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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불의 검
작 가 : 김혜린
출 판 사 : 1992 년 육영재단의 댕기에서 연재 시작. 잡지폐간 이후 2 년간 붕 뜬 상태에서 화이트에 5 회 연재. 다시 잡지 휴간(사실상의 폐간)으로 붕 뜸. 대원에서 다시 출간, 이후 단행본 출간. 2003 년까지 12 권 완간을 목표로 작업한다는 언론 발표 이후 오리무중, 전격 애장본 출간 이후 만화웹진 we6 에 연재 결정
평 점 : ★★★★★ |
순정만화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이 이야기를 어찌 다 필설로 풀어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다. 단순히 <불의 검>이란 작품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기엔 '제 3 세대 순정 만화작가군의 대표적인 작가' 라는 작가 김혜린이 가진 무게가 부담스럽게만 느껴진다. 김혜린이 걸어온 길이 한국 순정만화계의 르네상스와 함께 했으며, 그녀의 작품이 바로 90 년대 시작된 한국 순정만화 르네상스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작품들이었기에, 그녀를 더듬어 간다는 것 자체가 80 년대와 90 년대, 그리고 2 천년대를 관통하는 한국 순정만화의 역사를 되짚어 가는 장대한 역사탐험(?)의 시작이기에, 그녀를 설명한다는 것이 바로 한국 순정만화의 역사를 설명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다 할 수 있겠다. 제3세대 순정 만화작가 김혜린
순정만화(純情漫畵)란 한자 뜻 그대로 해석 한다면, ‘섞임이 없는 순수한 본성 + 질펀한 그림이 넘쳐 흐른다 = 순정만화’ 라는 개념이 성립된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 속에 각인된 순정만화란 개념이란, 여자들이 보는 만화책, 닭살 연애 만화 + 신데렐라 콤플렉스 덩어리 등등 그닥 호의적인 단어로 기억되는 만화는 아니다. 만약 남자가 이런 순정만화를 본다는 건 90 년대 당시로선 '상당한 각오' 가 필요한 행동이었다. 자, 그럼 이런 순정만화는 다른 나라에도 있는 것일까?
솔직히 말해 순정만화(純情漫畵)란 말이 있는 나라는 한국 밖에 없다. 일각에선 순정만화란 것이 일본에서 건너왔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순정만화란 단어가 일본에서 건너온 것은 아니다. 일본의 경우엔 순정만화가 없다. 그렇다면 일본엔 여자들이 보는 만화가 없다는 것일까? 일본엔 여자들이 보는 소녀만화란 것이 있을 뿐 순정만화는 없다. 웃기는 것이 이런 만화의 남녀구분의 시초는 일본이 최초란 것이다. (서양의 경우에도 일본에서 건너간 소녀만화에 의해 여성들을 위한 '전용' 만화가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소녀만화, 순정만화란 개념은 유교적 영향권이 강한 동양권 국가에서 등장한 것으로 여성에 대한 굴종을 강조하는 영향에 의해서인지 여성을 위한 만화가 나오게 되는 기이한 현상을 낳게 된다.)
최초 일본의 경우에는 소년만화보다 소녀만화가 먼저 나왔다. 국내에서 <사파이어 왕자>라는 타이틀로 80 년대 한창 방영 하였던 테츠카 오사무의 <리본의 기사>가 1953 년 '소녀클럽' 이란 잡지에서 연재되면서 그 시작을 알렸는데, 이후 여자를 위한 만화를 '소녀만화' 라는 대명사로 불리게 되었다. 소녀들을 대상으로 한 잡지가 나오고 얼마 뒤 소년지들이 창간한 걸 보면, 일반적으로 순정만화를 하위 개념으로 두는 것이 잘못된 상식이라 볼 수 있겠다. 어쨌든 이런 소녀만화란 장르가 한국에 넘어와 '순정만화' 로 자리매김 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바로 그 말많고 탈많은 <캔디>의 등장 때문이었다.
