 미덕이 아닐까 한다. 폭력과 살육의 역사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이런 책을 바치는 그의 마음은 어떤 간절한 절박함이 있었을 것이다.

소위 증언문학이란 현재와 같은 시대에 낡은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증언하는 그들은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자격이 특권적으로 부여되고, 우리는 그 일방성 앞에서  완전히 수동적으로 들어야만 할 뿐이다. 들을 수 있는 능력, 그것만이 그들 앞에서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최대치의 '정의'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레비나스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증언문학은 우리에게 어떤 삶의 윤리, 더군다나 종래의 윤리를 지속하기 어려운 곤경에 처한 시대상황에서의 윤리를 이야기하고, 우리에게 새롭게 암중모색하게 한다.

브레히트나 잉게 쏠의 책들은 한참 고등학생으로서 87년을 겪었던 내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화두를 갖게 했다. 빅터 프랑클이나 서준식씨의 글 역시 엄청난 부끄러움을 가지고 그러한 물음을 계속해서 놓지 않도록 해 준 책들이다. 특히 <서준식의 옥중서한>은 진실한 글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데 대한 나의 모델이다.     

                         

본론에 충실한 리뷰가 되지 못하고 있는데, 사실 프리모 레비의 이름은 들뢰즈의 책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다름 아닌 <철학이란 무엇인가?> 1부 4장에 해당하는 Geophlosohie 제목(국역본엔 '지리철학'으로 번역돼 있는데, 한 때는 '지질'이란 번역어가 더 나아 보인 적도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영토 territoires ' 개념이 공간적 구획이란 의미 이상의 어떤 국지화된 영역을 가진 것들 사이의 강도적 힘들이 표현하는 차이의 운동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의 장에서 프리모 레비를 언급하고 있다.

소위 독일 철학, 영미철학, 프랑스철학 등으로 영토화되는 철학의 보편성을 우리는 쉽사리 받아들인다. 들뢰즈는 그러한 보편성의 구축이야말로 <세계적 자본주의의 엄청난 상대적 탈영토화가 현대국가에서 재영토화를 필요>로 하는 방식과 유사한 함정에 빠지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들뢰즈의 진단은 철학은 그리스에서부터 도시라는 시장의 친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럼 철학과 자본주의의 관계란 뭐냐? <철학은 자본의 상대적 탈영토화를 절대에로 이끌며, 자본이 무한한 운동으로서 내재성의 구도 위에 펼쳐지도록 만들고, 내적 제한의 자격으로 자본을 제어하고, 자본을 새로운 땅, 새로운 민족에게로 이끌기 위해 자본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거스르며 돌아서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결국 그러한 조건을 통해 철학은 유토피아에 대한 발의를 하게 되는 것이다. 유토피아란 뭐냐? <철학이 정치적이 되고, 시대에 대한 비판의 최고의 경지로까지 이르게>되는 것은 이 유토피아라는 무한한 운동과 함께 가능할 뿐이다.

다시 말해 철학이, 보편적인 민주국가라는 허울의 실제 내용인 시장 자본주의로 재영토화되어 복속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어떤 무한한 탈영토화의 운동 속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운동의 한 유형으로서 프리모 레비는 있다. 인간이라는 수치(아우슈비츠로 대별되는 사건을 막을 수 없었다는 , 또한 거기서 살아남았다는)를 통해 우리는 인간에 대해 세계에 대해 다시 사유할 수 있을 뿐이란 것이다.

실제로 프리모 레비에 대한 글은 최근 출간된 두 책 <이것이 인간인가>, <주기율표>를 통해 다시 세부적으로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서경식 씨의 책은 우리에게 보다 복합적으로 읽힌다. 먼 아우슈비츠와 80년 광주, 그리고 서승/서준식이라는 수형인들을 만든 한국의 현대사, 그리고 계속되는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그들 각각의 삶, 그들을 바라보며 만나는 한 디아스포라로서의 서경식의 실존 등등.  그래서 그 모든 사건들은 우리에게 실제로 외친다. 기억하라고, 사유하라고. 그리고 일상 속에서 변형될 것을..

