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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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짧은 글들의 모음이지만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지은이는 정말 타고난 이야기꾼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어떤 소재에서 시작하든지 이야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그 안에 소박하고 꾸밈 없는 감동이 있었다. 마당의 잡초에서 천안함 사건으로 이어져 전쟁의 기억들을 끄집어 내고 종국에는, 자신이 가지 못했던 길까지 펜이 와닿는 그 이야기 속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는 전쟁의 기억이라는 '질병'이다. 전쟁을 겪은 세대도 파괴된 청춘에 대한 비통함에 '다 쓸어버리자!'고 소리 내곤 하지만 대부분 전쟁이라는 무모함은 그 것을 겪지 않은 세대들에 의해 벌어지기 마련이다. 나도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라 전쟁에 대해서 막연한 거부감만 있을 뿐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천안함 사건 이후 간간이 전쟁이라는 단어가 들려올 때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던 것인데 이 책을 읽고나니 좀 더 경각심이 생긴다. '얼마나 끔찍하길래 그 기억이 반세기 넘게 잊혀지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600만의 사상자라는 통계가 아니라 600만개의 꿈이 사라지고, 그 가족들 2000만명의 고통이 파생되는 전쟁이라면, 그 어떤 알량한 전리품이 그 생채기를 가릴 수 있을까.

 

  물론, 이 책에 앞서 말한 어두운 기억들만 가득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머가 가득하다. 얼마나 허를 찌르며 웃긴지 조용한 도서관에서 혼자 키득키득하기도 했다. 또한 완벽에 가까울 정도의 성찰, 자학에 가까운 겸손도 솔직하게 털어 놓아 책의 가치를 더한다. 특히 전쟁 중에 지은이의 오빠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이 재수 더럽게 없는 가족으로부터 벗어나자.'고 까지 생각했었다고 털어놓는 대목에서는 그 솔직함에 앞으로 지은이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다 믿어도 되겠다는 신뢰를 자아낸다. 아마도 지은이의 글의 장점은 앞서 말한 여러 미덕 중에서도 그 솔직함이 제일일 것이다.

 

  최근에 읽은 그 어떤 책보다 즐겁고, 때론 가슴이 먹먹하게 읽었다. 외국어를 번역한 책에서 나오지 못하는 모국어로 쓴 좋은 글이 주는 위력인 것일까. 눈에 머물지 않고 가슴으로 치닫는 글들에 행복한 시간이었다. 다만, 몇 개의 글들에서는 내용이 겹치는 대목이 많을 뿐더러 몰입하기에는 다소 짧은 글들이 있어 아쉬웠다. 한 권의 분량을 채우기에 좀 더 시간이 걸렸을지라도, 편집하는 측에서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글을 추렸더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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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둘리 2011-01-31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완서 작가님 영면. 이 책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책이 되고 말았네요. 좀 더 기다렸다가 추렸으면 하는 바람을 서평에 남긴 것은 투병을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어요. 몸이 안좋은 와중에서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은 노작가의 모습이 그려져 더없이 소중한 책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영면 소식을 듣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