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 입장들 2
정영문 지음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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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 속 인물들에게 좋거나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서로에게 좋거나 좋지 않은 말이나 행동을 해 그로 인해 서로가 서로에게 좋거나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고, 그로 인해 서로에게 가까워지거나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서로가 좋거나 좋지 않게 사람이 달라지고 뭔가가 바뀌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어쩌면 재래식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은 언젠가 이후로 쓸 수 없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런 소설 속에 등장시킨 소설적 인물들은 나와는 상관없는 남들 같았고, 그 인물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고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남들의 일에 참견하는 것 같았는데, 나는 남들의 일에 참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렇지 않아도 너무나 문제가 많은 세상에서 소설 속 인물들 간에 문제를 생기게 하고 서로 갈등하게 하는 것이, 그것이 소설가가 해야 하는 짓인지에 대해 너무나 회의적으로 된 상태였는데(나는 내가 쓰는 소설 속에서라도 누군가에게 안 좋은 일이 안 일어나기를 바랐다.), 7인의 사무라이가 내 머릿속에 출현하게 된 것이 그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 정영문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 60쪽


이 소설은 시작과 끝이 없고, 그 형태는 곧 강물과 같고, 강물 같은 소설을 읽다 보면 어느새 나도 떠내려가고 있고, 떠내려가는 내 옆에 7인의 사무라이들이 자네 왔는가 하는 표정으로 같이 떠내려가고, 내 머릿속 사무라이의 이미지는 뾰족한 모자를 쓰고 옷이라기보다 천을 두른 것 같은 차림새에 검을 찬 키 작은 이들인데, 목숨을 걸고 싸울 법한 목적의식을 갖고 사는 이들이 무목적적으로 강물에 둥둥 떠내려간다는 제목부터가 모순적인데, 어느새 강물에 떠내려가는 사무라이의 머리통들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새겨져 버린 뒤다.


정영문 소설은 처음이다, 라고 쓰려다 아주 오래 전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목신의 어떤 오후>라는 제목의 단편을 읽은 기억이 난다. 다 읽은 뒤 내 감상은 이랬다. 뭐야? 뚜렷한 플롯도 사건도 등장인물도 희미한 그 소설은 초짜 독자에겐 말 그대로 '뭐야?'만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를 읽은 뒤 내 감상은 이렇다. 뭐야~믿을 수 없겠지만 박장대소한 페이지도 있다. 기묘한 유머, 한없이 길어지는 만연체임에도 쏙쏙 읽히는 명확한 문장, 머리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는 이미지들, 소설에 대한 소설. '밑도 끝도 없는' 소설. 밑도 끝도 없이 시작해 밑도 끝도 없이 끝나는 소설. 마치 인생과 같은, 밑도 끝도 없이 태어나 밑도 끝도 없이 죽는 삶과 같은 소설.


내가 유일하게 궁금한 것은 밑도 끝도 없는, 계속해서 이야기가 옆으로 새는, 말하는 것이 없는,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이 차이가 없는, 결국에는 하나 마나 한 이런 이야기를 언제까지 얼마나 더 할 수 있나 보는 것뿐이었고, 이 글 역시 그것을 보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그리고 당연하게도 그것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에게는 즐거움을 주지만 그것의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즐거움을 주지 않는, 단어와 어구의 반복적인 사용을 얼마나 할 수 있나 보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너무도 많은 소설들이 뭔가를 말하려고 했고, 의도적으로 하나 마나 한 이야기를 하는 소설은 너무 적었고, 나로서는 하나 마나 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고, 그렇지 않은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영원히 옆으로 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정영문, 같은 책, 37쪽


이번 기회로 나는 그것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 되어 즐거움을 실컷 즐겼다. 안타깝게도 다른 이들에게 쉽게 추천해 줄 수 없는 즐거움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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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 - 개정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이혜승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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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학 평론은 글을 읽는 안경이 되어 준다.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는 우리의 눈에 현미경을 달아버린다. 나보코프의 강의를 한 번 듣게 된 이상, 무심히 소설을 읽을 순 없게 된다. 작가의 피와 땀으로 쓰인 글을 잘게 부수어 가루 하나하나 찍어 맛보는 과정의 짜릿함, 특히 그 대상이 전 세계 문학을 통틀어 가장 집약적이고 전무후무한 대작가들의 대작들이 쏟아진 19세기 러시아 문학이라면 어떤 MSG로도 따라할 수 없는 걸작의 '맛'을 느낄 수 있다.


