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 죽음 트릴로지 - 『죽음의 자서전』, 『날개 환상통』,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합본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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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자서전, 에서

날개 환상통, 에서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까지

세 권의 시집을 한 권으로 이어서, 산문 <죽음의 엄마>까지,


세 권이 한 권처럼 읽히는 마법이

아니 거대한 한 편의 시로 읽히는 기적을 경험하는 [죽음 트릴로지]


지금 이 지구에 탑승하고 있는 사람들 중

백 년 후에 지구에서 하차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인정사정없는 죽음을 생의 앞뒤에 두고,

죽음의 아라베스크 무늬를 짜거나,

죽음의 돌림노래를 듣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았을까.

죽음이 우리 앞뒤에 공평하게 있기에 우리의 영혼은 평등하다.

그러기에 죽음은 가장 사나운 선이며 은총이며, 영원이다.

나는 이 시들을 쓰며 매일 죽고 죽었다.

하지만 다시 하루하루 일어나게 만든 것도

이미지와 리듬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죽음에서 일어날 수도 없는 역설.

시는 죽음에의 선험적 기록이니 그러했으리라.

당신이 내일 내게 온다고 하면, 오늘 나는 죽음에서 일어나리.


-김혜순 죽음 트릴로지, 김혜순, 문학과지성사, 시인의 말


시 속에서 시인이 죽는다. 죽음-하다.

시 속에서 시인이 새가 되어 날아오른다. 새-하다.

시 속에서 시인이 사막으로 간다. 모래-하다.

시인이 시-하다. 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심지어 죽음을 할 수 있다.


죽음 트릴로지를 읽는 시간은 죽음하는 시간이다.


내가 죽고, 엄마가 죽고, 아빠가 죽고, 아기가 죽고, 아기를 낳던 여자가 죽고, 여자가 죽고, 지구가 죽고, 우주가 죽고, 죽음하면 태어날 수 있다. 나는 엄마의 엄마가 되어 아기가 된 엄마를 낳는다. '엄마가 된 딸은 죽음과 짝이 된다'(597쪽, 산문 '죽음의 엄마') 나는 '죽음한다', 죽는 게 아니라 한다, 오직 시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누군가에게 죽음 트릴로지는 아주 불편하고 고약하고 냄새나는 불쾌한 책일 것이다. 시작부터 여자가 지하철에서 쓰러져 죽고 아무도 그녀를 신경쓰지 않는데, 죽었는데, 사십 구 편의 시가 한 편마다 죽음하는데, 나는 죽고 싶지 않은데, 아니지, 네가 거부하는 건 죽는 거고 우리는 죽음하는 것, 그건 엄연히 다르지, 새가 되는 게 아니라 새하기, 모래되기가 아니라 모래하기, 시하기, 읽기하기, 노래하기, 노래하다가 어색하지 않은 단어인 건 기꺼운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니까, 그러니까 우리도 기꺼이 죽음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


세상 모든 살아있는 사람들의 무릎 위에 이 책을 한 권씩 올려놓고 다 읽을 때까지 감시하고 싶다. 죽음을 살아보라고 하고 싶다. 일단은 3천 명의 사람들에게, 허공으로 떠올랐던 삼천 궁녀의 숫자만큼이나, 내 순서는 이천백사십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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