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네의 일기 책세상 세계문학 2
안네 프랑크 지음, 배수아 옮김 / 책세상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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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199쪽, 나 외의 누군가가 미래에 이 일기를 읽을까? 나 말고 나를 위로해줄 사람이 과연 생길까? 나는 너무나 자주 위로가 필요해. 견디기 힘들 때가 많아. 삶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보다 과한 것을 많이 요구해. 나도 그걸 잘 알기 때문에 매일 스스로를 새롭게 단련하려고, 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고.(1943년 10월 30일 일기)



아무것도 모르는 초등학생이 무럭무럭 자라 30대 후반의 여성이 될 때까지 매일 일기를 쓸 수 있게 된 건, 학교 숙제로 일기 쓰기를 해야 했고, [안네의 일기]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어린이 축약본으로 편집된 [안네의 일기]를 나는 읽고 또 읽었다. 내 일기장도 키티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키티, 나는 오늘 안네의 일기를 읽었어, 그러고 보니 네게도 이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랴부랴 안네를 따라 키티라고 불러 볼게...라고 쓰지는 않았을 텐데(아마?), 지금까지 일기를 쓰는 건 사실이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충격 속에서 관람한 뒤 집으로 돌아와 책장에서 [안네의 일기]를 꺼내 읽었다. 아버지 오토 프랑크가 안네의 일기 출판 당시 편집했던 내용을 전부 복간하고, 추가로 발견된 다섯 장의 글까지 포함된 완전판으로 심지어 번역자가 배수아 작가님이라 놀라워하며 구입한 판본이다. 읽으면서 더 놀랐다.


열세 살 생일을 맞이해 일기장을 선물로 받아 일기를 쓰기 시작한 안네, 은신처에서 2년 넘게 숨어야 했던 안네, 민감한 사춘기 시기에 가족과 타인과 하루 종일 붙어 지내야만 했던 안네, 엄마와 다르게 독립적인 여성으로 살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안네, 작가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안네, 어떤 비극 속에서도 희망과 행복을 찾을 수 있다 말하는 안네는 어린 시절 읽은 안네와 달랐다. 독자인 내가 달라진 것일 테고, 완전판으로 전해진 일기 속 생생하게 되살아난 안네가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도 있고, 그녀가 끌려갔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리와 연기의 어둠을 영화 속에서 느끼고 온 뒤라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더 크게 느끼는 것도 있겠고.


-298쪽, 이 세상의 모든 근심에는 최소한 한 가지씩의 좋은 일이 깃들어 있어. 그걸 발견하기만 한다면 언제 어디서든지 기쁨을 누릴 수 있지. 언제 어디서든지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는 거야. 행복한 사람은 타인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단다. 용기와 신뢰를 잃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큰 불행이 닥쳐도 절대 쓰러지지 않을 거야!(44년 3월 7일 일기)


그녀의 용기는 그녀보다 오래 더 살아남아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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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편지 - 보부아르와 넬슨 올그런의 사랑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이정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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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부르고, 나만의 별명을 붙이고, 사랑한다 말하고, 사랑한다 말하는 수백 가지의 표현법을 찾아내고,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조리 꺼내 보여주면서 너도 내게 숨기지 말고 다 말하라 명령하고. 1947년부터 1964년까지 시몬 드 보부아르가 넬슨 올그런에게 보낸 304통의 연애편지에 담긴 말들, 900페이지가 넘는 묵직한 이 책은 펼쳐들기만 해도 페이지 틈 사이로 사랑이 쏟아져 독자의 손을 적신다. 편지의 발신자 '나'는 수신자 '너'를 분명 사랑한다.


-32쪽, 당신과 함께 있을 때 느낀 기쁨은 사랑이었어요. 이제 고통도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지닌 모든 얼굴과 마주해야 해요. 재회의 기쁨, 우리는 그것을 알게 될 테고, 그것을 원하고, 그것이 필요하고, 그것을 가질 거예요. 절 기다려 줘요. 저는 당신을 기다립니다. 제가 말한 것보다 훨씬 더, 아마도 당신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이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당신에게 늘 편지를 쓰겠어요. 당신도 그렇게 해 줘요. 저는 영원히 당신의 아내랍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 [연애편지], 을유문화사


우리는 사랑 앞에서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과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기, 몸도 마음도, 어쩔 수 없이 잠시라도 이별하게 되면 온 몸과 마음으로 그리워하기, 재회를 갈망하기, 내가 떠올리는 사랑의 얼굴이란 이것이다. 항상 함께 있기.


