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마가 사랑한 화가 들라크루아 - 별난 화가에게 바치는 별난 그림에세이
카트린 뫼리스 글.그림, 김용채 옮김 / 세미콜론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사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들라크루아가 누군지 몰랐다. 다만, 뒤마가 사랑한 화가라고 해서 여자가 아닐까하고 추측했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과 같은 유명한 작품을 남긴 작가에 대한 엄청난 무례다 싶다. 책은 대단히 얇고 매력적이다. 카트린 뫼리스에 의해 그려진 그림은 예쁘지는 않지만 약간 다른 느낌의 매력을 보여준다. 당대에 ‘회화의 학살자’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던 들라크루아에게 바치는 독특한 헌정이다. ‘별난 화가에게 바치는 별난 그림에세이’라는 부제가 딱 어울린다고나 할까.

  뒤마가 그의 글에서 자주 말하듯이 들라크루아는 정말 천재였을지 모르지만, 그에 걸맞은 영광을 누리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런 대접은 시대를 앞서나간 그의 재능 탓이기도 했을 것이다. 사실 천재는 자신의 재능 때문에 불행해지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시대는 극히 소수의 천재에게만 당대의 성공을 허락하고 많은 천재들에게는 그가 죽은 뒤에야 그를 높여주었다. 하지만 내가 생전에 맛보지 못할 거나한 제사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역사란 정의롭지 않고 인생이란 공평하지 않은 법이다. 그런 생각에 이르니 뒤마의 마지막 말이 참 가슴을 울린다.

   
    저를 놀라게 하는 것은 더 정확히 말해서 저를 애통하게 하는 것은 예순넷의 나이에도 여전히 매력적이고 정열적이며 우아한 들라크루아 같은 사람이, 정열과 재능으로 일생을 산 그런 사람이, 그렇게 많은 애인과 친구와 제자들을 가졌던 사람이, 죽은 후에는 그 세기에 비할 사람이 없을 만큼 명성을 누린 사람이, 임종 때 문간방에는 제자들이 가득하고, 거실에는 친구들이 가득하며 침실에는 한숨과 흐느낌으로 가득해야 할 그런 사람이, 홀로 쓸쓸히 늙은 시종의 품에 안겨 늙은 가정부의 손을 잡고 죽어갔다는 사실입니다. 시종에게는 아름다운 경험이고 가정부에게는 숭고한 경험이지만 죽어가는 당사자와 나아가 인류에게는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 91쪽)
 
   

 

  또 하나, 장례식에서 또는 추모모임에서 고인을 기리는 연설을 하면서 죽은 이에 대한 기억을 같이 나누는 문화는 참 부럽다. ‘미스터 후아유’라는 코미디 영화에서도 잠시 그런 생각을 해봤던 적이 있었는데, 통곡과 함께 고인에 대한 아쉬움과 슬픔을 나누는 우리 문화도 그 의미는 남다르지만 앞서 말한 문화도 장점이 많은 것 같다. 뒤마의 이 들라크루아에 대한 연설과 함께 청중들은 또 얼마나 그를 떠올리며 웃고 눈물지었겠는가. 그런 장면을 생각하다보니 유치하지만 내가 죽으면 누가, 나에 대해서 어떻게 말할 것인가 궁금해졌다. 과연 나에게도 뒤마와 같은 친구가 있을지. 또한, 내가 그들에게 어떻게 기억에 남는 존재였을지.

  여백이 많은 책이기에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볼 여지 또한 많았다. 책을 덮고 나니 들라크루아의 그림들을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뒤마의 글을 읽고 싶어졌다. 또, 그들과 같은 우정을 나누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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