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들은 구신들을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척신 체제와 구신들 개인의 인격을 동일시했다. 제도와 그 속에 있는 개인을 구별해서 보기에는 구체제의 파행이 너무 심각했고, 신진들은 너무 젊었다.-68쪽
신은 삼가 아룁니다. 정사(政事)는 시의(時宜)를 아는 것이 귀하고, 일은 실공(實功)에 힘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사를 하면서 시의를 모르고, 일을 당하여 실공에 힘쓰지 않으면, 비록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이 서로 만난다 하더라도 치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이의 「만언봉사」에서 재인용)-93쪽
선조 11년에는 또한 명망 있는 구신과 존경받던 서인이 여러 명 사망했다. 이즈음에 발생한 삼윤 사건은 가까스로 유지되던 동서의 세력균형이 무너지고 동인이 결정적으로 우세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세력 변화가 일어난 핵심 요인은, 선조 초년에 서인에게서 소외되었던 구신 출신의 사람들이 대거 동인 쪽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이들은 원래의 동인들보다 더 맹렬하게 서인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111쪽
이원익이 안주에서 편 행정적 조치는 정확하고 신속했으며, 그 효과도 매우 컸다. 그런데 그의 조치가 실상 내용면에서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당시 조선의 지방관이라면 취해야 할 상식적인 조치를 단지 정확하고 신속하게 취했을 뿐이다.-154쪽
"완평은 속일 수 있지만 차마 속일 수 없고, 서애는 속이고 싶어도 속이지 못한다."-176쪽
오직 백성만이 나라의 근본입니다. 조정은 이 점을 절실하고 급박한 임무로 삼아야 합니다. 그 밖의 일들은 부수적인 일일 뿐입니다. ……모든 백성은 삶을 즐거워하는 마음을 가진 뒤에야 (윗사람과) 더불어 고락(苦樂)을 함께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항산(恒産)이 없다면, 비록 (조정에서) 명령을 내려도 (백성은)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196쪽
이원익은 대동법을 새로운 재정 운영 체계라기보다는 재생의 연장선상에 있는, 다시 말해 백성의 무거운 공물 부담을 덜어주는 방법으로 이해했다. 이원익은 가장 숙련되고 경험 많은 관료였다. 또 공물 변통 개혁은 그 세부 내용의 많은 부분이 기존 정책과 경험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대동법의 어떤 부분은 그런 수준의 개혁과는 다른 이념적이고 실험적인 내용을 포함했다. 따라서 굳은 정책적 신념이 없다면 개혁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데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 사실 개혁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그 결과를 기존 경험 속에서 모두 확증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 때문에 개혁에는 본질적으로 특정한 가치를 향해, 위험을 내포한 도약이 포함되기 마련이다.-216쪽
학자와 관리・정치가는 생각하는 방식이나 행동하는 방식에서 크게 다르다. 학자가 독립적이고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면, 관리와 정치가, 그 중에서도 특히 관리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관리는 일차적으로 개인이 아닌 관료 조직의 일원으로 존재한다. 명령 체계에 따라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수행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과 협력해서 일을 처리해야 한다. 학자와 관리는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실제로는 거의 정반대의 사고 및 행동 방식을 갖는다.-235쪽
내가 태어난 지 지금 32년이 되니, 나이도 이미 많다고 하겠다. 그런데 그동안 읽은 글이 매우 적어서, 듣고 본 것이 고루하고 지식이 어둡기만 하다. 장차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살다가 이대로 생을 마치고 말 것인가. 지나간 일이야 물론 어떻게 할 수 없어도, 앞으로 맞을 세월을 예전처럼 헛되이 보내서야 되겠는가. 지금부터 독서에 대한 기록을 하되, 몇 월 며칠부터 언제까지 읽었다는 것과 읽은 분량을 표시해서 스스로 참고하기로 했다. 경술년(1610, 광해군 2년) 2월 그믐에 쓰다. (조익의 「원조잠」에서 재인용)-243쪽
송시열도 조익이 오랫동안 시골에서 산 경험으로 현실의 폐단을 잘 알았기 떄문에 그 기획이 시의에 들어맞았다고 말했다. 개혁을 위해서는 행정 관행이나 절차에 대한 숙달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현실 그 자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였다.-264쪽
늘 그렇듯이 개혁에 따른 저항은 단순하지 않다. 보통 그런 저항에는 상당한 정도의 합리적 반대 이유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개혁에 대한 저항은 대체로 합리적인 이유를 내세워 불합리한 것을 방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개혁 과정이란 개혁안에 대한 합리적 반대와 수구적 저항을 분리해 나가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265쪽
삼도대동법의 중단 결정이 내려진 뒤, 조익은 그것의 철회를 요구하는 상소를 다시 올렸다. 사실 이 상소를 올리는 일은 관료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무모한 행동이었다. 이미 정부가 공식적으로 결정한 내용에 대해 어떤 관료가 명백하고도 강력하게 반대한다는 일은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어렵다. 이를테면 오늘날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FTA를 자신의 실명을 드러내며 강력하게 반대하는 고위 관료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조익은 당시 조정의 결정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는 관료로서 개인적 출세를 포기해야만 가능한 일이며, 지식인으로서 소명감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조익이 이렇듯 자신의 주장을 강력하게 견지했음에도 조정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는 점이다.-292쪽
정치가는 일차적으로 현실 그 자체를 중시한다. 이 점에서 정치가는 당위적 요구에 민감한 실천적 지식인과 구분된다. 또한 정책이 지향하는 방향과 목표를 고민한다는 점에서는 이미 규정된 절차나 관행에 집중하는 관리와도 다르다. 그리고 현실이 내포하는 복잡성과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무수한 변주에 대응해야 한다는 점에서 개념적 논리적 측면에 집중하는 학자와도 다르다. 개혁을 이루어내는 과정에서 정치가의 특성은 여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훌륭한 정치가와 앞의 세 유형과 다른 결정적인 요소는, 그가 이 세 유형과 구분됨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각각의 본질적 측면을 충분히 이해하고 최대한 포괄한다는 점이다.-334쪽
잠곡에서의 그는 백성들의 삶을 철저하게 경험했다. 사회경제적, 문화적으로 자신이 속하지 않은 집단 혹은 계층의 삶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설령 그 삶을 일시적으로 살았다고 해도 본래의 자신의 삶과 관련성이 끊어지지 않는 한, 그 경험은 표면적일 수밖에 없다. 마음으로 그 삶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에 그는 백성의 관찰자가 아닌, 그냥 백성 중 하나였다. 백성의 삶은 머리가 아닌 그의 몸과 생활에 젖어들었다. 스스로 여러 차례 말했듯이 김육은 자신의 삶이 잠곡에서 그렇게 끝나리라고 예상했다.-3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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