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을 파하다 -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한 미래 구상
법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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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금 이 시대가 전환점이라고 느낀다. 산업화, 민주화를 거쳐 새로운 시대적 과제가 우리 앞에 주어진 것 같다. 스님은 이 시대의 과제가 안으로는 양극화 해소, 밖으로는 평화와 통일이라고 지적한다.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 분출되고 있는 목소리와 일치한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막막하기만 하다. 스님은 정치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정치의 역할은 사회의 갈등을 해결하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인데, 우리나라 정치는 갈등을 오히려 증폭하는 역할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회적 갈등을 자기 정치세력을 확장하는데 이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여의도가 온갖 사회 갈등의 용역깡패가 되어 양보 없이 각자의 입장을 고수하다 보니 대립이 격화되고, 폭력을 부른다. 설사 갈등이 해결되더라도 그 속도가 너무 늦기만 하다.

 

  너와 내가 무엇이 다른가를 따져보는 일은 문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너와 내가 다를 수 없음으로 돌아와야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스님의 말대로 공존이 먼저고 경쟁은 그 다음이다. 너와 나는 하나의 공동체고, 우리 공동체 안에서 서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합의점을 찾자는 원칙을 세워야 한다. 헌데 우리 사회는 그것이 무너지고 있다. 진보와 보수 모두가 문제다. 이 책에 제시된 천성산 터널의 사례가 기억에 남는다. 상대를 무조건 굴복시키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다. 상대와 내가 윈윈할 길을 찾는 것이 진정한 승리다. 서로가 이기는 경험이 축적될 때 갈등이 연착륙되고 사회가 좀 더 성숙할 수 있다.

 

사람들은 천성산에 터널이 뚫렸느냐 안 뚫렸느냐만 문제 삼는데,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사회적 쟁점을 어떻게 풀어가느냐 하는 것이다. 결국 원하지 않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게끔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죽거나 한 맺히게 두어서는 안 된다. 강정마을도 군사기지를 짓든 안 짓든 그게 핵심이 아니다. 어떤 결정이든 그 결정을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게 처리되는 게 중요하다. _ 116

 

  그렇다면 중도가 해결할 수 있는가? 스님은 중도가 단순히 중간이나 절충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양자의 입장을 섞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갈등의 뿌리부터 분석하고 공동체의 관점에서 양자를 통합하는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중도는 그래서 더 권위가 있어야 하고 더 깊이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양자의 입장을 통합하다보면 주장을 절충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에서 스님이 제시한 사대강 해법만 해도 그렇다. 스님은 우리의 경제수준에서는 개발보다 보존이 먼저이지만, 그래도 개발이 필요하다면 영산강부터 해보고 결정하자든가, 전체 계획량의 몇 분의 일만 우선적으로 해보고 결과를 보고 결정하는 등의 해법이 필요할 것이라고 제시한다. 실제로 사대강 사업 초기에 그런 의견이 나온 적이 있다. 하지만 양 측 모두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사실 무엇을 하자’, ‘하지말자는 의견이 대립할 때 반만 해보자는 것은 하지말자는 측에서는 얻을 것이 전혀 없고, 하자는 측에서는 뭔가 섭섭한 결론이다. 결국 하지말자는 측의 많은 양보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인데 그것이 쉽기만은 하겠는가. 만약, 안하는 것이 전적으로 옳다면 조금만 해보고 결정하자는 것이 과연 옳은 해결책일까.

 

  바로 이것이 현실의 적용에 있어서 또다른 곡절이 예상되는 이유다. 물론, 스님의 논리 전개는 명쾌하고, 많은 관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하지만 하나하나가 어려운 문제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이 꿈꾸는 화쟁의 정치, 통합의 리더십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많은 사람이 같은 꿈을 꿀 때 꿈은 현실이 된다. 화쟁의 정치가 순식간에 이루어질 수 없고, 통합의 리더십이 한 순간에 번쩍 하늘에서 내려올 수 없다. 국민의 수준이 성숙해야 한다. 공동체와 나를 잇는 끈을 바라봐야 하고, 이성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어야 한다. 나부터 스님이 이야기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삶을 살도록 더욱 노력해야 겠다. , ‘자기를 위하는 삶이 남을 위한 삶이 되고 공동체의 이익을 해치지 않는 자기 발전이 공동체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말이다. 살신성인으로 나에게 해가 되지만 공동체에게 이득이 되는 일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나에게만 이롭고 공동체에는 해로운 일들을 해서야 되겠는가.

 

언제나 공동체의 이익을 생각해야 한다. 또한 시대적 흐름을 읽고, 지금의 과제가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 이는 결코 남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 것이다. 자신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시대를 읽자. 시대적 과제 해결에 기여하자. _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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