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뜨거운 순간
에단 호크 지음, 오득주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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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피자와 콜라를 애써 찾아 먹고싶게 만드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의 명대사는 "couple of coffee, couple of smokes, little conversation, you and me five bucks." 머리에 내추럴 기름을 뒤집어쓰고, 구겨진 옷들 안에 자신을 대충 놓아두고, 건들되며 (나의) 에단이 선명하게 이쁜 노니에게 그렇게 말한다. 바로, '리얼리티 바이츠.' 편의점 안에서 마이 샤로나를 떠들석하게 따라부르며 제대로 흐트러진 네 명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본 이후부터, 지저분하고 건들되며 약간의 또라이끼가 흐르는, 하지만 뜨거운 인간이 나의 이상형이 되었었고, 에단 호크는 나의 에단이 되었다.  

   하지만 나의 변덕이 어찌 가만 있으랴. 이 세상에는 멋지고 귀여운 남성들이 (비록 내 손에 닿지 못하나) 너무나도 많고, 새로운 인물이 나올때마다 나의 이상형은 (너무) 자주 바뀌었다. 그렇게 나의 에단도 그냥 에단이 되었다. 이런 나의 오랜 외도에 그의 화가 폭발한 것일까(착각이 나를 먹여살린다), 도서관 구석 밑칸에서 "나 좀 읽어주소" 하며, <이토록 뜨거운 순간>이 핫빔을 내쏘았고 나는 준비된 타겟이었다.

   단역배우 생활을 하며 근근히 살아가는 윌리엄이 한 바bar에서 가수를 꿈꾸는 사라를 만나 시시껄렁한 농담을 나누면서 둘은 '시작'된다. 한 지붕 아래에 살게되고, 서로를 알아가려다가 지레 겁을 먹고 움추러들기도 하며 둘은 '전개'되고, 격렬한 밤도 나누고, 상처주는 말로 무장하고 서로를 헤집기도 하며, 사라의 어머니를 만나러가기도, 프랑스로 여행을 가기도 하면서 둘은 '절정'을 맞는다. 그리고, 그 후는.

   그 후는. "어디를 가든 모든 것이 나를 울고 싶게 만드는" 순간들이 찾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과민해진 내 감성에 너무 지쳐 있어서 다른 사람이 드러내는 어떤 감정도 감당할 수 없는" 시간도 있을 것이다. 나를 더이상 봐주지 않는 그녀의 아파트 앞으로 가서, 로미오의 대사를 읊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때론 격노하여, 전화기를 세 대나 박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 후는. 가장 뜨거운 상태이니까.

    이 책의 작가인 에단 호크의 '배우'라는 커리어는 작가로서의 그를 보는 일에 방해가 되긴 커녕, 되려 윌리엄의 이미지를 형상화시키는데 큰 도움을 준다. 자전적 내용이 포함되었다는 에단의 말을 제쳐놓고서라도, 윌리엄은 (나의) 에단 같다. 특히나, '리얼리티 바이츠'의 (나의) 에단 같다. 촌스럽다고 당시에는 궁시렁거렸던 한국 번역 제목인 '청춘 스케치'가 어쩌면 코어core를 잘 드러낸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이토록 뜨거운 순간>을 읽고 나서 계속 든다. 빠지고 즐거워하고 악쓰고 울고 쓰러지고, 그리고 다시 눈물을 소매로 닦고 일어서는, 뜨거운 청춘. 그 청춘의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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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그림자 2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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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여행 때 읽을려고 들고 간 책은 단 두권,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와 '안녕 내 사랑.' 한국어 책에 목말라하는 친구 H에게 건네주기 위해 몇 권의 책을 들고 갔고, 그 친구는 보답처럼 '바람의 그림자'를 건네주었다. 읽기 위해 들고간 책들은 뒷전에 물리고, '바람의 그림자' 에 매료되었다.

인물들과 그 인물들이 얽히면서 드러나는 이야기, 역사는 날 매번 흔드는 소재이고(생각해보면, 소설이라는 것이 인물과 그 인물들의 갈등구조, 그에 따른 이야기일텐데), 책 한권이 소설을 꾸려나가는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는 것 또한 매력적이였다. 무엇보다, 책 중간중간 나오는 지명들에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던 시간에 읽어내려갔던 책이고, 새해 처음으로 읽은 책이기에 시공간적으로 나에게 의미가 큰 책이 되었다.

다니엘이 아버지의 인도로 간 '잊혀진 책들의 묘지'에서 한 권의 책을 발견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책 한권으로 다니엘은 자의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여러 인물과 얽히게 된다. 다니엘이 택한 책의 작가인 훌리안 카락스의 인생과 그의 사람들, 동시적으로 다니엘이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그들이 겹치면서 만들어지는 다니엘의 인생. 책을 읽다보면, 한 사람만 가지곤 '인생'이란 단어가 창조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한 사람의 인생엔 많은 사람들이 관여되고, 관계가 만들어지고, 그 관계 속에서 사연이 탄생하고, 이 사연과 저 사연이 얽혀 또다른 사연을 만들어낸다. 그 사연들이 쌓여서, 하나의 역사가 되고, 그 역사는 계속 흐른다. 누리안이란 인물의 편지 마지막 부분에 이런 말이 나온다. "사람은 기억되는 동안에는 계속 살아 있을 거라는 말이지. ... 비록 한 귀퉁이에 숨겨서라도 나를 떠나보내지 말아줘." 역사가 계속 흐를 수 있다는 것, 그 흐름의 원천에는 기억의 힘이 크다. 기억되는 동안에는, 죽었어도 죽지 않은 것이다. 다니엘이 한 권의 책을 발견하므로써, 그 책은 기억되기 시작하고, 책을 쓴 사람의 영혼과 책을 읽은 사람들의 영혼이 어우러진 하나의 영혼은 더욱 빛나고, 계속 살아있을 것이다. 다니엘과 그 책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인생에도 적용될 것 같다. 클리쉐라지만, 하나의 책은 하나의 인생이고, 누군가를 발견하고 기억하는 일이 그 인생이라는 책 안에서 흐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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