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재즈계 물들이는 한국여성 3人 3味
일본 재즈계에서 한국계 여성 파워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일본은 미국 다음으로 재즈 시장 규모가 큰 곳. 당연히 실력 있는 연주자들과 보컬리스트들이 적지 않다. 경쟁 치열한 일본 재즈 무대에서 보컬 부문 정상권에 오른 재일교포 3인방. 게이코 리, 안 샐리, 눈. 이름만으론 국적을 파악하기 힘들지만 그들은 모두 한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창법과 음색도 3인3색. 게이코 리는 ‘블루지’하고, 안 샐리는 맑고 곱다. 막내인 눈은 포근하게 속삭이는 창법이 매혹적이다.
▲‘곰삭은 젓갈’ 게이코 리
게이코 리의 목소리는 곰삭은 젓갈 같다. 저음의 허스키 보이스. 재즈적 감각도 탁월하다. 한국 이름은 이경자(李京子). 1965년 일본 아이치현에서 재일교포 3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 고교 시절에 퓨전밴드의 키보드 주자로 잠시 활동했다.
재즈 보컬리스트로 첫발을 내디딘 것은 93년. 도쿄와 나고야의 재즈바에서 노래하다 유명한 재즈 드러머 그래디 데이트에게 발탁되었다. 95년 첫 앨범 ‘Imagine’ 발표. 피아노에 캐니 배론, 드럼에 그래디 데이트, 베이스를 레이 드러몬드가 맡은 최상의 세션이었다. 그녀는 이 데뷔 앨범 한장으로 일본 최고의 재즈가수로 ‘떴다’. 서양인이나 일본인은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음색과 창법. 그녀의 노래는 일본 재즈팬들을 적잖이 열광시켰다.
이 음반은 곧바로 한국에 상륙, 수많은 게이코 리의 팬을 만들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웨이브진 긴 머리, 상큼하게 치켜올라간 눈꼬리, 반쯤 잠든 듯한 나른한 표정도 인기에 한몫을 담당했다. 그녀는 지난해 발표한 ‘Vitamin K’까지 모두 12장의 앨범을 내놓았다. 그동안 함께 녹음한 연주자들의 면면이 한마디로 ‘드림팀’이다. 리 코니츠, 아트 파머, 론 카터, 조 헨더슨 등.
그녀는 99년 일본의 재즈잡지 ‘스윙저널’에서 ‘베스트 보컬리스트’로 선정됐다. 현재 일본 재즈 무대에서 그녀의 라이벌은 오직 한명. 148㎝의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폭발적 ‘보컬 파워’를 보여주는 치에 아야도
정도다.
내년이면 마흔. 노래에서는 해가 갈수록 연륜이 배어난다. ‘한국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그녀의 목소리는 서편제 한 대목을 불러도 어울릴 듯하다. 몇해 전 내한한 그녀에게 “혹시 판소리를 들어봤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런 질문을 여러 사람에게 들었다”면서 “판소리를 몇번 들어봤는데, 이상하게 자꾸 마음이 끌린다”고 대답했다.
▲‘상큼한 샐러드’ 안 샐리
안샐리의 목소리는 맑고 투명하다. 낮은 음역에선 다소 불안할 때도 있지만, 비음이 약간 섞인 중·고역에선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뽐낸다. 게이코 리의 음색과는 정반대. 안 샐리의 상큼한 목소리는 보사노바 스타일의 재즈에서 특히 빛난다. 수면을 가볍게 차고 날아오르는 작은 새. 그녀의 보사노바는 그런 풍경을 떠오르게 한다.
올해로 데뷔 4년째. 안 샐리는 이력이 독특하다. 게이코 리와 마찬가지로 재일교포 3세.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났다. 음악의 길에 들어선 것은 의대 재학중이던 시절, 학교 서클에서 노래를 부르면서였다. 재즈와 의학공부를 병행하며 무사히 대학을 마친 그녀는 현재 심장내과 전문의로 일한다. 의사와 재즈의 길을 동시에 걷는 보기 드문 경우. 요즘 말로 ‘투잡스족’인 셈이다.
남자처럼 짧게 자른 머리에 눈빛이 제법 강렬하다. 어두운 조명이 어울리는 게이코 리의 분위기와 달리, 안 샐리는 깔끔하고 단정하다. 음악도 역시 외모와 닮았다. 2001년 10월에 발표한 첫 앨범 ‘Voyage’는 깔끔한 그릇에 보기 좋게 담긴 일본 음식 같다. 일본에서 보사노바 기타 일인자로 평가받는 나카무라 요시로, 하모니카 연주로 전세계에 폭넓은 팬을 갖고 있는 투츠 틸레망스가 참여했다. 나카무라 요시로는 국내에 생소하지만 투츠 틸레망스는 많이 알려져 있다. 편안하게 듣기에 딱 좋은 그의 하모니카 연주를 기억한다면 안 샐리의 첫 음반에 담긴 음악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안 샐리는 지금까지 모두 4장의 음반을 내놓았다. 지난해 4월 ‘Day Dream’과 ‘Moon Dance’를 동시 발매했고, 12월엔 ‘Hallelujah’를 발표하여 일본 HMV 재즈차트의 정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직 국내에 선보인 음반은 없다. 한국 시장에선 올봄부터 순차적으로 발매, 올해 안에 4장이 모두 출시될 예정이다. C&L과 BMG에서 각각 2장씩 내놓는다.
▲‘부드러운 케익’ 눈
눈은 지난해 10월 데뷔, 재즈계의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올해 26살. 한없이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파워가 실린 목소리는 아니지만, 온몸에 감기는 듯한 부드러운 스윙이 일품이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가성을 사용하는 창법. 일본의 재즈 비평가 후나미 마리네는 “눈의 가성은 우아하고 경쾌하며 포용력이 넘친다”고 극찬했다.
그녀는 재일교포 4세. 게다가 안 샐리와는 먼 친척뻘이다. 재즈계 데뷔는 우연이었다. 어느날 ‘친척 언니’ 안 샐리의 집을 방문했다가 일본 재즈계의 유력자인 스즈키 곤잘레스를 만난다. 그는 안 샐리를 데뷔시킨 프로듀서였고 소울보사 트리오의 리더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스즈키 곤잘레스는 바로 그 자리에서 눈의 노래에 매료돼 가수로 데뷔시킬 결심을 굳힌다. 그는 즉각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자고 제의한다. 바로 이 레코딩이 지난해 10월 JVC를 통해 발매된 눈의 데뷔 앨범 ‘Better Than Anything’이다. 한마디로 속전 속결. 하지만 음반에 담긴 모든 곡들이 한치의 허술함도 없다. 그만큼 눈은 재즈 보컬리스트로서의 재질을 타고났다.
이 데뷔 앨범은 최근 국내에도 출시됐다. 베니 굿맨의 연주로 유명한 ‘Moonglow’부터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로 널리 알려진 ‘Getting Some Fun Out Of Life’까지 모두 12곡을 수록했다. 재즈 스탠더드 넘버로 가득 채워진, 부담 없이 듣기 좋은 음반이다.
눈은 일본 재즈계의 떠오르는 별이다. 실제 이름은 가와무라 가스미. 데뷔 후 5개월도 되지 않은 짧은 기간이지만, 최근 재즈보컬 인기차트 3위까지 치솟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자신이 한국계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 듯하다. 지난해 말부터 일본의 음악잡지들은 일제히 눈을 대서특필했지만 그 어디에도 그녀가 한국계라는 내용은 실려있지 않다.
〈문학수기자 sachi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