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독서에서도 늘 유행에 한 발짝 뒤처지는 편이다. 이번에도 그런 경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이 책이 화제가 되었던 지난 12월에 사놓고도 오늘에서야 겨우 다 읽은 것이다. 나는 이렇게도 시의적절한 사람이 아니지만, 이 책은 정말 시의적절한 책이다. 대외적으로는 세계금융위기의 불씨가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았고, 대내적으로는 복지에 대한 논쟁이 점점 뜨거워지는 와중에 나왔기 때문이다. 장하준 교수는 경제학을 전혀 배우지 않은 대중을 상대로 쉽고 재미있는 어조로 앞으로 우리 경제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책 제목처럼 자유시장경제주의자들의 신화를 각개격파해가면서 말이다.

  장 교수는 아예 자유시장이란 없다고 단언한다. 규제가 없는 시장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규제가 대변하는 가치를 인정하면 마치 규제가 없는 자유시장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만약 누군가가 어떤 규제에 대해서 ‘시장경제질서의 근간을 뒤흔드는’ 또는 ‘자유경쟁시장의 원리에 반하는’ 정책이라고 공격한다면, 사실 이 반박은 상당히 논거가 빈약하다는 말이다. 오히려 이런 주장은 화자가 그 규제의 가치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돌려 말한 것에 불과하다. 자유시장질서를 옹호한다는 말은 언뜻 들으면 학문적으로 순수하고 중립적인 것 같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화자의 가치관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비정치성의 정치성’이라고 할 수 있는 역설이다.

   
  우리는 어떤 규제 이면에 있는 도덕적 가치에 수긍하지 않을 때 그것을 규제라 여긴다. - 본문 25쪽  
   

  더 나아가 이 책은 더 나은 자본주의가 가능하며, 자유시장주의가 자본주의의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고 말한다. 사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자유경쟁시장이란, 인간의 절대적인 합리성과 완전한 시장정보 등의 조건이 갖춰질 때 형성되는 지극히 이상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인간은 완전히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며 시장정보가 100% 공개된 시장은 가능하지 않다. 또, 자유시장주의자들은 인간의 이기심을 경제활동의 강력한 동기로 설명하지만 인간은 생각보다 복잡한 존재임은 간과하고 있다. 이처럼 장 교수는 경제학이 학문의 엄밀성을 위해 배제한 사실들을 되짚으면서 자유시장주의자들의 신화를 깨고 있다. 현실과 유리된 주류 경제학자들에게 자기들만의 성에서 나오라고 권유하고 있는 셈이다. 

   
  자본주의 경제를 운용하는 데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자유 시장 자본주의는 이런 방법 중 하나일 뿐이고, 그 중에서도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지난 30년 동안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자유 시장 자본주의는 이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주장과는 달리 경제 성장을 늦추고, 불평등과 불안정을 고조시켰으며, (때로는 엄청난 규모의) 금융 위기를 더욱 빈번하게 초래했다. - 본문 329쪽  
   

  그렇다고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우선 경제성장률을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근거로 삼은 점이 그렇다. 물론 상대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상대가 중요시하는 ‘사실’들을 가지고 이야기한 것일 테지만 경제성장률에 대한 성찰이 빠져 있다는 점은 아쉽다. 경제성장률이라는 지표가 인간의 행복을 온전히 표현하고 있지 못하며, 경제성장률이 높다고 해서 그 나라의 경제가 질적으로 성장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장하준 교수는 그동안 시장주의자들에 의해 철저히 무시되었던 정부의 역할에 대해 재조명하고 있지만, 정부의 역기능에 대해서는 다소 소홀한 감이 있다. ‘기름 값이 묘하다’는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 부산스러운 시장의 반응이 보여주듯이, 우리나라는 관치경제의 폐단이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폐해 못지않아 보인다. 끝으로 한 나라의 경제성장에 유리한 보호주의가 세계전체로도 유익할까에 대한 의문도 여전히 남는다.

  여러 논쟁점이 남아 있지만 이 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독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에 의한 폐해가 사회 곳곳에서 목도되는 지금 더 나은 경제를 모색하는데 중요한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경제의 질서를 용납하면서도 그 무대 아래에 복지확대라는 거대한 그물을 설치하여 패자부활전이 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가 모색해야 할 다음 자본주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이런 논의조차 거부하려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문제가 있으면 항상 해결책을 모색해야만 하고, 여러 대안을 놓고 갑론을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 상태에 정체하기 마련이다. 정체하면 그들이 말하는 ‘성장’도 더 이상 없다.

   
  사람들이 내리는 결정, 특히 규칙을 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내리는 결정에 따라 일어나는 일들의 방향과 결과도 결정이 된다. 누구도 자기가 내리는 결정이 의도한 결과로 이어질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내려진 결정들이 모두 불가피한 결정은 아니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간의 힘으로 만들 수 있는 여러 세상 중 가장 나은 세상이 아니다. 우리가 다른 종류의 결정을 내렸더라면 지금 다른 모습의 세상에 살고 있을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볼 때 우리는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이 내리는 결정들이 확고한 증거와 제대로 된 논리에 근거한 것들인지를 따져 봐야 한다. 그런 후에야 기업, 정부, 국제기구 등에도 올바르게 행동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 - 본문 16쪽  
   
 
사족.
  얼마 전 한 신문의 칼럼에서는 ‘규제 없는 시장은 없기 때문에 자유시장이란 없다는 장하준 경제학의 대전제부터 동의하기 어렵다. 법이 없는 국가는 없기 때문에 자유국가란 없다는 말과 똑같은 논리 아닌가.’ 라면서 장 교수의 논리를 비판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우습다. 자유시장에는 규제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 개념필수적이지만, 자유국가에 법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그 개념에 필요한 전제가 아니다. 자유국가란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는 국가 또는 자유주권국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국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강력하게 보장하기 위해 헌법을 필요로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논리전개 아닐까. 한마디로 엉터리 반박이며, 장 교수의 주장이 기분은 나쁘지만 딱히 반박할 논리가 없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또한 장 교수가 한미FTA를 반대하면서 ‘야당과 좌파에 힘을 실어준다’며 사실상 정파적이라고 비판했는데 한미FTA를 옹호하는 학자는 순수하며, 반대하는 학자는 정파적이라는 논리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말이다. 비정치적인 체하지만 실상은 굉장히 정치적인 자유시장주의자들의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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