나, 시몬 드 보부아르는 너, 넬슨 올그런을 사랑한다.

하지만, 나는 계약결혼한 사르트르를 떠날 수 없어.

나는 영원한 당신의 아내야.

하지만, 나는 너와 결혼할 수 없어.

나는 너를 지금 당장이라도 만나 껴안고 밤을 보내고 싶어.

하지만, 나는 파리를 떠나 미국에 정착하고 싶지 않아.


연애편지를 읽으면서 자꾸만 떠오르는 물음표들, '나'는 정말로 '너'를 사랑하는가? 세상에 이런 사랑이 가능한가?


-355쪽, 일하고 여행하고 당신을 사랑하는 것, 어쩌면 제가 그 모든 것에 지나친 건 아닐까요? 그런데 원래부터 그렇게 생겼는지 미지근하게 일하는 것보다는 아예 안하는 걸 더 좋아해요. 당신을 미지근하게 사랑할 수 없어요, 달링. 그리고 만일 여행하고 일하는 것을 잠시 멈출 수 있다 해도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멈출 수 없어요. 그러므로 제 방식대로 당신을 사랑하고, 제 방식대로 당신을 그리워하면서, 그리고 어떤 절제도 없이 잠을 자겠어요.


시몬 드 보부아르에게 삶은 프랑스 파리에 있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인식하고 정열적으로 노력했다. 당대 실존주의 작가이자 철학자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계약 결혼이라는 독특한 삶의 형식을 창조해 서로를 보완하며 쉬지 않고 글을 쓰고 강연하고 잡지를 발간하고 번역과 각종 사회 운동에 참여하고 목소리를 낸다.


그는 전통적인 결혼 제도를 거부한다. 둘은 서로의 곁을 떠나지 않고 각자 새로운 사랑을 활발하게 찾아나선다. 보부아르는 미국에 있는 자신의 사랑을 발견한다. 304통의 편지가 사랑을 싣고 바다를 건너갔다. 그는 사랑하고, 넬슨의 청혼을 거절하고, 사랑하고, 불안해 하고, 사랑하고, '우리의 사랑은 잡초처럼 자라고 있으며, 자라는 걸 멈추지 않고 거목이나 괴물이 돼 버릴까 무서워요. 그러면 우리는 그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합시다.'(309쪽), 헤어지고, 우정으로 이어지고, 불쑥 사랑을 고백하고, 서로의 작업을 응원하고, 성공을 축하하고, 애정하고, 위로하고, 넬슨이 보부아르의 책에 자신이 언급된 부분에 분노해 관계를 끊어버릴 때까지 편지는 계속된다.


이 강렬하고 아름다우며 위태롭고 불가해한 보부아르의 사랑은 사랑의 낯선 얼굴이다. 물리적으로 거리가 있는 파리의 작가와 미국의 작가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 그가 애쓴 사랑의 방법, 삶에 대한 사랑과 사랑을 향한 사랑 모두를 지키기 위한 한 여성의 분투를 생생하게 목도할 수 있다. 평범한 사랑을 거부하고 보부아르만의 방식대로 사랑하는 새로운 사랑을 창조한 노력이 비록 실패로 끝났다 하더라도, 사랑이란 끝이 없는 것이기에 사랑의 과정 전체가 사랑이다.


-536쪽, 우리의 진정한 삶 속에 사랑이 살아갈 수 있게 합시다.


우리는 사랑의 어떤 얼굴을 발견할 수 있을까.

우리의 삶 속에 사랑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으로 무엇이 있을까.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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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 2 1 세트 (무선, 박스 특별 한정판) - 전4권
폴 오스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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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급식 먹고 다니던 시절 <프린세스 메이커>라는 게임을 좋아했다.


