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평전 - 극단의 시대, 합리성에 포획된 근대적 인간 한겨레역사인물평전
김윤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5월
구판절판


이완용은 서양인의 시선에 비친 조선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이 시선을 잘못된 것으로 보고 부정하고 싶은 생각에 인디언 부락을 비롯하여 미국에서 이방인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의 생활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거기서 얻은 결론은 쿠즈 요시히사의 말과 같이 ‘세계에서 가장 열등한 민족’은 아닐지라도 분명 부정적인 것, 열등한 것, 악한 것이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조선이었다.-50쪽

일반적으로 을미사변 전후에 반일적 입장을 표명한 데 반해 아관파천 이후 반러로 입장을 바꾸었다는 점 때문에 우리는 그가 변신의 귀재이고, 그래서 을사조약 체결 과정에서 친일파로 변신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간주해왔다. 그러나 고종의 통치권을 회복하여 조선을 개혁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던 이완용에게 그것은 변신이 아니었다. 더구나 고종의 신임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밖에 없는 권력 구조 속에서 이완용은 일관되게 군주를 보필해야 한다는 자신의 소신을 밀고 나갔다.-144쪽

이완용은 부조리한 사회의 구조와 관행이라는 거대한 힘에 맞서 승산 없는 싸움을 할 만큼 분노와 투지를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방 향리 및 양반 토호와 한패가 돼서 진흙탕 속에 자신을 내던질 만큼 탐욕스러운 인물도 아니었다. 목민관으로서의 자세를 되새기면서 자신만이라도 오롯이 지켜내려 노력하는 완고한 원칙주의자도 아니었고, 주위의 시선을 무시하고 과감하게 관행을 잘라내는 과격한 행동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주어진 상황에서 어느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피해가 가지 않는 방법을 찾아내서 가능한 무리수를 두지 않고 일을 처리하려 하는 현실주의자, 합리주의자, 실용주의자였다.-158쪽

대한제국 정계에서는 고종의 총애를 다투는 정치 세력 간의 암투가 끊이질 않았다. 그 원인은 왕권 강화를 위해 외세와 정치 세력을 상호 견제시키는 고종의 국정 운영 방식 때문이었다. 미천한 가문 출신으로 오로지 고종의 총애를 얻는 것만이 출세할 수 있는 방법이었던 측근 세력들은 고종에게 자신의 인생을 걸고 있었다. 고종 역시 정치적 기반을 갖고 있으면서 말이 많은 양반 대신들과 달리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 쓰면서 자신의 말 한마디에 생사를 거는 그들을 통해 권력을 강화해가고 있었다. -164쪽

100년 전이 아닌 오늘날에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도구적 합리성으로 무장한, 그래서 성공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형인 이완용은 왕의 통치 체제를 부정하고 새로운 구조를 형성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망명 정치인이 될 수 없었다. -172쪽

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1899년 대한제국 국제의 선포 이래로 대한제국은 조선의 통치 체제를 그대로 계승한 전제 왕국이었다. 갑오개혁 이후 입헌군주제 수립을 위해 개화파 등이 정치체제 개혁을 추진하려 했지만, 고종은 이를 철저하게 탄압해왔다. 고종이 개인적으로 아무리 인민의 뜻을 존중한다 하더라도 인민의 의견이 수렴될 제도적 장치는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국가의 존망을 결정하는 순간 고종과 권중현 등의 대신들은 단지 황제의 자문 기구에 지나지 않았던 중추원을 마치 의회인 것처럼 말하면서 여론을 수렴해야 한다고 핑계를 대고 있었던 것이다. // 지금처럼 국가의 중대한 외교 사안에 대해 국회의 동의를 받는 절차가 제도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독립국가의 결정 과정을 존중해야 할 외교 상대국 일본이 고종이 주장했던 절차 중 ‘인민의 의향을 묻는 과정’은 인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이토와 하야시는 대한제국 정치체제를 분명하게 지적하여 고종과 대신들의 말이 어불성설임을 비난했다. -191쪽

신성불가침의 존재인 황제를 부정할 수 없었던 대한제국의 지배엘리트들에게 을사조약 체결은 그야말로 수치스러운 사건이었다. 이들은 조선 왕조의 국체를 유지하는 가운데 서양 문명의 수용이 가능하다고 보았고, 기존 체제를 버리지 않더라도 서양의 근대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실상부한 독립 주권을 가진 국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갑신․갑오 세력이 시도했던 체제 개혁보다는 기존 체제 안에서 ‘실력 양성’과 ‘자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대한제국민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을사조약 체결로 지배 엘리트들이 지향해왔던 독립국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그들은 다시 대한제국민에게 왜 이런 일이 벌어졌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설명해야 했다.-202쪽

