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1 - 규슈 빛은 한반도로부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품절


그들은 한반도로부터 받은 영향을 꼭 ‘한반도를 거쳐’ 대륙문화가 들어왔다는 식으로 서술하면서 그 의의를 축소 내지 변질시키곤 한다. 일본의 고대사회는 결국 중국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더 큰 문화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 이야기이고 처음에 영향받은 것은 어디까지나 한반도로부터였다. 일본인들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한반도를 거쳐’ 들어왔다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서 그렇다면 아들이 아버지에게 용돈을 받으면서 "아버지 손을 거쳐 회사 돈이 들어왔다"고 할 것인지, 냉소를 금치 못할 때가 많다.-9쪽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대륙으로 건너가 이룩한 문화는 미국문화이지 영국문화가 아니듯, 한반도의 도래인이 건너가 이룩한 문화는 한국문화가 아니라 일본문화이다. 우리는 일본 고대문화를 이런 시각에서 볼 수 있는 마음의 여백과 여유를 가져야 한다.-12쪽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한다.

이러한 결론은 일본과 한국, 양국이 최근 서로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탓에 어디에서도 인기를 끌 만한 주장은 아닌 것 같다. 양국의 지난 역사는 서로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게 했다. 아랍인과 유대인의 경우처럼 한국인과 일본인은 같은 피를 나누었으면서도 오랜 시간 서로에 대한 적의를 키워왔다. (…) 한국인과 일본인은 수긍하기 힘들겠지만, 그들은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형제와도 같다. 동아시아의 정치적 미래는 양국이 고대에 쌓았던 유대를 성공적으로 재발견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58쪽

임화의 「현해탄」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먼먼 앞의 어느 날,
(…)
모든 것이 과거로 돌아간
폐허의 거칠고 큰 비석 위
새벽 별이 그대들의 이름을 비출 때,
현해탄의 물결은
(…)
그대들의 일생을
아름다운 전설 가운데 속삭이리라.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이 바다 높은 물결 위에 있다.-86쪽

당시 번주는 이런 장관의 무지개 솔밭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400년 뒤 후손들은 이런 행복을 누릴 것을 알았기에 어린 묘목을 100만 그루나 심은 것이었다. 똑똑한 지도자 한 분 만난다는 것이 국가와 국민에게 얼마나 큰 복인가를 이 솔밭이 말해준다.-107쪽

서로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나는 그를 배우려고 했고, 그는 나를 배우려고 했다. 그러기를 30여년이다. 한생을 살면서 내게 저런 학문적 도반(道伴)이 있다는 것이 큰 축복이다.-173쪽

전망대에서 보니 우리가 들어온 입구를 제외하고는 높은 산으로 둘려 있고 산자락 경사는 아주 급하다. 도자 기법의 보안을 유지하기 안성맞춤인 자리다. 그런 내력과 연륜을 간직한 곳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도자기마을로 성장하고 보존되어 있어, 우리 같은 사람이 이 한적하고 외진 곳까지 답사와 여행을 가게 하는 것은 역시 일본의 저력이고 문화 능력이다. 경기도 광주・여주・이천에도 이러한 ‘비요의 마을’ 같은 것이 있을 만한데 고풍 어린 자취가 없어서 이와 같은 정겨움을 연출하지는 못한다. 전통을 사랑한다는 것은 말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에 녹아들어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제 빛을 발하게 됨을 이 비요의 마을이 말해준다.-181쪽

이번이 나의 네 번째 답사인데 한번은 송풍헌(松風軒, 쇼후켄) 레스토랑에서 사쿠라지마를 바라보며 이곳 명물인 흑돼지요리를 즐겼다. 한번은 선물가게 사이에 있는 작은 집에서 사쓰마 라면을 먹어보았고, 또 한번은 이곳 죽경정 찻집에서 잔보모찌(兩棒餠)를 맛보았는데 된장으로 만든 소스가 독특했다. 모두가 가고시마의 특산물로 자랑하는 것이었고, 자랑할 만했다. 문화유산을 폐쇄적이고 냉랭한 볼거리로 두지 않고 현대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그 옛날에는 시마즈 가문의 본가였지만 지금은 대중이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전환된 것이다.-251쪽

조선 도공들은 가마를 만들고 본격적으로 도자기 제작에 들어갔다. 이들은 올 때 도자기를 만드는 데 사용할 흙과 유약도 가져왔다고 한다. 성심으로 도자기를 구운 결과 마침내 백자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조선백자처럼 맑지는 않았지만 백자의 기품은 들어 있었다. 이들은 이 백자를 ‘히바카리(火ばかり)’라고 했다. ‘불뿐’이라는 뜻이다. 이 백자를 만들어내는 데 사용한 일본 것은 불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조선 도공의 프라이드가 그렇게 서려 있는 이름이다.-274쪽

조선과 베트남이 동아시아의 리더가 되지 못했음은 지정학적 조건을 반영하는 것일 뿐 하등 부끄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오늘날 미국이 세계를 이끌어가는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지만 프랑스・독일・영국이 자존심을 잃지 않고 세계문화에 이바지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조선, 베트남, 그리고 일본 모두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당당한 지분을 갖고 있는 문화적 주주 국가였던 것이다. 라이샤워(E. O. Reischauer)가 『동아시아』(East Asia)에서 거론한 나라도 중국・한국・일본・베트남 네 나라이다.-342쪽

한 조직의 리더는 힘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사 모두가 그렇듯이 높은 위치에 있는 자는 힘과 아울러 조직의 안정과 조화를 갖출 수 있어야 한다. 일본이 아시아의 리더로 나서겠다는 두 차례의 시도,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중국을 거쳐 인도까지 쳐들어가 동아시아 제국을 건설하겠다고 조선에 길을 비켜달라며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의 실패는 이 점을 잘 말해준다. 자국 내에서는 힘으로 군림할 수 있지만 세계를 이끌어가는 리더에게는 또다른 자질이 요구된다.-3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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