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어딘가에 잘 감추었다 해도, 깊은 곳에 잘 가라 앉혔다 해도, 거기서 비롯한 역사를 지울 수는 없어." 사라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것만은 기억해 두는 게 좋아. 역사는 지울 수도 다시 만들어 낼 수도 없는 거야. 그건 당신이라는 존재를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52쪽
"이제 상처 입기 쉬운 순진한 소년으로서가 아니라 자립한 한 사람의 전문가로서 과거와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해.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봐야만 하는 걸 보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그 무거운 짐을 끌어안은 채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가야 해."-130쪽
나는 결국 혼자 남겨질 운명일지도 모른다. 쓰쿠루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다가왔다가는 이윽고 사라진다. 그들은 쓰쿠루 속에 무엇을 찾으려 하지만 그것을 찾지 못해, 또는 찾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체념하고(또는 실망하고 화가 나서) 떠나 버리는 것 같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 설명도 없고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없이. 따스한 피가 흐르고 아직도 조용히 맥박 치는 인연의 끈을 날카롭고 소리 없는 손도끼로 싹둑 잘라 버리는 것처럼. // 분명 자기에게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낙담케 하는 뭔가가 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그는 소리 내어 말해보았다. 결국 남에게 내밀 수 있는 건 뭐 하나 가진 게 없어. 아니, 그러고 보면 나 자신에게도 내밀 것이 하나도 없을지 모르지.-150쪽
나라는 인간 안에는 뭔가 뒤틀린 것, 비뚤어진 것이 잠겨 있는지도 몰라, 하고 쓰쿠루는 생각했다. 시로가 말한대로 나한테는 보이는 얼굴만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면의 얼굴이 있을지도 모른다. 늘 어둠 속에 감추어진 달의 이면처럼. 나는 스스로도 느끼지 못한 채 어딘가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간성 속에서 정말로 시로를 강간하고 그녀의 마음을 깊이 베어 찢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비열하게 힘으로 눌러서. 그런 어두운 이면이 언젠가는 표면을 능가하여 그것을 완전히 집어삼켜 버릴지도 모른다. -270쪽
그러나 한편으로 정말로 원하는 것을 고생해서 손에 넣는 기쁨을 맛본 적도 기억하는 한 단 한 번도 없었다.-276쪽
그때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영혼의 맨 밑바닥에서 다자키 쓰쿠루는 이해했다.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 그것이 진정한 조화의 근저에 있는 것이다.-364쪽
"나에 대해서는 이제 마음에 두지 마. 난 그럭저럭 가장 위험했던 시기를 이겨 냈어. 밤바다를 혼자 헤엄쳐 건널 수 있었어. 우리는 제각기 있는 힘을 다해 각자 인생을 살아왔어. 그리고 긴 안목으로 보면, 그때 혹시 잘못 판단하고 다른 행동을 선택했다 해도, 어느 정도 오차야 있겠지만 우리는 결국 지금과 같은 자리에 이르지 않았을까 싶어. 그런 느낌이 들어."-370쪽
"지금까지 나는 계속 내가 희생자라고만 생각했어. 이유도 없이 가혹한 짓을 당했다고 생각해왔어. 그 때문에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가 내 인생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비틀었다고. 솔직히 말해, 너희 넷을 원망하기도 했어. 왜 나 혼자만 이런 참혹한 꼴을 당해야 하느냐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을지도 몰라. 나는 희생자이기만 한 게 아니라, 동시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줬을지도 몰라. 그리고 그 칼날이 나를 벤 건지도 몰라."-376쪽
"아마도 나한테는 나라는 게 없기 떄문에. 이렇다 할 개성도 없고 선명한 색채도 없어. 내가 내밀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그게 오래전부터 내가 품어 온 문제였어. 난 언제나 나 자신을 텅 빈 그릇같이 느껴 왔어. 뭔가를 넣을 용기로서는 어느 정도 꼴을 갖추었을지 모르지만 그 안에는 내용이라 할 만한 게 별로 없거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 사람한테 어울릴 것 같지 않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를 잘 알게 되면 될수록, 사라는 낙담하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나에게서 멀어지지 않을까." // "쓰쿠루, 넌 좀 더 자신감과 용기를 가져야 해. 생각해 봐. 내가 널 좋아했어. 한때는 나를 너한테 줘도 좋다고 생각했어. 네가 원한다면 뭐든 주려고 했어. 펄펄 끓는 피를 가진 여자애가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했던 거야. 너한테는 그만한 가치가 있어. 전혀 텅 비지 않았어."-380쪽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어." 그것이 쓰쿠루가 핀란드의 호숫가에서 에리와 헤어질 때 했어야 할, 그러나 그때 말하지 못한 말이었다.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4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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