다만 번역이 크게 정성들인 것 같지는 않다. 한겨레에 연재되는 서경식 씨의 글을 보면 그리 논증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번역자가 세심하게 배려했다면 저자의 내면을 드러내는 글쓰기 스타일을 살릴 수 있었을텐데 간혹 아귀가 맞지 않는 글들이 나열된 것 같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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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블로그 > 커피한잔
원본 http://blog.naver.com/itel21/10000397326
 
이 곡은 1969년 “Nuvole Barocce (바로크의 구름)이란 타이틀로 발매된
파브리지오 데 안드레의 실질적인 5집에 담긴 곡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들려주던 Gino Marinuzzi의 'Il Valzer’를
파브리지오가 가사를 붙여 완성한 곡으로 ‘사랑을 위한 왈츠’란 뜻이다.
아버지가 들려주던 클래식 음악 중 특히 파브리지오가 좋아했던 곡이며
그에게 큰 감동을 주었기에 직접 가사를 붙인 것이다.
이 곡은 25살 때 완성하여 29세가 되던 해에 발표했다.
 
사랑하던 여인이 떠나고 난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름다운 기억과 환상속에 세월이 채워질 때
그 여인이 자신의 노래를 찾게 되지만
예전에 불렀던 아름다운 노래들은
더 이상 그 여인을 위해 부르지 않는다는
 

상당히 추상적이지만 애달픈 사연을 담고 있는 곡이다.
 

Valzer per Un Amore
 
Quando carica d'anni e di castità
tra i ricordi e le illusioni
del bel tempo che non ritornerà,
troverai le mie canzoni,
nel sentirle ti meraviglierai
che qualcuno abbia lodato
le bellezze che allor più non avrai
e che avesti nel tempo passato

ma non ti servirà il ricordo,
non ti servirà
che per piangere il tuo rifiuto
del mio amore che non tornerà.

Ma non ti servirà più a niente,
non ti servirà
che per piangere sui tuoi occhi
che nessuno più canterà.

Ma non ti servirà più a niente,
non ti servirà
che per piangere sui tuoi occhi
che nessuno più canterà.

Vola il tempo lo sai che vola e va,
forse non ce ne accorgiamo
ma più ancora del tempo che non ha età,
siamo noi che ce ne andiamo
e per questo ti dico amore, amor
io t'attenderò ogni sera,
ma tu vieni non aspettare ancor,
vieni adesso finché è primavera.
 
 
 
Via Della Poverta

 

 

파브리지오 데 안드레는 이태리인들에게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스타로서 작곡가이자 뛰어난 재능을 지닌 뮤지션이다. 여느 다른
뮤지션들보다 인간적이고 품위있는 발라드 곡들을 들려주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창녀, 도둑, 법관, 살인자 등 그늘진 민중들을 따스한
시선으로 노래했으며 그만의 즉흥성과 진실성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1940년 제노바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살던 작은 마을에서 전쟁으로
인해 위험속에서 그 도시를 떠나 숲으로의 도피는 어린 파브리지오
에게 자연을 가까이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고 이는 먼 훗날
그의 곡들에서 주요 테마로 다시 등장하게 된다.

70년대 초 밴드를 조직하여 첫 무대 공연을 갖게 되고 첫 싱글
Nuvole Barocche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99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이탈리아 대중 음악의 대부 파브리지오 데 안드레가 남긴
곡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명곡 La Canzone Dell Amore
Perduto 등이 수록된 1974년 Canzoni 앨범 가운데 선곡합니다. 

 
    
 
얼마전 예정에 없던 술자리가 이어져 갔던 Bule-Trip에서 알게 된 이태리 음유시인 파브리지오 데 안드레. 위의 글은 어는 카페에서 찾은 소개글이다.
그날 술자리에서 들었던 음반이 뭐였는지도 확인않고 구입한 그의 시디 두 장.
다행히 별로 실패하진 않았다. 음악 올리기를 할 수 없는 기술 탓에 다른 블로거에게서 퍼 온다. 음조리듯 나른한 음성 속에 묻어있는 짙은 감성이 감미롭고 애잔하다. 내가 구입한 시디에서
레너드 코헨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Nancy>를 올리고 싶은데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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