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art of the article taken from  Adbusters #51

 Freedom in the mental realm is hard to define exactly, but it has a lot to do with privacy - the right to walk into a bank or a mall or a sports stadium without having your picture taken, to work in an office without having your emails monitored, to drive around town without being followed by video cameras. It has to do with dignity - the feeling that you can move thorough society as an individual, alive and unique, instead of as a datapoint in some national security or corporate marketing system. It means having a voice, an opportunity to join the debate about climate change, energy policy or the war on terror. To have not only the option of turning off your TV if you don't like the program, but to change the program itself, to change the way your local TV station covers the news, to have that station's license revoked if enough people in your community don't like the way it's being run.

어느 날, 도서관 한 구석에서 발견한 Adbusters 는 꽤 신선한 잡지였다. 일단 각 이슈의 커버가 독특하고, 그 자체로 당연히 아트워크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커버에 혹해서 잡지를 열었는데, 뭔가 어색하고 허전하다. 무엇이 그런 느낌을 들게하는고해서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보면 그 흔한 광고가 없다. 흔히 잡지의 많은 페이지를 차지하고 하는 협찬사의 광고들 대신에, 그 자리에는 빡빡한 저널들과 사진들과 아트워크가 가득차있다. 그 내용물들 하나하나가 자신들의 메시지를 뚜렷히 전한다. 메시지는 '변화'에 관한 것이다(라고 혼자 생각했다). 수만번 회자되지만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문제들 - end of slavery, end of children labour, civil right, religious freedom, women's right, gay right, environmental justice, communication right, disabled people rights, etc. - 에 대해서 생각하게하고(생각을 시작해보는 것 자체가 변화라고 여긴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변화를 위한 실천을 하게끔 어떤 계기를 던져주는 역할을 꽤 멋지게 하고 있다고 느꼈다.  발견한 뒤, 당장 구독신청을 하고 처음 몇 개월간 열심히 읽어댔다. 그 다음 몇 개월은 사진들과 디자인만 봤다. 그 다음은 들쳐도 보지않은 이슈들이 차곡히 쌓였고, 구독기간은 끝났다.

오랜만에 서랍 정리를 하다가, 한 수첩에서 저 문구 적어놓은 걸 보게 되었다. 아마도, 도서관에서 처음 이 잡지를 만나고 뭔가 뜨거운 마음으로 마음에 들었던 한 저널 중 일부를 옮겨놓았던 것 같다. 가끔은 뭔가를 보고, 읽고, 쓰고 하는게 끝도 없는 허영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모든 것들과 나는 피드백이 없다. 그져 보고, 읽고, 쓰고. 그게 다인 것. 나를 파고드는 것들에 무반응하고 아무런 움직임도 취하지 않은 것. 뭔가 하고 있다는 느낌만은 어떻게든 유지하고 싶어서, 도망치듯 보고, 읽고, 쓰게되는 것. 곧잘 얼굴이 달아오르지만, 이 순간은 유난히 활활 달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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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즈 통을 잃어버렸다. 보관의 방법이야 쓰지 않는 뚜겅 있는 그릇에 담궈두면 되겠다해서거기다 며칠 두었는데, 문제는 내 양쪽 시력의 차이. 불투명한 그릇안에 동동 떠있는 두 개의 렌즈, 뭐가 왼쪽 것이고 무엇이 오른쪽인지. 0.25정도의 차이야 별 문제없겠지, 하고 아무렇게나 잡아 왼쪽부터 붙이고 오른쪽 붙이고 세 시간 째인데, 침침하다. 아무래도 잘못 붙였나보다. 바뀐 눈알 두개로 '위대한 패배자'를 읽고 있다. 사소한 것의 선택에서부터 어리석음이 묻어나오는 내 생활, 찌질한 패배자가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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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뜨거운 순간
에단 호크 지음, 오득주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피자와 콜라를 애써 찾아 먹고싶게 만드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의 명대사는 "couple of coffee, couple of smokes, little conversation, you and me five bucks." 머리에 내추럴 기름을 뒤집어쓰고, 구겨진 옷들 안에 자신을 대충 놓아두고, 건들되며 (나의) 에단이 선명하게 이쁜 노니에게 그렇게 말한다. 바로, '리얼리티 바이츠.' 편의점 안에서 마이 샤로나를 떠들석하게 따라부르며 제대로 흐트러진 네 명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본 이후부터, 지저분하고 건들되며 약간의 또라이끼가 흐르는, 하지만 뜨거운 인간이 나의 이상형이 되었었고, 에단 호크는 나의 에단이 되었다.  

