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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 - 개정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이혜승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4월
평점 :
좋은 문학 평론은 글을 읽는 안경이 되어 준다.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는 우리의 눈에 현미경을 달아버린다. 나보코프의 강의를 한 번 듣게 된 이상, 무심히 소설을 읽을 순 없게 된다. 작가의 피와 땀으로 쓰인 글을 잘게 부수어 가루 하나하나 찍어 맛보는 과정의 짜릿함, 특히 그 대상이 전 세계 문학을 통틀어 가장 집약적이고 전무후무한 대작가들의 대작들이 쏟아진 19세기 러시아 문학이라면 어떤 MSG로도 따라할 수 없는 걸작의 '맛'을 느낄 수 있다.
- 208쪽, 문학, 진정한 문학은 심장이나 뇌(영혼의 위라고 할 수 있는)에 좋다는 물약 삼키듯 단숨에 들이켜 버리면 안 된다. 문학은 손으로 잘게 쪼개고 으깨고 빻아야 한다. 그래야만 손바닥의 오목하게 파인 가운데에서 풍겨 나오는 달콤한 향을 음미할 수 있다. 그것은 아삭아삭 씹어서 조각난 상태로 혀 속에서 굴려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가진 진귀한 향기를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부서지고 쪼개진 부분들이 다시 머릿속에서 하나로 통일되면서 당신이 다소간이나마나 자신의 혈기를 투자한 그 작품 전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고골,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고리키까지 독서에 취미가 없는 사람이라도 '다 아는 사람들이구만'하고 지나칠 이 이름들을 나보코프는 철저히 파헤친다. 특히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를 대하는 상반된 반응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을 당황하게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나보코프에게 돈이라도 빌렸다가 갚지 않고 도망가신 걸까...? 톨스토이가 위대한 작가라는 걸 알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나보코프의 강력한 취향에 불편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도스토옙스키의 추종자로서 몇몇 대목에서 화가 나기도...)
나보코프가 훌륭한 작가이자 최고의 독자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위대한 작가가 창조하는 최고의 등장인물은 바로 독자다.'(46쪽)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속 시간에 대한 분석은 읽는 내내 감탄하게 한다. 독자와 소설의 시간관념이 일치한다는 감각의 천재성,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전체적인 '형상의 패턴'을 읽어내는 작업의 즐거움,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를 읽다 보면 어느새 온라인 서점 장바구니에는 러시아 소설로 꽉 차게 된다. 소설을 통해 진실, 아니 진리를 향해 나아간 작가들의 고행에 기꺼이 동행하기 위해.
-274쪽, 한편에는 검은 흙, 흰 살결, 희다 못해 파랗게 빛나는 설경, 푸른 평원, 자줏빛 뇌운의 아름다움을 탐닉하는 인간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허구는 죄악이며 예술은 부도덕하다고 역설하는 인간이 있어 그 둘 사이의 충돌이 특히 말년의 그를 고통스럽게 했지만, 그 충돌은 결국 한 인간의 내부에서 벌어진 갈등일 뿐이었다. 예술 작품을 통해서건 설교를 통해서건, 톨스토이는 수많은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진실에 도달하기를 갈망했다.
275쪽, 그것은 단순한 진실, 단순한 일상적 사실pravda이 아니라 불멸의 진리istina였다. 그냥 진실이 아니라 내적 영혼을 밝히는 진리의 빛이었다. 톨스토이가 자신 안에서, 자신의 창조적 상상력의 발현 속에서 이 진리를 우연히 발견했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올바른 길에 서 있었다. 그의 장편 소설 어디에나 나타나는, 그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문장들 앞에서는 그와 그리스 정교회의 불화도, 그의 윤리적 견해도 그 의미를 상실한다.
소설이란 무엇이고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 간단명료한 답은 이 책에 없다. 한바탕 강의를 들은 뒤 책을 덮은 우리의 손에 남은 건 각자가 생각하는 소설의 정의. 아둔한 수강생 1인이 이번 강의에서 배운 것은 '의심하기'다. 무엇도 당연하다 생각하지 않기, 세상을 갓 태어난 아기의 눈으로 바라보기, 아이처럼 '왜?'라 질문하기, 그 질문의 형식이 소설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220쪽, 나는, 진정한 예술가는 어느 무엇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문학, 진정한 문학은 심장이나 뇌(영혼의 위라고 할 수 있는)에 좋다는 물약 삼키듯 단숨에 들이켜 버리면 안 된다. 문학은 손으로 잘게 쪼개고 으깨고 빻아야 한다. 그래야만 손바닥의 오목하게 파인 가운데에서 풍겨 나오는 달콤한 향을 음미할 수 있다. 그것은 아삭아삭 씹어서 조각난 상태로 혀 속에서 굴려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가진 진귀한 향기를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부서지고 쪼개진 부분들이 다시 머릿속에서 하나로 통일되면서 당신이 다소간이나마나 자신의 혈기를 투자한 그 작품 전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 P208
나는, 진정한 예술가는 어느 무엇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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