- 208쪽, 문학, 진정한 문학은 심장이나 뇌(영혼의 위라고 할 수 있는)에 좋다는 물약 삼키듯 단숨에 들이켜 버리면 안 된다. 문학은 손으로 잘게 쪼개고 으깨고 빻아야 한다. 그래야만 손바닥의 오목하게 파인 가운데에서 풍겨 나오는 달콤한 향을 음미할 수 있다. 그것은 아삭아삭 씹어서 조각난 상태로 혀 속에서 굴려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가진 진귀한 향기를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부서지고 쪼개진 부분들이 다시 머릿속에서 하나로 통일되면서 당신이 다소간이나마나 자신의 혈기를 투자한 그 작품 전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고골,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고리키까지 독서에 취미가 없는 사람이라도 '다 아는 사람들이구만'하고 지나칠 이 이름들을 나보코프는 철저히 파헤친다. 특히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를 대하는 상반된 반응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을 당황하게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나보코프에게 돈이라도 빌렸다가 갚지 않고 도망가신 걸까...? 톨스토이가 위대한 작가라는 걸 알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나보코프의 강력한 취향에 불편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도스토옙스키의 추종자로서 몇몇 대목에서 화가 나기도...) 


나보코프가 훌륭한 작가이자 최고의 독자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위대한 작가가 창조하는 최고의 등장인물은 바로 독자다.'(46쪽)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속 시간에 대한 분석은 읽는 내내 감탄하게 한다. 독자와 소설의 시간관념이 일치한다는 감각의 천재성,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전체적인 '형상의 패턴'을 읽어내는 작업의 즐거움,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를 읽다 보면 어느새 온라인 서점 장바구니에는 러시아 소설로 꽉 차게 된다. 소설을 통해 진실, 아니 진리를 향해 나아간 작가들의 고행에 기꺼이 동행하기 위해.


-274쪽, 한편에는 검은 흙, 흰 살결, 희다 못해 파랗게 빛나는 설경, 푸른 평원, 자줏빛 뇌운의 아름다움을 탐닉하는 인간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허구는 죄악이며 예술은 부도덕하다고 역설하는 인간이 있어 그 둘 사이의 충돌이 특히 말년의 그를 고통스럽게 했지만, 그 충돌은 결국 한 인간의 내부에서 벌어진 갈등일 뿐이었다. 예술 작품을 통해서건 설교를 통해서건, 톨스토이는 수많은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진실에 도달하기를 갈망했다.


 275쪽, 그것은 단순한 진실, 단순한 일상적 사실pravda이 아니라 불멸의 진리istina였다. 그냥 진실이 아니라 내적 영혼을 밝히는 진리의 빛이었다. 톨스토이가 자신 안에서, 자신의 창조적 상상력의 발현 속에서 이 진리를 우연히 발견했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올바른 길에 서 있었다. 그의 장편 소설 어디에나 나타나는, 그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문장들 앞에서는 그와 그리스 정교회의 불화도, 그의 윤리적 견해도 그 의미를 상실한다.


소설이란 무엇이고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 간단명료한 답은 이 책에 없다. 한바탕 강의를 들은 뒤 책을 덮은 우리의 손에 남은 건 각자가 생각하는 소설의 정의. 아둔한 수강생 1인이 이번 강의에서 배운 것은 '의심하기'다. 무엇도 당연하다 생각하지 않기, 세상을 갓 태어난 아기의 눈으로 바라보기, 아이처럼 '왜?'라 질문하기, 그 질문의 형식이 소설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220쪽, 나는, 진정한 예술가는 어느 무엇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문학, 진정한 문학은 심장이나 뇌(영혼의 위라고 할 수 있는)에 좋다는 물약 삼키듯 단숨에 들이켜 버리면 안 된다. 문학은 손으로 잘게 쪼개고 으깨고 빻아야 한다. 그래야만 손바닥의 오목하게 파인 가운데에서 풍겨 나오는 달콤한 향을 음미할 수 있다. 그것은 아삭아삭 씹어서 조각난 상태로 혀 속에서 굴려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가진 진귀한 향기를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부서지고 쪼개진 부분들이 다시 머릿속에서 하나로 통일되면서 당신이 다소간이나마나 자신의 혈기를 투자한 그 작품 전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 P208

나는, 진정한 예술가는 어느 무엇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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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이야기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4
엘리자베스 개스켈 지음, 박찬원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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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운명의 결정을 빠져나갈 순 없습니다. 저는 수백 년도 더 전부터 제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가 저를 기다렸습니다. 저는 대를 이어 내려온 예언을 행했을 뿐입니다!"

