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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을 다시 생각한다 - 한국사회를 움직인 대법원 10대 논쟁 ㅣ 김영란 판결 시리즈
김영란 지음 / 창비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김영란은 우리나라에서 여성 최초로 대법관에 임명된 사람이다. 이제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일명 김영란법)'의 최초 제안자로 더 유명해졌다. 대법관으로 재직 시 사회적 소수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바 있고, 퇴직 후에도 뭇 대법관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 모범과 존경을 받고 있다. 사법부의 최고 권위자로 퇴임하고도 변호사가 되어 서초동을 기웃대거나, 스스로의 가치를 절하하여 정부나 의회에 몸담는 현실에 국민들의 실망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김영란 전(前) 대법관 자신이 관여했던 판결 중 사회적 함의가 큰 열 건을 골라 반추한 후 정리한 책이다. 그는 각 꼭지마다 사건의 배경과 논점을 서술하고, 다수의견과 소수의견의 논리적 흐름을 풀어놓은 후 평가를 덧붙이고 있다. 부분적으로 가독성이 떨어지기도 하는데, 이는 판결문을 인용하면서 생긴 문제들로 보인다. 보통 판결문은 일반 시민이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와 호흡이 긴 문장을 사용하여 '병신체'라고 조롱받기도 하는데, 특별한 노력이 없다면 국민과의 소통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김 전 대법관은 자신의 과오에 대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어둠 속을 헤매는 것이 미래를 뚫고 나가는 유일한 방법' 이라는 생각에 과감히 펜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노력은 상당히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일례로 '삼성 사건'의 논점을 이보다 더 쉽게 설명한 책은 없을 것이다. 내 경우에도 관련 판결에 대한 신문 특집기사 몇 건을 보는 것보다 더 이해하기 쉬웠다. 또한, 성소수자의 기본권이나 양심적 병역거부, 존엄사와 같은 오래된 사회쟁점에 대해서 생각해볼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미덕 중에 하나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니 우리나라 사법 현실에 대한 실망도 동시에 커졌다. 보통 가장 억울한 이들이 3심 제도의 끝인 대법원까지 달려오기 마련이고, 그곳에서 논의되는 사건들은 가장 사회적으로 첨예한 문제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쟁점들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은 그 사회 지도층들의 의식과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대법관들의 다수의견을 보다 보면, 잘못된 현실을 법적으로 추인해주는 것을 본업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대법관은 현실의 모순을 일축하는 주장들을 '축성'하는 사제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 점은 사회적으로 더 많은 논의와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다.
얼마 전 교수신문은 2015년을 말해주는 사자성어로 '혼용무도(昏庸無道)'를 골랐다. '마치 암흑에 뒤덮인 것처럼 온통 어지럽고 무도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절망과 무력감을 호소한다. 지은이는 마지막으로 리베카 솔닛의 글을 인용하며 '미지의 미래를 뚫고 나가는 유일한 방법은 어둠 속을 헤매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사법 현실을 포함해서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이래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담대함과 지혜와 겸손을 지니고 어둠 속을 헤매야하지 않을까. 그래서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