70 년대 해적판으로 들어와 수많은 한국 여학생들의 가슴을 요동치게 만들었던 캔디.. '테리우스 G. 그란체스터' 란 최고의 히어로를 만들어 낸 캔디는 이 척박한 한국 땅에 '순정만화' 란 장르에 대한 패러다임을 일거에 바꾸어 놓았다.(웃기는 것이 2002 년 하이북스에서 <캔디캔디> 애장판을 찍어냈는데, 종이질과 제본 상태, 표지 디자인은 한 눈에 정식 라이센스본이란 착각이 들게 만들었으나, 한국땅에 들어온지 30 년이 지난 상황에서도 해적판으로만 독자에게 전해졌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작화를 한 이가라시 유미코와 스토리를 그린 미즈키 쿄코가 법적 분쟁에 들어간 상황인지라 판권 문제가 애매하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캔디캔디가 이 땅에서 명멸하였고, 나중엔 한국에서 고스트라이터를 고용해서 한국판 캔디를 찍어내 나중에 캔디와 테리우스를 결혼시키는 촌극까지 연출해 낸걸 보면, 한국이란 나라의 '위대함' 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주었다)
캔디캔디와 함께 80 년대 한국 순정만화계를 뒤엎어 버린 또 하나의 걸작이 들어와 순정만화에 대한 확실한 결정타를 먹이게 되는데 바로 이케다 리요코와 미야모토 에리카의 <올훼스의 창>이었다. 그리고 이런 순정만화에 대한 환상을 '집착' 으로 이끌고 간 것이 바로 와타나베 미사코의 <유리의 성>이었다. 이 세 작품의 한국 상륙은 한국 순정만화계의 부활이란 놀라운 결과를 도출해 낸다.
일단 한국 자체적인 순수 토종 순정만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봐야 겠는데, 구체적으로 '1세대 순정만화 작가' 의 대표를 우리는 60 년대 활동안 엄희자씨나 조원기씨 등에서 찾게 된다. 초기 순정만화는 소녀가 등장하며 배경은 가정을 주 무대로 그려진 작품으로 소위 '가정만화' 라고 불리는 만화 장르의 시초였다. 이 가정만화가 순정만화로 발전하게 되는데, 바로 70 년대 한국 순정만화가 사그러드는 배경이 된다. 70 년대 그 엄혹했던 군사문화에 의한 심의와 규제로 순정만화는 '가정만화' 의 틀을 벗어날 수 없었고(한 방안에 남매 두 명이 앉아 있는 장면도 불건전하다 하여 심의에 걸릴 정도) 독자들은 순정만화를 외면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이미 1950 년대 말 한국 만화판은 '대본소 체제' 로 완전히 굳어져버린 상황이었고, 뒤이어 등장한 '합동' 의 등장으로 한국 만화판은 개판 5 분전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된다. 물론 [새소년] 이나 [어깨동무] 의 부록으로 등장한 만화잡지의 등장으로 대본소 체제 아닌 만화연재가 가능했긴 했지만, 이는 그야말로 가뭄에 콩 나는 것이었고, 대부분의 만화가가 대본소 체제에 순응해야 했다. 그리고 다들 아시겠지만, 대본소 체제의 주 소비자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 였다. 결국 몇 안되는 1 세대 순정만화 작가군이 활동을 접으며, 한국 순정만화는 그렇게 사그러들게 된다.
그리고 70 년대 말.. 한국 땅에 '캔디' 가 들어왔다. 그리고 폭발하게 된다. 그 동안 시장으로 생각 안하던 '소녀' 들이 만화의 소비층으로 부쩍 다가선 것이었다. 결국 만화판은 일본 불법 복제만화의 양산과 함께 한국 순정만화가들의 등장을 예고하게 되었고, 그들이 바로 황미나, 이진주, 김동화 등등이 주축이 되는 '제 2 세대 순정만화 작가' 들이었다. 그때 유명한 일화의 하나로 황미나의 역작인 <아뉴스 데이>란 작품에 관한 것인데(필자는 90 년대 복간된 작품을 봤다), 당시 황미나의 원고를 본 출판사 관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 "일본만화 누구 걸 베꼈냐?” 였다. 제 2 세대 순정만화 작가들의 실력과 당시 한국만화 출판관계자들의 수준을 잘 보여주는 일화라 할 수 있겠다. 여하튼 이 2 세대 작가군의 꼬리를 물고 뒤이어 등장하는 것이 바로 '제3세대 순정만화 작가' 들이다. 80 년대 중후반과 90 년대 이름을 떨친 김혜린, 신일숙, 김진, 이미라, 이은혜, 강경옥 등등 지금도 만화를 보는 분이라면 한번쯤 고개를 끄덕일 만한 작가들이다. 개인적으로 본 필자는 이들 제 3 세대 순정만화 작가군을 한국 순정만화의 'Golden Age' 라고 말하고 싶다.