   하지만 나의 변덕이 어찌 가만 있으랴. 이 세상에는 멋지고 귀여운 남성들이 (비록 내 손에 닿지 못하나) 너무나도 많고, 새로운 인물이 나올때마다 나의 이상형은 (너무) 자주 바뀌었다. 그렇게 나의 에단도 그냥 에단이 되었다. 이런 나의 오랜 외도에 그의 화가 폭발한 것일까(착각이 나를 먹여살린다), 도서관 구석 밑칸에서 "나 좀 읽어주소" 하며, <이토록 뜨거운 순간>이 핫빔을 내쏘았고 나는 준비된 타겟이었다.

   단역배우 생활을 하며 근근히 살아가는 윌리엄이 한 바bar에서 가수를 꿈꾸는 사라를 만나 시시껄렁한 농담을 나누면서 둘은 '시작'된다. 한 지붕 아래에 살게되고, 서로를 알아가려다가 지레 겁을 먹고 움추러들기도 하며 둘은 '전개'되고, 격렬한 밤도 나누고, 상처주는 말로 무장하고 서로를 헤집기도 하며, 사라의 어머니를 만나러가기도, 프랑스로 여행을 가기도 하면서 둘은 '절정'을 맞는다. 그리고, 그 후는.

   그 후는. "어디를 가든 모든 것이 나를 울고 싶게 만드는" 순간들이 찾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과민해진 내 감성에 너무 지쳐 있어서 다른 사람이 드러내는 어떤 감정도 감당할 수 없는" 시간도 있을 것이다. 나를 더이상 봐주지 않는 그녀의 아파트 앞으로 가서, 로미오의 대사를 읊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때론 격노하여, 전화기를 세 대나 박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 후는. 가장 뜨거운 상태이니까.

    이 책의 작가인 에단 호크의 '배우'라는 커리어는 작가로서의 그를 보는 일에 방해가 되긴 커녕, 되려 윌리엄의 이미지를 형상화시키는데 큰 도움을 준다. 자전적 내용이 포함되었다는 에단의 말을 제쳐놓고서라도, 윌리엄은 (나의) 에단 같다. 특히나, '리얼리티 바이츠'의 (나의) 에단 같다. 촌스럽다고 당시에는 궁시렁거렸던 한국 번역 제목인 '청춘 스케치'가 어쩌면 코어core를 잘 드러낸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이토록 뜨거운 순간>을 읽고 나서 계속 든다. 빠지고 즐거워하고 악쓰고 울고 쓰러지고, 그리고 다시 눈물을 소매로 닦고 일어서는, 뜨거운 청춘. 그 청춘의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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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그림자 2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여행 때 읽을려고 들고 간 책은 단 두권,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와 '안녕 내 사랑.' 한국어 책에 목말라하는 친구 H에게 건네주기 위해 몇 권의 책을 들고 갔고, 그 친구는 보답처럼 '바람의 그림자'를 건네주었다. 읽기 위해 들고간 책들은 뒷전에 물리고, '바람의 그림자' 에 매료되었다.

인물들과 그 인물들이 얽히면서 드러나는 이야기, 역사는 날 매번 흔드는 소재이고(생각해보면, 소설이라는 것이 인물과 그 인물들의 갈등구조, 그에 따른 이야기일텐데), 책 한권이 소설을 꾸려나가는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는 것 또한 매력적이였다. 무엇보다, 책 중간중간 나오는 지명들에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던 시간에 읽어내려갔던 책이고, 새해 처음으로 읽은 책이기에 시공간적으로 나에게 의미가 큰 책이 되었다.