엘리자베스 개스켈, [고딕 이야기], <그리피스 가문의 저주>, 은행나무


일곱 편의 '고딕 이야기' 중 가장 몰입도 높은 단편 <빈자 클라라 수녀회>와 <그리피스 가문의 저주>는 동일한 소재를 다룬다. 저주, 형제와도 같은 자를 배신한 가문에게 내려진 저주, 죄 없는 개를 쏘아 죽인 남자에게 내려진 저주, 저주는 실체화되어 그리피스 가문을 좀먹고, 사랑하는 딸을 일부러 멀리하게 한다. 저주가 주요 소재인 이야기니까, 이것들은 공포소설일까?


[고딕 이야기]라는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내가 고딕소설을 제대로 접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고딕소설에 매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나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들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소설을 읽으며 제목에 떡하니 고딕이라 적어 놨으니 고전적인 폐허를 배경으로 한 신비하고 공포스런 분위기를 기대하며 페이지를 넘겼다


등장인물들은 복잡한 가계도와 혈통 속에서 삶을 찾아 고군분투한다. 저주는 우리에게 익숙한 주술적 의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등장인물에게 주어진 '운명'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실제 저주가 등장하지 않는 <굽은 나뭇가지>같은 단편에서도 읽다 보면 저주스러운 운명의 힘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선대의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그리피스 가문의 저주>의 오언이나, 남성들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로 스스로를 저주하게 된 여성 브리짓 피츠제럴드의 <빈자 클라라 수녀회>속 투쟁, <굽은 나뭇가지>에서 사랑과 행복 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굽은 나뭇가지'의 운명을 타고났을 때 곧은 나무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모두 운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운명이 존재하고 인간은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작가의 관점이 반영될 때,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감정은 비애다. 비극적 슬픔, <빈자 클라라 수녀회>의 클라이막스가 주는 감정. 이야기가 서서히 진행되다 급작스럽게 끝맺는 듯한 일곱 단편의 구성 자체가 운명이라는 변덕스러움을 반영하여 그 앞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비애를 드러낸다. [고딕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공포보다 슬픔을 느꼈다. 슬픔으로부터 나는 도망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감정도 운명도 피할 수 없다면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하나의 방법이니까. 어느 순간 슬픔은 물러가고 운명은 그 족쇄를 슬쩍 풀지도 모르니까.


그녀는 이제 주변 사람들의 숨죽인 경외의 침묵 속에서 병자성사를 받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빛을 잃고 흐려지고 있었고 사지가 굳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의식이 끝나자 그녀가 수척한 얼굴을 천천히 들어 올렸고, 알 수 없는 강렬한 기쁨으로 눈이 밝게 빛났다. 어떤 혐오스럽고 무시무시한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아이가 저주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고개를 뒤로 떨군 후 숨을 거두었다.


엘리자베스 개스켈, [고딕 이야기], <빈자 클라라 수녀회> 마지막 부분,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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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제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임솔아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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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을 때마다 깨닫는다. 나는 내가 소설을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것을. 소설이 무슨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으며 돈도 안 된다고 폄하하는 시선을 오롯이 받아내면서도 꿋꿋이 좋아한다는 사실을. 올해 두 손 모아 꼭 쥐고 있던 소설을 반쯤 내려놓고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남은 한 손으로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 나의 사랑을. 내 사랑의 목록에 김멜라와 김지연의 이름이 추가되었다. 새로운 소설을 만나 다시 한 번 더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특별하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 매 해 백신처럼 주사를 놓는다. 면역력을 높이고 사랑을 강화시킨다, 소설이 소설에게.



문득 나는 내가 사는 걸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처음에는 너무 뜬금없고 이상한 감정처럼 느껴졌는데 점점 선명해졌다. 뜻대로 된 적은 별로 없지만 나는 사는 게 좋았다. 내가 겪은 모든 모욕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극복해내고 싶을 만큼 좋아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는 건 좋다. 살아서 개 같은 것들을 쓰다듬는 것은 특히나 더 좋다. (김지연, 공원에서)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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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하여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3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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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이 2년을 넘긴 현재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되고 거리두기 및 통제 정책이 서서히 완화되는 시점. 현실이 한 발 두 발 뒤로 물러서기 시작할 때가 문학이 전진할 시기다. 한국 번역 출판 시점 기준으로 2021년 작 율리 체 [인간에 대하여]와 오르한 파묵 [페스트의 밤]이 올해 초 출간되었다. 그들의 선배격인 카뮈의 [페스트]의 계보를 이을 '전염병 소설'이다.

전염병을 소재로 한다면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집단적 죽음, 국가의 통제, 폐쇄된 도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이기심과 배려심 같은 단어들이 떠오른다. 자연 재해 앞에서 무력한 인간의 한계, 피할 수 없는 죽음 같은 주제를 자동적으로 말할 지 모른다. 그러니까 전염병은 인간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좋은 소재다.