김혜린은 <북해의 별>로 1983 년 데뷔하게 되는데, 당시 그 혼란한 정국 속에서 한 때 운동권의 '학습교재' 로 그 임무를 다 했던 이 <북해의 별>은 김혜린의 데뷔작이자 대표작이고, 히트작이 되었으며, 작가인 김혜린은 1985 년 1 월 황미나 등과 함께 한국 만화 르네상스의 시작인 '나인' 이란 동인을 만들게 된다. 9 명의 순정만화 작가들이 뭉쳐서 만든 나인, 그리고 그들의 작지만 의미있는 일보가 되는 '아홉번째 신화' 란 동인지... 다들 예상했겠지만, 이 '아홉 번째 신화' 가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렸다. 80 년대 그 엄혹했던 검열의 칼날을 피한(비매품인 동인지였으니 검열과는 별 상관이 없었다) 아홉 번째 신화는 1,2 호 때 1 천부를 찍었다가 순식간에 매진되어버리는 기염을 토해내더니, 3 호부터는 원정 출판사의 제작지원을 받아 3 천부를 찍어 판매를 하게 된다. 이 역시 순식간에 동이 나버리고, 이 '유의미한 결과' 는 결국 한국 순정만화 잡지 탄생에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바로 '시장의 확인' 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1988 년 11 월 한국 순정만화의 일대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터지게 된다. 바로 한국 최초의 순정만화 잡지 [르네상스]의 탄생이었다. 당시 순정만화 작가들은 어쨌든 이 [르네상스]를 키우고 살려야 한다는 대전제에 공감하였고, 지금도 '최고의 작가군' 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작가들이 르네상스의 기치 아래 모이게 된다. 김동화, 이진주, 황미나, 신일숙, 김혜린, 한승원, 김진... 르네상스는 그렇게 순풍에 돛단 듯 한국 순정만화계의 판도를 뒤바꾸면서 순항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린 여기서 르네상스의 편집인들 중에서 '강인선' 이란 이름 석자를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바로 한국 순정만화계의 역사라 불리우는 '안드로이드 강' 의 출현이었다.
88 년 [르네상스]의 등장으로 촉발된 한국 순정만화계의 르네상스는 90 년대 초반까지는 '난맥' 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시장의 선구자 [르네상스]의 등장은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이었지만, [르네상스]가 돈이 된다는 걸 확인한 다른 출판사에서 잇달아 순정잡지를 창간하게 된다. [모던 타임즈]나, [로망스]란 잡지는 채 두 달을 버티지 못하고 폐간되었고, 일본만화 카피의 마술사 김영숙 여사께서 직접 발행인으로 뛰어든 [하이센스]란 잡지 역시 근근히 그 명맥은 유지해 왔지만, [하이센스]를 한국 순정지 역사에 집어넣는다는 것 자체가 한국 순정 만화에 대한 모독이란 것이 본 필자 개인적 판단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한국 순정만화지 역사상 불멸의 대작이 튀어 나오게 된다. 바로 육영재단이 본격적으로 순정지 시장에 뛰어든 것이다. [르네상스]의 편집장인 강인선을 스카웃해서 1991 년 12 월 창간한 [댕기].. 12 년이 지난 지금의 시각으로 봐도 그 탁월한 구성과 색감, 잡지 컨셉과 디자인 등등 나무랄 것 하나 없는 이 걸작의 탄생은 정말 '불가사의한 일' 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당시 댕기의 작가군 역시 한국 순정만화계의 '드림팀' 이라 불리워도 모자람이 없었다.
