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하루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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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며칠 전에 티브이를 보던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일흔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곱디고운 연극계의 거장이 나온 오락프로그램이었다. 그 연극배우는 돈을 벌자고 연극을 해본 적이 없다고 했고, 삼십여 년 동안 한 번도 쉼 없이 무대 위에 올랐다고 소개됐다. 대가를 향한 존경심이 우러나야 당연한데, 마음속에서 시샘이 소리 없이 새어나왔다. 왜 이런 감정이 올라오는지 나도 뜨악했다. 생각해보니 그 이의 고고함 속에서 일상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상의 무게에 짓눌린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구축된 듯한 그 우아함에 배가 아팠던 것이다. 덧붙여, 라면 하나 제대로 못 끓인다는 그 거장의 말에 경계감이 사라지고 웃음이 터졌던 것도 비로소 일상의 존재를 확인했기 때문은 아닐지.


  이 책을 읽고 뜬금없이 그 기억이 떠오른 이유는 아마도 박완서는 그 반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박완서의 글에는 일상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서 애초부터 거리감이나 부담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작가는 언제나 누군가의 엄마이고, 이웃이며 일상에서 자유롭지 않은 생활인으로 등장한다. 일례로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라는 작품은 손윗동서와 전화 수다의 형식을 띠고 있다. 글이 내포하고 있는 주제의 심오함은 논외로 하고, 전화수다의 자연스러움만 이야기하자면 박완서에게 그런 일상은 친숙한 것으로 보인다. 돼지꼬리 수화기 선을 손으로 배배꼬며 삼십 분이 넘게 통화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연상될 정도다.


  여섯 개의 단편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카메라와 워커」였다. 1975년에 쓰인 작품이지만 단연 압권이다. 작가의 작품에서 여러 번 다뤄진 한국전쟁의 아픈 기억이 중심 소재가 되지만 진짜인지 가짜인지 헷갈리는 개인사를 담고 있다. 주인공은 오빠부부가 전쟁통에 비명횡사한 탓에 홀로 남겨진 조카를 키우며 겪었던 갈등을 겪는다. 갈등은 가치관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전쟁통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개발독재시대를 살아가는 주인공은 사회에 순응하며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면 된다고 믿는다. 카메라는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든 조카가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주인공의 바람을 상징한다. 하지만 조카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포착하고 주인공의 소신에 반항한다. 워커는 그 상징이다.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사 교과서의 1970년대의 중심내용을 요약한다면 이렇지 않을까? 그리고 박완서가 포착한 이 갈등은 지금도 유효한 질문이 아닐까? 박완서의 글이 개인사인 동시에 우리 모두의 역사이며, 일상이 탈색되지 않으면서도 예술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나는 잠을 이기고 밤늦게까지 무엇에 집중을 해본 경험들이 없다. 하지만 잠자리에 들기 전, 피곤한 상태에서 이 책을 읽었는데 그때마다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다. 읽다보면 어느새 피곤이 싹 달아나고 무거웠던 머리가 가벼워졌다. 뭔가 있어보이는 문장 하나를 만들려고 공을 들였지만 내용은 부실한 책들이 많다. 박완서의 글에는 아포리즘은 없지만 쉽게 읽히고, 읽고 나서는 반드시 가슴을 때린다. 정말 모국어로 쓰인 글을 읽는 기쁨을 알게 하는 작가이며,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사실 게으른 탓에 박완서의 작품을 몇 개 읽지 못해 더 이상의 수사를 붙이기가 부끄럽다. 이 기회에 올 해의 목표는 박완서전집을 독파하는 것으로 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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