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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평전 - 극단의 시대, 합리성에 포획된 근대적 인간 ㅣ 한겨레역사인물평전
김윤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 우리나라가 러시아로부터 무관을 고용하는 일은 실로 조선의 흥망이 걸린 것이다. 나의 생사는 논할 가치가 없지만, 조선은 한 번 죽으면 다시 소생할 수 없다. 내 몸이 죽어서 이 일을 방지할 수 있다면 지금 죽는 것이 영광스러운 것이다.” - 본문 130쪽
비분강개하는 열사의 풍모가 느껴지는 이 말을 이완용이 했다면 믿을 수 있을까? 나는 결코 믿을 수 없었다. 내 머릿속에 존재하는 이완용은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직 자신의 부와 영달을 위해서는 나라와 민족 정도는 손쉽게 팔아넘기는 천하의 비겁하고 추잡한 사람이 내가 그에게 가지고 있는 고정된 이미지였다. 하지만 이 문장은 이완용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을 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편으로는 ‘말이면 무슨 말이든 못할까’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완용도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했던 ‘사람’임을 비로소 가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이처럼 ‘매국노’라는 이완용에게 붙여진 딱지를 벗기고, ‘인간’ 이완용을 바라보고자 노력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자세는 평전작가가 갖추어야할 기본적인 소양이라 특별할 것은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이완용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위치를 고려한다면, 지은이의 노력은 평가할 만 하다고 생각된다.
우선 이완용의 출신배경을 살펴보면 입이 딱 벌어지게 된다. 노론명문가 출신임은 물론이고, 형은 대원군의 사위요, 어머니는 여흥 민씨로 후일 정계를 주름잡게 되는 민씨 척족세력과 한 핏줄이었던 것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유명 정치가를 배출한 가문의 자손에다가 현재 집권당 대표의 사위를 형으로 두고, 유력 대권주자와 어머니가 같은 가문인, 실로 어마어마한 배경을 갖춘 셈이다. 가정환경만으로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성급한 감이 있지만 이완용이 당시 체제를 유지하면서 부분적으로 서양 문물과 사상을 도입할 것을 주장했던 점을 생각해본다면, 남부럽지 않았던 가정환경이 그 판단에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이완용이 서얼출신이었던 윤치호나 천민출신 송병준과 같은 이들과 불화했던 이유도 출신배경의 차이에서 오는 위화감 때문은 아니었을까. 요컨대 이완용은 개화주의자로 분류되었지만 근대서구문명의 ‘만민평등’이나 ‘천부인권’과 같은 기본가치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던, ‘현실유지 개화파(?)’였던 것이다.
급격한 사회변동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시대의 변화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완용은 실로 깨인 기득권층이었다.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완용의 부정부패에 대한 처신들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완용은 어떤 당사자와도 갈등을 빚지 않으면서 사건을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부정부패를 그대로 눈감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통의 집권층과 분명 달랐다. 하지만 발본색원하여 문제를 처리하기보다는 조용하고 부드럽게 누구도 피해를 입지 않는 선에서 처리했던 점에서 이완용만의 개성을 보인다. 그의 이런 처신은 여러 사람에게 호감을 사기도 했다. 국외에서도 인정받는 명필에다가 검소하고 기품 있는 성품도 그러한 평가에 일조했다. 이완용은 이처럼 나름의 능력과 감각을 갖춘 성실한 관료에 인기 있는 명망가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고상하고 능력 있었던 인물이 매국노로 전락하게 되는 과정을 보면 두려움이 앞선다. 크게 심성이 고약하다거나 지나친 물욕을 가진 악당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타락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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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은 부조리한 사회의 구조와 관행이라는 거대한 힘에 맞서 승산 없는 싸움을 할 만큼 분노와 투지를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방 향리 및 양반 토호와 한패가 돼서 진흙탕 속에 자신을 내던질 만큼 탐욕스러운 인물도 아니었다. 목민관으로서의 자세를 되새기면서 자신만이라도 오롯이 지켜내려 노력하는 완고한 원칙주의자도 아니었고, 주위의 시선을 무시하고 과감하게 관행을 잘라내는 과격한 행동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주어진 상황에서 어느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피해가 가지 않는 방법을 찾아내서 가능한 무리수를 두지 않고 일을 처리하려 하는 현실주의자, 합리주의자, 실용주의자였다. - 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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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의 삶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비극성은 그 타락의 씨앗이 한 독특한 인물의 악한 본성에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평범함에 있다는 사실이다. 먼저 이완용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대해 단 한 번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는 현실을 일단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고 그 현실 하에서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이익을 얻고자 했다. 말하자면 ‘이 현실이 바뀔 가능성은 없는가?’, ‘이 현실은 과연 정당한가?’와 같은 질문은 던지지 않은 것이다. 