10 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아직까지 연재가 이어지는 김진의 <바람의 나라>, 대사 보다 나레이션이 더 많다는 핀잔을 듣지만, 여성의 심리묘사에 있어선 따라갈 자가 없다던 강경옥의 <스타가 되고 싶어>, 언제나 여고생들에게 환상을 심어주었던 한국판 테리우스 민휘경의 등장을 알려주었던 이은혜의 <점프 트리 에이플러스>, 제 3 세대 순정작가군의 꼬리를 물고 당당히 들어온 한승원과 가끔 지원사격을 날려준 신일숙... 그리고 지금 우리가 이야기 할 김혜린의 <불의 검>... 당시 [댕기]는 여고 근처 서점가에 '광풍' 으로 다가왔다. 격주간으로 댕기가 나오는 날에는 길게 늘어선 여학생들의 줄 사이사이로 본 필자와 같은 거뭇거뭇한 수염을 흩날리며 그 무리에 슬그머니 끼어드는 남학생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댕기의 단행본이 나왔을 때는 더 대단했다. '댕기네 책들' 이라는 단행본 시리즈는 댕기 단행본 특유의 '노란빛깔 표지' 로 각인 되었는데, 서점에다가 먼저 주문을 넣고 대기를 해야만 구할 수 있을 정도였다. (지금도 본 필자는 1992 년 크리스마스 날 눈을 맞으며 <불의검>을 품안에 넣고 집으로 달려오던 그 감동을 잊지 못하고 있다)
이유가 뭐였을까? 기껏해야 흔하디 흔한 순정지일 뿐인데 말이다. 무엇이 당시 학생들을 [댕기]에 미치게 만들었던 것일까? 일단은 [댕기]란 잡지의 컨셉부터가 새로웠다. '감성세대 순정지' 란 보편타당하고 평범한 기치 아래 만들어진 [댕기]는 '민족적 색채' 가 무척이나 강했다. 일단 [댕기]란 이름에서 느껴지듯 어설픈 서양냄새 충만한 그동안의 제호가 아닌 한국적 제호를 찾았고, 이는 '한국적 순정지' 란 타이틀에 걸맞는 편집방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댕기]란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해 [댕기]의 로고는 사각형 몇 개로 조합된 말 그대로의 '댕기' 가 쓰여졌고, 독자 서비스로 나온 <바람의 나라> 특별 화보는 김진씨의 '쌩 노가다' 가 느껴지는 고구려 복식사에 관한 일러스트가 나왔다.
연재물 역시 기존의 다른 순정지에선 찾아보기 힘든 '한국적인 색채' 를 강조하였고, 그 선봉에 선 게 김진의 <바람의 나라>와 김혜린의 <불의 검>이었다. 결정적으로 [댕기]가 한국 순정지 시장에 남긴 가장 큰 족적이라면 '격주간 순정지' 의 정착이었다. 도서출판 고구려성이 1989 년 슬그머니 만들었다가 소리소문 없이 폐간시킨 [로망스] 가 한 번 격주간지에 도전했다가 참패했던것과 달리 댕기는 성공적으로 격주간지란 시장을 개척해 냈다. 소년지 시장에서나 가능했던 일을 순정지 시장에서도 성공시킨 [댕기]는 그야말로 '혁명' 이었다. 이런 댕기가 순정지 최대 발매부수를 자랑했던 건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 였을 것이다. 댕기는 그렇게 한국 순정만화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고, 다시는 모일 것 같지 않던 황금세대 작가군의 드림팀과 전설의 시작이 된 안드로이드 강의 신화창조의 서막을 열었다.
[댕기]가 나오고 한 달 뒤 한국 순정만화계에 또다른 작은 움직임이 있었는데, 바로 초등학교 여학생을 주 타켓으로 하는 [나나]의 창간이었다. 본 필자 역시 여동생이 [나나]를 사보는 통에 떠들어 봤지만, 역시 주 대상 연령대가 연령대인 만치 그리 쉽게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빅토리 비키>나, 황미나의 <소림사로 가다>인가? 하는 작품이 아직 기억에 남아있지만, 그닥 끌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다만 연령대별로 순정지를 만들 정도로 한국 순정지 시장이 커졌다는 사실에 의미를 두어야 할까? 훗날 초등학생용 [나나], 중학생용 [윙크], 고등학생용 [댕기]란 공식이 생겨났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공식이었을 뿐... 우리는 한국 순정만화지의 한계를 접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