다니엘이 아버지의 인도로 간 '잊혀진 책들의 묘지'에서 한 권의 책을 발견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책 한권으로 다니엘은 자의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여러 인물과 얽히게 된다. 다니엘이 택한 책의 작가인 훌리안 카락스의 인생과 그의 사람들, 동시적으로 다니엘이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그들이 겹치면서 만들어지는 다니엘의 인생. 책을 읽다보면, 한 사람만 가지곤 '인생'이란 단어가 창조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한 사람의 인생엔 많은 사람들이 관여되고, 관계가 만들어지고, 그 관계 속에서 사연이 탄생하고, 이 사연과 저 사연이 얽혀 또다른 사연을 만들어낸다. 그 사연들이 쌓여서, 하나의 역사가 되고, 그 역사는 계속 흐른다. 누리안이란 인물의 편지 마지막 부분에 이런 말이 나온다. "사람은 기억되는 동안에는 계속 살아 있을 거라는 말이지. ... 비록 한 귀퉁이에 숨겨서라도 나를 떠나보내지 말아줘." 역사가 계속 흐를 수 있다는 것, 그 흐름의 원천에는 기억의 힘이 크다. 기억되는 동안에는, 죽었어도 죽지 않은 것이다. 다니엘이 한 권의 책을 발견하므로써, 그 책은 기억되기 시작하고, 책을 쓴 사람의 영혼과 책을 읽은 사람들의 영혼이 어우러진 하나의 영혼은 더욱 빛나고, 계속 살아있을 것이다. 다니엘과 그 책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인생에도 적용될 것 같다. 클리쉐라지만, 하나의 책은 하나의 인생이고, 누군가를 발견하고 기억하는 일이 그 인생이라는 책 안에서 흐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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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부터 눈이 계속 내린다, 나름의 강약을 조절하며. 쁘띠꼬숑의 짐들이 없어지니, 집이 엄청 휑하다. 같이 먹던 밥을 혼자 먹으려니, 이틀 전부터 체기가 돌아서, 어제는 타던 버스에서 내려 만약의 사태를 진정시키느라 숨을 고르고 몇 분간을 앉아 있어야 했다. 아무렇게나 주워입고 나온 옷 덕택에 추워서 며칠 간 움추렸더니, 갈비뼈 부분도 아프다. 기말고사를 앞둔 가니도 원인 알 수 없는 몸살이 나서 기운이 영 없는 목소리라 신경 쓰이고. 달뚜 물 달라고 낑낑되는 소리에 일어나는 것도 벅차다는데, 당연지사 달뚜도 조금 골골거리게 될 듯 싶다. 그렇대도 도대체 난 뭐를 할 수 있는지. 나에게 의미있는 것들, 내가 의미가 되는 것들, 그런 것들이 마구 무서워진다.

 

내가 애용하는 두 도서관은 내 연체료 덕에 책 수십권 들여놓을 수 있을 듯도 하다. 어제 겨우, 밀린 책들을 벌금과 같이 반납하고, 또 한뭉탱이 빌려왔다. 그 중 유랑가족을 막 읽었는데, 상황들과 연결되어서 가슴이 조금, 먹먹하다. 난  '겨울의 정취'나 즐기며 탱자탱자 놀 깜냥밖에 되지 않는다. 그 정취안에 묻혀진 삶, 정말 제대로 외면하고 있는걸. "어둡고 부정적"이고 "상투적"인 이야기들, 언제 대체 한번이라도 들을려고 노력한 적이나 있는지. 따져보면 다 기구한 인생이라지만, 내 생활은 기구할 거 없고, 나는 부끄럽기만하다.

 

의미있는 삶이란게 대체 뭐길래.

 

고구마 세개를 삶았다. 여기 얌은 삶으면 뭔가 밍밍한 맛이라길래, 꼬숑과 몇 주전에 한국 식품점에서 한국 고구마라고 사왔는데, 결국 먹고싶어하던 꼬숑은 못 먹고가고 나만 먹는다. 떡볶이 국을 한번 만들고나서, 음식갖고 뭐 하는 일(요리라고도 못하겠다)에 또다시 벌벌거리고 있는데, 고구마는 잘 삶겨졌다. 한번 꺾이고나서 '다시' 뭔갈 한다는 걸, 언제부턴가 많이 무서워하게됐다. 나름의 심지,라는게 언제까진 있었던 것도 같은데. 뭐, (초간단한) 고구마 삶기를 무사히 마쳤으니, 조금의 자신감이라도 다시 붙을까. 이런 엄청난 오버가 있나. 하지만 이런 엄청난 비약을 서슴없이 자주 하고 싶을 정도로, 의미라는게, 절실하다. 무섭고, 뭔가 싶다가도, 그게 다 절실해서 그런 거 같고.

 

어쨌거나, 고구마는 맛있다. 읽을 책들은 널부러져 있고, (나도 널부러져 있고), 파이널은 코 앞이고, (나는 또 널부러져 있고) 체기는 가라앉는 중이고. 조금, 나아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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