정직한 제목대로 여자아이 한 명을 잘 키워서 왕자님과 결혼시키는 게임이었다.

이를 위해 아빠로 설정된 플레이어는 수많은 선택지를 골라 프린세스 엔딩까지 무사히 도달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선택의 순간 아이의 운명은 선택한 길과 선택하지 않은 길 두 가지로 갈라졌다.

그렇게 가르고 나눠진 수많은 길의 끝에 수백 가지의 엔딩이 존재했다.

내 딸이 공주님이 되거나 여왕이 되거나 가정교사가 되거나 술집에서 일하거나 다른 남자들과 결혼하거나 나와 사이가 틀어져 이별하거나 사망하거나 존재할 수 있는 무수한 엔딩은, 무수한 선택이 모인 결과였다.


나는 삼십여 년 간 결정적인 순간의 선택이 모이고 모여 도달한 결과물이다.


- 1권 101쪽, 자신은 그대로인 채 다른 일들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상상. 다른 나무가 있는 다른 집에 사는 같은 소년. 다른 부모님과 지내는 같은 소년. 같은 부모님이지만 하는 일은 지금과 다른 부모님과 함께 지내는 같은 소년. 예를 들어 아버지가 여전히 큰 동물 사냥꾼이고 그들 모두 아프리카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어머니가 유명 여배우이고 그들 모두 할리우드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남자 형제나 여자 형제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치 종조부가 죽지 않고, 그의 이름이 아치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같은 나무에서 떨어졌는데 다리가 한쪽이 아니라 양쪽 다 부러졌다면 어땠을까? 양쪽 다리와 양쪽 팔이 다 부러졌다면 어땠을까? 그가 죽었다면? 맞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었고, 일이 한 가지 방식으로 일어났다고 해서 다른 방식으로 일어날 수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게 다를 수 있었다.

폴 오스터, 4 3 2 1, 열린책들


아치 퍼거슨, 미국에서 태어난 유대인 이민자 혈통으로 어머니는 사진관을 운영하고 아버지는 삼 형제가 함께 가전제품 판매 상점을 운영하는 중산층 집안에서 미국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수많은 아치 퍼거슨이 있을 것이고 그 중에서 소설가는 신과 같은 권위를 휘둘러 네 명의 퍼거슨을 선택한다. 1과 2와 3과 4의 퍼거슨이 출발한다. 1.1, 1.2, 1.3, 1.4, 2.1, 2.2...처음에 이 소설의 사전 지식 없이 무작정 읽으면 헷갈릴 수 있다. 왜 1.1에서 1.2로 스토리가 이어지지 않지? 그 둘은 같은 퍼거슨이면서 다른 세계선의 퍼거슨이니까.


네 명의 퍼거슨은 출발 지점에서 비슷할 수 있으나, 그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선택과 스스로의 선택이 쌓여가면서 서로 다른 길로 나아간다. 아버지의 사업이 천천히 몰락하거나, 급격히 성장하거나, 창고에서 불이 나거나, 불에 휘말려 아버지가 돌아가시거나, 어머니가 사진 작가가 되거나, 사진을 포기하거나, 사별하고, 이혼하고, 퍼거슨이 여름 캠프에 참여하고, 참여하지 않고, 대학에 가고, 다른 대학에 가고,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사망하고, 이 세계에서 연인인 여자가 다른 세계에서는 의붓남매가 되고, 네 명의 퍼거슨, 중간에 사망하는 퍼거슨의 페이지는 비워지고, 세 명은 계속 나아가고, 다른 퍼거슨이 사망하고, 두 명이 미래를 향해 살아가고, 최후의 한 명이 남아 소설을 쓴다. 제목은 [4 3 2 1], 네 명의 퍼거슨이 등장하면 바로 이 소설을 소설 속 퍼거슨이 쓴다.


