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심은 사람
장 지오노 지음, 크빈트 부흐홀츠 그림,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어떤 사람은 이 책을 보고 인생이 바뀌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마음으로 느끼는 능력이 퇴화한 것인지, 원래 없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책을 손에 들면 읽어내야겠다는 결심과 중요하지 않은 부분은 버리고 중요한 부분만 잘 골라서 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는 것 같다. 그런 생각들에 묻혀서 언제부턴가 내겐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지 ‘눈으로’ 읽는 ‘부담스러운’ 행동으로 전락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책에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 것도 마음이 아닌 눈으로 읽어서 그랬을 것이다.


  이 짧은 이야기는 프랑스의 한 깊은 산골에서 혼자 살며 나무를 심는 노인에 대한 것이다. 그 노인이 나무를 심는 행위는 우리가 생각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3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씨앗 중에서도 좋은 것만 골라내서 황폐한 고원에 나무를 채워 넣는, 어찌 보면 직업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노인의 집념과 헌신으로 거칠고 마른 황무지가 숲내음을 풍기고 물이 흐르는 낙원으로 바뀌어간다. 뿐만 아니라 폐허에서 숯을 팔아 입에 풀칠하던 탐욕스런 인간들도 너그럽고 따뜻한 사람들로 바뀌어간다. 이 모든 변화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인간이 구원받는 기독교의 믿음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극적이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고사성어도 문득 머리를 스친다.


  기껏 힘들여 10만 개의 씨앗을 심어도 1만 그루만 건지는 이 좌절과 역경을 노인은 왜 지속하는 것일까. 투자의 90%를 손해 보는, 경제학적으로 보면 대단히 - 아니, 엄청나게 - 비효율적인 이 일을, 더군다나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이 일을 노인은 왜 지속하는 것일까. 그 낙담과 허무를 이기는 힘은 무엇일지 정말 궁금했다. 고집? 몰입? 사명? 희망? 그 답은 노인만이 알 것이다. 어쩌면 그 네 가지 모두 일수도 있고 전부 아닐 수도 있다. 글을 쓰면서 다시 생각해보니 오히려 노인은 그것이 손해 보는 장사라고 생각지 않을 것 같다. 그는 잃어버리는 9만개의 씨앗보다 시도하지 않았으면 생기지 않았을 1만 그루의 새 생명을 보며 오히려 수지맞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손해가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을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지 않을까?


  사물을 보는 관점의 변화의 중요성만큼이나 이 책을 보며 다시 생각했던 것은 ‘모든 변화는 점진적이기에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인내’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이다. 노인의 무의미하게만 보였던 행동이 가치를 드러낸 것은 십여 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흐르면 흐를수록 그 가치는 더욱더 커질 것이다. 이처럼 인생에 있어서 그 결실을 보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때문에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열정과 희망 그리고 확신이 있다면, 한번 시도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인내를 가지고 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 하나 노인이 주는 교훈은 모든 변화는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가족이, 세상이 바뀌길 기다리다가는 아무런 변화를 볼 수 없을지 모른다. 그렇게 기다리기만 하다가는 오히려 환멸과 권태에 가득 차 세상을 비관하게 될 것이다. 노인도 황무지가 낙토로 변하길 기다리고만 있었다면 그 낙원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모든 변화의 씨앗은 자신에게 있다. 자신이 변해야 세상이 바뀐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훈계하기 이전에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내 자신부터 변화하도록 노력해야 세상은 비로소, 언젠가는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교훈을 준다.


  하지만 머리를 굴려 이런 교훈을 얻는다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이 책을 읽으며 감동의 눈물을 주욱 흘리고 다시 제 삶으로 돌아와 자기 마음에 나무 하나 심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이 책을 가장 잘 읽은 사람이 될 것이다. 고로, 나는 이 책을 헛 읽은 셈이다. 아무리 후하게 쳐도 열등생을 약간 벗어난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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