이들이 왕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었던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당시에 대한제국민 대부분이 왕 없는 나라를 상상하기 힘들어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지배 엘리트가 아닌 대다수 백성들의 힘도 믿을 수 없었다. 왕이 없다면 과연 누가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인가? 임오군란과 갑오농민전쟁에서 보여준 백성들의 힘과 분노를 두려워했던 이들은 백성들에게 나라의 주권을 일부 넘겨주는 것을 불안하게 여겼다. 그래서 이들은 왕과 인민 사이에서 양자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지배 엘리트 중심의 정당을 구상했다. 입헌군주제와 지배 엘리트가 장악한 정당의 수립이 그들이 생각하는 정체였다. 이러한 구상은 기존 체제를 크게 변화시키지 않는 가운데 왕권을 조금 제한하고, 백성들의 요구를 조금 수용하는 절충적인 형태였다. -203쪽

따라서 이들은 왕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없었고, 또한 부정해서도 안 되었다. 균형자로서 이들의 입지는 왕과 백성이 존재해야만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생각의 근저에는 500년간 유지되어온 조선 왕조의 국체와 유교적 정치 이데올로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배 엘리트들이 내놓은 독립국에 대한 비전을 파열시킨 을사조약은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에서 쓴 바대로 황제를 협박하고 속였던 이토와 조약에 서명한 을사5적이 전적으로 짊어져야 할 죄였다.-203쪽

이완용은 현실 상황에 맞춰 자신의 입지를 정하는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었고, 그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방향으로 결과를 이끌어내려고 노력하는 매우 실용적인 인물이었다. 국가적 위기 앞에서 울분과 분노에 치를 떨기보다는, 또 현실을 바꾸려고 몸부림치기보다는 상황에 자신을 맞출 수 있는 합리성과 실용성을 갖춘 관료였던 것이다.-207쪽

이것들은 근대 자본주의 국가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지만, 이러한 개혁만으로 독립국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개혁은 식민 지배를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무장 투쟁의 필요성을 암시했던 『대한매일신보』는 "실력이 있음은 환영하지만, 실력이 독립보다 먼저임은 결코 인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 실력 양성을 우선시하는 주장을 비판하고 나섰다. -221쪽

고종의 폐위와 정미7조약 조인에 대한 이완용의 주장 속에는 오랫동안 형성된 그의 태도가 자리하고 있었다. 하나는 기존 체제를 유지하는 가운데 점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기득권 정치인의 신중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현실에 조응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정하고 합리적인 방법을 도출하려는 관료적 태도였다. -225쪽

다른 한편 이완용이 매국 행위의 정점에 자리하게 된 배후에는 철저한 현실주의와 실용주의적인 인생철학이 있었다. 그는 유교 교육을 통해 의리와 명분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지만, 현실과 개인의 관계에 있어서는 매우 실용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처음 관료가 되어 고종과의 경연에서 조괄을 등용한 조나라 왕의 선택에 대해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음을 피력했던 점, 그리고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조약 체결 때 대세를 어찌할 수 없다는 발언을 했던 점 등을 미루어볼 때 그는 역시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그러면서 그는 그 현실 가운데서 모든 것을 포기하기보다는 최대한 또는 최소한 얻을 수 있는 것을 생각하는 실용주의적 면모를 갖고 있었다. -258쪽

차별, 불평등, 억압에 분노하기보다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실리를 추구했던 그의 태도 가운데서 우리는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믿는 현대인의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299쪽

배제된 타자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는 일은 유쾌하지 않다. 특히 매국노의 모습에 깃들어 있는 우리의 모습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불편함을 무릅쓰고 언급해야 하는 이유는 사회적 가치의 부름에 호응해왔던 사람들이 있어왔고, 또 그들에 의해 변화가 주도되어왔기 때문이다. 지금은 국가와 민족의 가치보다는 인권·공공·자유의 가치가 호명되고 있고, 여전히 부름에 호응하는 또는 호응할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오늘날의 이완용은 ‘매국노’로서보다는 ‘부조리한 현실에 분노할 줄 모르는’ 또는 ‘그것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이 호명하는 가치에 호응할 줄 모르는’ 인물로 비판되어야 할 대상이다.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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