-4권 443쪽, 그는 여전히 열네 살 때 상상했던 두 개의 길을 따라 여행하고 있었고, 래즐로 플루트와 함께 세 개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으며, 그러는 내내, 의식이 생긴 후로 줄곧, 그런 갈림길을, 선택받은 길과 선택받지 못한 길들을 같은 사람이 같은 시각에 걷고 있다는 그 평행성을 감지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과 그들의 그림자 같은 사람들, 지금 이대로의 세상은 진짜 세상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느낌, 현실은 일어날 수 있었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들로도 이루어져 있다는 느낌이었다. 하나의 길은 그 어떤 다른 길들보다 더 좋지도 나쁘지도 않지만, 단 하나의 몸 안에 살아 있는 것의 고통은, 어떤 주어진 순간에 단 하나의 길 위에만 있어야 한다는 것, 다른 길을 선택하고 완전히 다른 곳을 향해 나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현실은 일어날 수 있었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들로도 이루어져 있다는 느낌'


나는 선택하지 않은 다른 길로 간 수많은 나'들'의 집합체다.


결국 나는 가지 않은 길 위의 다른 나를 확인할 수 없기에, 나는 인간이기에, 인간은 하나의 길 위에 올라선 한 개의 몸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기에, 그 한계가 답답하기에, 그렇기에 다른 선택지로 향한 다른 나를 상상할 수 있기에, 상상한다. 선택하지 않은 나 역시 지금의 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도중에 사망한 다른 나 역시 나다. 죽음은 이미 내 안에 있다.


-4권 445쪽, 신은 어디에도 없다고,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하지만 삶은 어디에나 있고, 죽음도 어디에나 있고,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는 그렇게 합류한다.


지금의 나는 선택한 나와 선택하지 않은 나의 총합이다.

네 명의 퍼거슨은 결국 하나다.

한 권의 방대한 소설이다.

가지 않은 길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소설이다.


학식 먹고 다니던 시절 폴 오스터에 푹 빠졌다.


왜 폴 오스터를 좋아하는지 이유를 대라면 수십 가지도 말할 수 있지만, 가장 좋은 건 등장인물이 열정적으로 읽고 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치 퍼거슨 역시 열정적으로 읽고 쓰고, 최후의 1인은 소설을 쓴다. 소설을 쓰면서 작가는 살아 보지 못한 삶을 한 번 더 산다. [4 3 2 1]의 경우는 무려 네 번 더 살 수 있다. 독자 역시 소설을 읽으면서 새로운 삶을 산다. 이번 소설은 네 번 연속 살아가야 해서 약간은 피로할 수 있다. 그 피로감조차 좋았다.


계속 이런 소설을 써 주셨으면, 하는 말은 이제 폴 오스터에게 쓸 수 없다.

한 달 전 4월 30일 77세의 폴 오스터 별세 뉴스를 접했다.

한 권의 소설이 끝났다.


그가 남긴 소설을 읽는다. 그렇게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가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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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들마치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6
조지 엘리엇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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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성녀 테레사가 태어나지만 그 무엇도 창시하지 못했고, 이루지 못한 선을 향한 다감한 심장의 고동과 흐느낌은 오랫동안 인정받을 행위에 집중하지 못한 채 장애물들 사이에서 파르르 떨며 흩어져 버린다.

조지 엘리엇, [미들마치], 프렐류드 9p, 민음사


나는 왜 이렇게 19세기 영국 소설에 미친듯이 빠져드는 것일까,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가 너무 재미있고 대단하다고 하루 종일 떠들 수 있는 덕후의 마음은 이미 BBC선정 가장 위대한 영국 소설 등 다수의 추천 도서 목록 상위에 이 소설이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로 뒷받침한다. 항상 궁금했다. '위대한 소설' 운운하는 목록에서 [미들마치]를 자주 마주치는데 완역본으로 읽을 기회가 없었다. 작년 주영사에서, 올해 민음사에서 연이어 한국어 번역본이 나왔고 드디어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왜 이렇게 19세기 영국 소설을 사랑할까, 독서 입문기에 돌잡이로 제인 오스틴을 잡아버렸고 첫만남의 강렬함이 독서 유전자에 굳게 새겨진 결과일지도. 왜 그녀는 단 여섯 권의 장편소설만 남겼는지 원망하며 읽고 또 읽었다. 제인 오스틴은 1817년 42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그로부터 2년 뒤 조지 엘리엇이 태어난다. [미들마치]를 읽으면서 생각했다. 만약 제인 오스틴이 작가로서 경제적인 안정과 건강을 챙겨가며 오래 소설을 쓸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미들마치]와 같은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혼자서 상상해 보는 것이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 현대 로맨스물의 기원이자 기초라면,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는 현대 장편소설의 모든 것, 소설이라는 장르의 정체성이다. 19세기 영국의 시골 도시 미들마치를 배경으로 한 시대를 생생하게 형상화하는 기법, 다양한 인물들이 각자 개성을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모습, 인간의 심리를 정교하게 드러내는 문체, 당대 철학적, 윤리적 과제를 탐구하는 진지한 소설적 주제. 버지니아 울프가 '성인을 위해 쓰인 극소수의 영국 소설 중 하나'라 평한 말 그대로 우리는 소설을 단순한 재미가 아닌 윤리적이고 철학적 탐구를 위해 읽기도 한다는 사실을 [미들마치]는 증명한다.