현실은 바뀔 수 없다는 전제하에서 지극히 기술적이고 수단적인 합리성만 발휘한 것이다.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고 가정했기에 그의 선택들은 무력감과 열등감이 담겨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을사조약을 피할 수 없다는 무력감은 형식적인 자구 수정을 요구해서 받아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완용의 경우에는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 탓에 그 열등감이 자신을 향하지 않고 자기를 제외한 조선민족에게 향했다. 때문에 실력양성과 계몽만이 민족의 열등함을 구원할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한 사실은 놀랍지도 않다. 그에게 열등한 민족에게 병합이라는 현실은 어쩌면 지극히 정당한 것이었을 것이다.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 못하고,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며 모나지 않게 누구로부터 미움도 받지 않으면서 그저 최선을 다하면서 살았던 것의 결과가 ‘매국노’라면 우리는 과연 그 덫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새삼 두려움과 동시에 어떻게 살아야 잘사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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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 불평등, 억압에 분노하기보다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실리를 추구했던 그의 태도 가운데서 우리는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믿는 현대인의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 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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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탐구는 영웅을 인간으로 만들고, 악당 또한 인간으로 만드는 작업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영웅이 그저 영웅으로 존재한다면 그 누구도 그곳에 닿을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학과 숭배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악당이 그저 악당으로 남는다면 그 누구도 그곳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저 혐오와 자기기만이 남을 뿐이다.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무엇이 되느냐가 결정되는 것이지 애초에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정해질 리야 없지 않은가. 왜 누구는 영웅이 되고 누구는 악당이 되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에 대한 질문을 각자에게 던져주는 것이 평전의 역할이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이 책은 그런 역할에 충실한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인물화가 아니라 풍경화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전체적인 배경에 대한 묘사가 지나쳐서 이완용 개인의 행적에 대한 서술은 압도되어 버린 느낌이다. 물론 이완용에 대한 증오 때문에 그의 내밀한 생각과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를 담은 1차 자료를 얻기 어려운 점을 감안하더라도 아쉬움은 남는다.
끝으로, 책을 읽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평가가 내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 책이 이완용을 너무 미화했다는 평가가 다수인 것에 아쉬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변호하는 입장에 서고자 한다. 일본의 강제합병에 일조한 것은 분명 이완용의 잘못이지만 이 책이 지적하듯 이완용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우리가 진정 식민지의 역사를 청산하고 다시는 그러한 역사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국권상실의 원인을 이완용 개인의 잘못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 보다는 그 당시 조선의 현실과 사회지도층과 민중들이 어떻게 대응했는지 냉정하게 분석하고 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때문에 이 책은 이완용에 대한 인민재판 식의 돌팔매 처형에서 벗어나 역사의 법정에서 이성적인 재판을 통한 엄중한 형벌 부과로 가는 길을 연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에게 이완용의 모습의 있지 않은지, 현재에 또 다른 이완용이 활보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볼 여운을 남겨주는 것, 그것이 이 책이 가진 의의라고 본다. 이제, 이완용 따위의 인물에 대한 평전을 쓰는 데 장안의 지가를 올려야 겠냐는 비판에 대한 답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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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된 타자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는 일은 유쾌하지 않다. 특히 매국노의 모습에 깃들어 있는 우리의 모습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불편함을 무릅쓰고 언급해야 하는 이유는 사회적 가치의 부름에 호응해왔던 사람들이 있어왔고, 또 그들에 의해 변화가 주도되어왔기 때문이다. 지금은 국가와 민족의 가치보다는 인권·공공·자유의 가치가 호명되고 있고, 여전히 부름에 호응하는 또는 호응할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오늘날의 이완용은 ‘매국노’로서보다는 ‘부조리한 현실에 분노할 줄 모르는’ 또는 ‘그것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이 호명하는 가치에 호응할 줄 모르는’ 인물로 비판되어야 할 대상이다. - 1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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