도라 주위에서 봄이 살아 움직이며 본연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모든 생물 유기체가 성장하고 만발케 하고, 살아 있는 생명이 최대한의 생산력을 뽐내도록 몰아대고, 봄의 전령들이 재생산을 하도록 돕는다. 그 어떤 존재도 평가받지 않을뿐더라 모든 존재가 이용된다. 죽어가는 생명 또한 활용된다. 세상의 어떤 한 종이 사라지면 새로운 종이 그 틈을 메운다. 죽음과 탄생은 드라마가 아니라 생명 역학의 고리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의 흥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인류가 파멸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진박새보다 더 무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도라는 바이러스 균주를 제외하고 우리를 필요로 하는 생명체는 없다고 생각한다.

율리 체 [인간에 대하여], 93쪽

그렇다면 율리 체의 [인간에 대하여] 속 인간을 대표하는 주인공은 누구인가? 독일 베를린에서 지속 가능한 상품을 주제로 광고를 제작하는 에이전시의 카피라이터 도라. 브라켄이라는 독일 시골 마을에서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술주정뱅이 목수 고테. '데이팅 앱에서 알고리즘이 절대 연결하지 않을'이 둘의 만남을 주선한 존재가 코로나 바이러스다. 팬데믹으로 인해 동거 중이던 남자친구와 문제가 생긴 도라가 충동적으로 브라켄에 시골집을 사서 떠나오게 되면서 옆집 고테와 만나게 되었으니까.


성격도 성향도 모든 것이 정반대인 여자와 남자가 우연히 만났다, 사랑에 빠진다? 소설을 읽는 내내 그래서 둘이 언제 사귀나 궁금해져 읽는 속도를 높였다. 결말에서 나는 나의 편협한 시선이 부끄러워 도라와 고테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인간에겐 사랑만이 필요한 게 아니지요. 우정, 더 크게 말하면 인간적 연대,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것, 우리가 자주 잊고 바이러스 앞에서 아예 잃어버린 것.

코로나 바이러스가 2년 간 부지런히 벗겨낸 인간의 민낯은 상상 이상이었다.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하자 온 세계가 바이러스 근원지를 혐오했다. 전 세계로 퍼져나가자 감염자를 혐오했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자를 혐오하고, 거리두기를 지키지 않는 자를 혐오하고, 백신을 맞지 않는 자들을 혐오했다. 전염병 앞에서 인간은 혐오의 감정에 몰두했다. 소설 본문에도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조지 플로이드 살해 사건'은 혐오의 직접적 발현이었다. 인간이란 혐오의 동물인가?

도라와 고테가 보여주는 기묘한 연대는 인간에 대한 다른 가능성을 보여 준다. 정반대의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어도 서로에 대해 우월감을 드러내며 통제하는 대신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주는 것. 죽음 앞에서 외롭지 않도록 예의를 갖추는 것. 적당한 때를 기다리며 그저 존재하는 것. 서로의 존재에 경의와 예의를 표하는 것.


프란치가 옆 벤치에 앉아 양손으로 벤치 바닥을 쓰다듬는다. 도라는 아이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삶은 분명 계속될 것이다. 지금도 어딘가에 프란치와 미래를 함께할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을 거다. 한 소년이 코로나 방역 완화를 반기며 베를린의 축구장에서 축구공을 갖고 놀고 있을 것이다. 미래의 어느 날 브라켄 출신의 엄청 긴 금발 머리 아가씨와 결혼하게 될 걸 꿈에도 모른 채, 또 어딘가에서 곧 프란치의 절친이 될 소녀가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30년 후에 자동차 사고를 당해 양팔이 부러지게 될 청년이 마스크와 헤드폰을 쓰고 지하철에 앉아 있을지 모른다. 모든 것이 이미 존재하며 세상에 새겨져 있고 준비하면서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다. 이 모든 건 저절로 이루어진다. 인간이 돌릴 바퀴도, 잡아당길 레버도 없다.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다. 이 같은 생각에 도라는 긴장이 살짝 풀리는 걸 느낀다.

율리 체, [인간에 대하여] 418쪽


자연 앞에서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고 함부로 통제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자주 잊는다. 잊을 때마다 한 번씩 바이러스가 찾아온다. 바이러스는 인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인간에 대하여 아주 잘 알고 있지, 우리야말로 인간을 가장 필요로 하거든. 그 앞에서 우리는 공포에 질리고 서로를 증오하기보다, 연대해야 한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존중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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