한국어 번역본 기준 1400페이지가 넘는 대작이라 작품의 장점에 대해 열거하자면 끝도 없겠지만, 첫 완독에서 눈에 들어온 건 주인공 도러시아의 운명과 선택이다. 소설 프롤로그(프렐류드)에서 작가는 성녀 테레사를 예로 들어 높은 이상을 품은 인물은 계속해서 태어나지만 이를 실현시킬 만한 세상이 아닐 경우에 대해 언급한다. 성녀 테레사의 영혼을 가지고 19세기 빅토리아 영국 시대 태어난 여자는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 여자에게 선택지란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 뿐이다. 소설은 '결혼'을 중심으로 도러시아와 리드게이트 두 인물을 상세히 다룬다. 그들은 높은 이상을 추구하고, 추구하는 과정에서 결혼이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믿고 결혼하고, 실패한다.


그런 슬픔에 대해서 무엇보다도 많이 생각했어요. 위대한 것을 사랑하고 그것에 도달하려 애쓰지만 실패하고 마는 것 말이에요.

조지 엘리엇, 미들마치, 2권 549쪽, 민음사


시대적 한계에 부딪힌 여자 도러시아, 역사에 남을 의학적 발견을 추구했으나 몰락하는 리드게이트, 둘 말고도 소설 속 미들마치에 거주하는 수많은 인물이 뭔가를 추구하고 실패하고 때로 뭔가를 얻는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발버둥친다. 대부분 얻는 데 실패한다. 그 과정을 따라가며 그들과 우리는 뭔가를 얻는다. '새로 태어난 테레사는 수도원 체제를 개혁할 기회를 얻지 못할 테고, 새로 태어난 안티고네는 오빠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모두에게 도전하느라 자신의 영웅적 신심을 소진하지 않을 것이다.'(2권 668쪽) 우리의 시선은 하늘로 향해 있으나 두 다리는 땅에 단단히 묶여 있는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인가? 소설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맺음된다.


하지만 그녀의 존재가 주위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이 퍼져 나갔다. 세상의 점진적 개선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행위 덕분이기도 하고, 당신이나 내가 처한 상황이 대단히 나쁠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충실히 무명의 삶을 살다가 아무도 찾지 않는 무덤에서 쉬고 있는 많은 사람들 덕분이기도 하다.

조지 엘리엇, 미들마치 2권 피날레, 669쪽, 음사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는지 묻는다면 이 소설을 읽어보라 하고 싶다. 누군가는 이렇게 두꺼운 19세기 소설을 왜 읽어야 하냐며 도망칠 테고, 어떤 이는 끝까지 읽은 뒤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자며 달려올 지도 모르고, 나는 기꺼이 기다린다. 제 취미는 19세기 영국 소설 읽기입니다, 입문서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추천합니다, 심화 버전으로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를 읽고 오십시오. 소설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주제로 토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인간의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인간이라는 신비로운 혼합체가 시간의 다양한 실험대에 올라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성녀 테레사의 생애를 잠시라도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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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들마치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6
조지 엘리엇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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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이 말년까지 계속해서 소설을 썼다면 이런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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