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그림이다 - 동서양 미술의 완전한 만남
손철주.이주은 지음 / 이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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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만은 고요하게,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습관처럼 나는 쪽 번호를 찾고 있었다. 오늘은 얼마나 읽었나, 이제 몇 쪽이 남았나 진도를 체크하고 있었던 것이다. 회사를 오가며 책 읽을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간혹 시간이 생겨도 더 자극적이고, 더 재미있는 오락거리에 마음을 뺏기는 지금, 책 한 권을 읽어내는 일은 또 그렇게 형식적인 행사가 되고 말았다. 왜일까?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며칠 전에 TV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한 남성을 떠올리다니. 

    집단 미팅 프로그램에 출연한 그이는 명문대를 졸업한 꽤 잘나가는 학원 강사인 모양이었다. 그는 여성들과의 만남이 호의적이지 않은 분위기로 흘러가자 카메라를 향해 울분을 토했다. 자기는 “고등학교 때도 무한경쟁 사회 속에서 살았” 으며 시간이 가장 아깝다고 했다. 그리고 연애 따위에 시간을 허비한다면 무한경쟁의 학원계에서 “퇴물이 되고 말” 것이라며 단호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모습을 내비쳤다. 책을 속도전 식으로 읽어내는 내 모습에서 연애에 공들이는 시간마저도 아까워하는 이 남성의 모습을 보았던 걸까? ‘무한경쟁 사회’에서는 책 읽는 것도 얼마나 더 빨리, 더 많이 읽느냐가 문제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시간이 흐르면 누구나 죽는다는 평범한 진리 앞에서도 사람들은 각자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는 듯하다. 누군가는 계속 그 사실을 되뇌며 초조해하고, 누군가는 ‘해가 동쪽에서 뜬다’라는 진리처럼 그저 당연한 듯 잊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각자 자기 앞에 던져진 시간을 더 아름답게, 의미 있게 채워가는 자세가 더 현명한 것 아닐까. 시간의 흐름에 초조해져서 삶의 참맛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마치 뷔페에 와서 본전이 아까워 배가 불러서 음식의 맛을 느낄 수 없을 지경인데도 꾸역꾸역 음식을 밀어 넣는 사람같이, 그렇게 인생을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괜히 서설이 길어졌지만, 이 책을 소개하려는 본래의 의도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이 책은 1년에 책 100권 읽기와 같은 속도 경쟁은 잠시 내려놓고 천천히 산책하듯 읽어야 하는 책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필력도 필력이지만 각각 동양화와 서양화에 조예가 깊은 손철주와 이주은이 열 개의 주제에 대해 주고받은 편지 묶음이다. 편지글이라 논리가 정연하지도 않고 꼭 정답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다양한 동, 서양의 그림들을 볼 수 있는 즐거움도 있다. 지은이들은 이 그림들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곁들였지만, 이 또한 정답이 없는 것이라 내가 달리 해석하지 말란 법도 없다. 고전은 늘 시대마다 새롭게 읽혀야 하고 새롭게 쓰여야 하는 법. 여기 나온 그림들을 새롭게 해석하고 나만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다면 그것 또한 ‘다, 그림’인 것이다.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특별한 지식을 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엄청난 통찰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저 교양 있는 분들의 한담을 읽는데 시간을 허비했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 ‘무한경쟁 사회’에서 말이다! 하지만 세상에 의미 없는 일들이란 없다. 작은 씨앗이 친환경 유기질 비료와 따스한 햇볕만 먹고 아름드리나무가 된 것은 아니다. 지금 의미 없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나중에 뒤돌아보면 모두 내 인생의 얼개를 짜는데 중요한 재료였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책의 마지막 그림, 귀스타브 카유보트의 「오르막길」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이 책을 벗하여 천천히 거닐 듯 읽어볼 일이다. 행복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안에서 오는 것이듯, 어떤 책이 한 사람에게 의미 있게 되는 것도 결국 그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상상만으로 행복해지는 경우가 있지요. 행복은 마음에 있는 게 맞나 봅니다. ‘Happiness'란 영어가 ’Happen'에서 비롯됐다면서요. 자신에게서 일어난 일이란 거죠, 행복은. 밖에서 온 것은 행복이 아니라 행운입니다. 굴러온 호박이 행운이고, 가지 나무에 열린 수박이 행운이죠. 행복은 바랄 바를 바라는 겁니다. 바라되 분수껏 바라면 행복은 자기 마음의 작용이라 언제는 얻을 수 있지요. -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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