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3 2 1 세트 (무선, 박스 특별 한정판) - 전4권
폴 오스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1월
평점 :
품절


급식 먹고 다니던 시절 <프린세스 메이커>라는 게임을 좋아했다.


정직한 제목대로 여자아이 한 명을 잘 키워서 왕자님과 결혼시키는 게임이었다.

이를 위해 아빠로 설정된 플레이어는 수많은 선택지를 골라 프린세스 엔딩까지 무사히 도달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선택의 순간 아이의 운명은 선택한 길과 선택하지 않은 길 두 가지로 갈라졌다.

그렇게 가르고 나눠진 수많은 길의 끝에 수백 가지의 엔딩이 존재했다.

내 딸이 공주님이 되거나 여왕이 되거나 가정교사가 되거나 술집에서 일하거나 다른 남자들과 결혼하거나 나와 사이가 틀어져 이별하거나 사망하거나 존재할 수 있는 무수한 엔딩은, 무수한 선택이 모인 결과였다.


나는 삼십여 년 간 결정적인 순간의 선택이 모이고 모여 도달한 결과물이다.


- 1권 101쪽, 자신은 그대로인 채 다른 일들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상상. 다른 나무가 있는 다른 집에 사는 같은 소년. 다른 부모님과 지내는 같은 소년. 같은 부모님이지만 하는 일은 지금과 다른 부모님과 함께 지내는 같은 소년. 예를 들어 아버지가 여전히 큰 동물 사냥꾼이고 그들 모두 아프리카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어머니가 유명 여배우이고 그들 모두 할리우드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남자 형제나 여자 형제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치 종조부가 죽지 않고, 그의 이름이 아치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같은 나무에서 떨어졌는데 다리가 한쪽이 아니라 양쪽 다 부러졌다면 어땠을까? 양쪽 다리와 양쪽 팔이 다 부러졌다면 어땠을까? 그가 죽었다면? 맞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었고, 일이 한 가지 방식으로 일어났다고 해서 다른 방식으로 일어날 수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게 다를 수 있었다.

폴 오스터, 4 3 2 1, 열린책들


아치 퍼거슨, 미국에서 태어난 유대인 이민자 혈통으로 어머니는 사진관을 운영하고 아버지는 삼 형제가 함께 가전제품 판매 상점을 운영하는 중산층 집안에서 미국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수많은 아치 퍼거슨이 있을 것이고 그 중에서 소설가는 신과 같은 권위를 휘둘러 네 명의 퍼거슨을 선택한다. 1과 2와 3과 4의 퍼거슨이 출발한다. 1.1, 1.2, 1.3, 1.4, 2.1, 2.2...처음에 이 소설의 사전 지식 없이 무작정 읽으면 헷갈릴 수 있다. 왜 1.1에서 1.2로 스토리가 이어지지 않지? 그 둘은 같은 퍼거슨이면서 다른 세계선의 퍼거슨이니까.


네 명의 퍼거슨은 출발 지점에서 비슷할 수 있으나, 그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선택과 스스로의 선택이 쌓여가면서 서로 다른 길로 나아간다. 아버지의 사업이 천천히 몰락하거나, 급격히 성장하거나, 창고에서 불이 나거나, 불에 휘말려 아버지가 돌아가시거나, 어머니가 사진 작가가 되거나, 사진을 포기하거나, 사별하고, 이혼하고, 퍼거슨이 여름 캠프에 참여하고, 참여하지 않고, 대학에 가고, 다른 대학에 가고,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사망하고, 이 세계에서 연인인 여자가 다른 세계에서는 의붓남매가 되고, 네 명의 퍼거슨, 중간에 사망하는 퍼거슨의 페이지는 비워지고, 세 명은 계속 나아가고, 다른 퍼거슨이 사망하고, 두 명이 미래를 향해 살아가고, 최후의 한 명이 남아 소설을 쓴다. 제목은 [4 3 2 1], 네 명의 퍼거슨이 등장하면 바로 이 소설을 소설 속 퍼거슨이 쓴다.


-4권 443쪽, 그는 여전히 열네 살 때 상상했던 두 개의 길을 따라 여행하고 있었고, 래즐로 플루트와 함께 세 개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으며, 그러는 내내, 의식이 생긴 후로 줄곧, 그런 갈림길을, 선택받은 길과 선택받지 못한 길들을 같은 사람이 같은 시각에 걷고 있다는 그 평행성을 감지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과 그들의 그림자 같은 사람들, 지금 이대로의 세상은 진짜 세상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느낌, 현실은 일어날 수 있었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들로도 이루어져 있다는 느낌이었다. 하나의 길은 그 어떤 다른 길들보다 더 좋지도 나쁘지도 않지만, 단 하나의 몸 안에 살아 있는 것의 고통은, 어떤 주어진 순간에 단 하나의 길 위에만 있어야 한다는 것, 다른 길을 선택하고 완전히 다른 곳을 향해 나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현실은 일어날 수 있었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들로도 이루어져 있다는 느낌'


나는 선택하지 않은 다른 길로 간 수많은 나'들'의 집합체다.


결국 나는 가지 않은 길 위의 다른 나를 확인할 수 없기에, 나는 인간이기에, 인간은 하나의 길 위에 올라선 한 개의 몸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기에, 그 한계가 답답하기에, 그렇기에 다른 선택지로 향한 다른 나를 상상할 수 있기에, 상상한다. 선택하지 않은 나 역시 지금의 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도중에 사망한 다른 나 역시 나다. 죽음은 이미 내 안에 있다.


-4권 445쪽, 신은 어디에도 없다고,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하지만 삶은 어디에나 있고, 죽음도 어디에나 있고,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는 그렇게 합류한다.


지금의 나는 선택한 나와 선택하지 않은 나의 총합이다.

네 명의 퍼거슨은 결국 하나다.

한 권의 방대한 소설이다.

가지 않은 길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소설이다.


학식 먹고 다니던 시절 폴 오스터에 푹 빠졌다.


왜 폴 오스터를 좋아하는지 이유를 대라면 수십 가지도 말할 수 있지만, 가장 좋은 건 등장인물이 열정적으로 읽고 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치 퍼거슨 역시 열정적으로 읽고 쓰고, 최후의 1인은 소설을 쓴다. 소설을 쓰면서 작가는 살아 보지 못한 삶을 한 번 더 산다. [4 3 2 1]의 경우는 무려 네 번 더 살 수 있다. 독자 역시 소설을 읽으면서 새로운 삶을 산다. 이번 소설은 네 번 연속 살아가야 해서 약간은 피로할 수 있다. 그 피로감조차 좋았다.


계속 이런 소설을 써 주셨으면, 하는 말은 이제 폴 오스터에게 쓸 수 없다.

한 달 전 4월 30일 77세의 폴 오스터 별세 뉴스를 접했다.

한 권의 소설이 끝났다.


그가 남긴 소설을 읽는다. 그렇게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가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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