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터치? 현실 파노라마 긴호흡으로!
[한겨레 2004-08-08 20:48]

[한겨레] 박건웅씨의 장편만화 맥잇기
2004년 한국의 만화팬들은 에세이툰(에세이 형식 만화)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올 상반기 출간된 장편 만화는 손으로 꼽힐 정도다. 그것도 대개 만화 전문 출판사인 〈청년사〉의 시리즈물로 대변되는 중견 이상 작가들의 복간 작품이다. 급기야 대형서점은 애초 에세이툰 신간을 들일 때 10~20부만 보내달라고 요청할 지경이다. 책종이 많아서다. 이전에는 권당 30~50부 정도였다. 젊은 만화가들 모두 에세이툰의 범람에 휩쓸린 걸까 최근 출간된, 작가의 경력만큼이나 짧은 제목의 〈꽃〉은 “그게 아니올시다!”라고 외친다.

4부작 〈꽃〉을 그린 박건웅(32·사진)씨는 스스로 말하는 ‘외골수’, 만화평론가 백정숙씨가 말하는 ‘별종’ 작가다. 1200장의 〈꽃〉 원고를 5년의 품을 들여 갈무리했다. 장편의 대가인 이두호 화백이 가장 긴 시간을 들여 만든 〈임꺽정〉(5년 3개월가량)에 버금간다. 프로 만화계에 데뷔한 지 고작 2년. 그러나 장편 만화에 대한 철학은 누구보다 옹골차다. “집요하게 파고들어 파란만장한 인간의 이야기를 엄숙하게 그리는 게 나한테 맞다. 에세이툰 등의 유행에 휩쓸릴 이유가 없다. 이 신념은 앞으로도 변치 않을 것이다.” 당연히 책 내용도 만만치 않다. 장기수로 상징되는 우리 근현대사의 그늘에 대한 나직한 이야기다. 시대를 넘으며 고통 받은 장기수 쟁초의 가슴 속에 핀 빨간 꽃송이처럼 그 그늘은 여전히 선명하다.

근현대사 그늘 그린 ‘꽃’
5년 품들여 1200여장 갈무리
“칸과칸 사이 못담을게 없는 우주”
마라톤하듯 포기 유혹 넘겨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박씨는 군 복무 중에 〈꽃〉의 시나리오를 완성했고, 제대한 1997년 겨울부터 그림을 그린 다섯해 동안 하루 평균 7시간을 이 작품에만 쏟아부었다. “만화를 하다보니 칸과 칸 사이에 하나의 우주가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 담을 게 없는 거대한 매체란 느낌과 함께 만화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한달음에 긴 여정을 마친 건 아니다. 경제적 압박뿐만 아니라 ‘마라톤 게임’은 언제나 고되다. 작업비를 마련하기 위해 한 달 이상 작업을 멈춘 적도 있었다. “술집 벽화, 환경미화원의 임시거처에 페인트 그림을 그리기”도 한 박씨는 “남들의 ‘삶’을 엿듣고 호흡도 고를 수 있어 좋았다”며 웃는다.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떠올린 작업 노트. 복무 중 가슴에 낙인 찍듯 적은 ‘이 땅의 현실을 아름답게 그릴 겁니다’란 글귀는 작가의 올바른 현실 인식과 만화의 창조적 실험이라는 화두를 붙잡아준다. 덕분에 〈꽃〉 1부가 ‘2000년 서울애니메이션센터의 제작지원 공모작’으로 뽑히기도 했다.

백정숙씨는 “백성민씨가 〈장길산〉을 연재 없이 펴냈을 때 괴짜 정도는 아니었지만 지금 박 작가는 괴짜가 되는 시대”라며 “서사적 힘을 갖춘 만화들이 함께 발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씨는 현재 노근리 사건을 주제로 한 장편을 기획 중이다. 이번에는 수묵화 형식으로 한지에 담아낼 계획이다. 2년을 예정한다. “작가는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개척해 나가는 자”라 이름하며 “조건과 상황에 얽매이지 않는, 진정 ‘작가’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이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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