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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 1 - 짧은 제국의 황혼, 이문열의 史記 이야기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초한지는 흔히 삼국지연의와 비견된다. 하지만 그 원류를 따지자면 흔히 초한지로 불리는 항우와 유방의 쟁패를 담은 이야기가 먼저다. 예를 들어, 삼국연의에 등장하는 조조가 서서의 어머니를 붙잡아두고 위협하던 장면은 초한지에서 항우가 모친을 붙잡아 왕릉을 협박하는 장면과 닮았다. 그리고 제갈량의 임종을 지키던 이가 제갈량에게 차기 승상을 묻는 장면은 초한지에서 여후가 병석에 누워있는 유방에게 차기 재상을 묻는 장면과 꼭같다. 초한지의 에피소드의 상당부분이 삼국연의의 저자에게 영감을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굳이 초한지와 삼국연의의 관련성을 찾지 않더라도 초한지는 그 자체만으로도 매력이 넘친다. 우선, 등장인물의 캐릭터가 분명하고 대립관계가 명확할 뿐만 아니라 이야기전개도 짧은 시간에 엎치락뒤치락 변화가 무쌍하기 때문에 박진감이 넘친다. 삼국지에 식상함을 느끼던 찰나 초한지를 찾게 된 이유는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다.
어려서 읽을 때는 잘 몰랐는데 이제 와서 다시 초한지를 읽어보려고 하니 제대로 된 번역본이 흔치 않았다. 크게 보아 정비석, 유재주, 김홍신, 이문열 씨가 내놓은 책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모두 마뜩하지 않았다. 어떤 것은 자극적인 소재에 치우쳐 대국을 놓치고 있었고, 어떤 것은 단순한 번역본에 그쳐서 어떤 울림을 주기에는 부족했다. 그나마 이문열 씨의 책이 새로 나와 시선을 끌었지만 이 또한 만족스럽지 못했다. 일단, 초한지를 '사기 이야기'라는 이름을 붙여 욕심을 내는 바람에 시작도 뜬금없이 느껴졌고 마무리도 마찬 가지었다. 초한지와 같은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의 중간 중간에 전후역사를 삽입하여 너무 느슨하게 만들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시황제 말부터 유방사망까지 집중해서 빠르게 전개했더라면 어땠을까 싶었다. 비유하자면 항우와 유방의 치고받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아버지 앞에 모여 앉았는데, '삼황오제가 설라무레~'하며 한껏 아는 척을 늘어놓으시는 꼴이랄까. 아무튼 다른 사람에 의해 새로운 초한지가 번역되어 나올 때까지 이문열 초한지는 그런대로 반사이익을 누릴 듯싶다.
사람들이 삼국지나 초한지에서 느끼려고 하는 것은 보통 처세술이나 용인술이다. 극도로 혼란스럽고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생존방법과 그 혼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인간관계술이, 학교에서 살아남고 직장에서 버티고 각종 경쟁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고자하는 현대인의 열망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초한지를 읽고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것이야 자유지만 사회적으로 권하는 것은 아닌 듯싶다. 예전에 신문광고에서 이문열 삼국지를 소개하면서 '수능, 논술 필독서'라는 광고 문구를 단 것을 보고 순간 멍해져있었던 기억이 난다. 도대체 그 어린 학생들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어른들의 이런 욕심에 대한 응답이 초한지 10권이고, 그런 의미에서 10권이 이 책의 백미다.
항우가 죽고 전쟁이 마무리되면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믿었던 나에게 10권의 혼돈은 허무 그 자체였다. 크고 작은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유방에게 천하를 안겨주었던 한신과 경포와 팽월은 비참하게 죽고 말았다. 또한, 유방의 죽마고우였던 노관은 쫓겨 갔으며 유방의 오른팔 번쾌는 오라에 묶인 채 압송되어 죽을 고비를 맞는다. 유방이 죽고도 여후에 의해서 다시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갔고, 여후가 죽자 다시 수많은 사람이 그녀를 따랐다. 그래, 그들은 그래도 사서에 이름을 남겼다고 치더라도 '1만 명, 5천명'으로밖에 이름이 남지 않은 장삼이사들의 죽음은 얼마나 헛되고 헛된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는가. 결국 한 사람을 위로 올리기 위해서 수백만이 목숨을 잃었고, 다시 수백만이 생활의 터전을 잃었다. 그리고 함께 천하를 움켜쥐었던 사람들마저 일인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죽는 것을 보면서 쓸쓸함과 허무함을 숨길 수 없었다.
죽음이 쉽게 이야기되고 죽음이 일상이었던 사회, 지금이라고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그때는 눈에 드러나 보일 뿐이고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때처럼 몰인정해져야 되는 것이 지금도 유효한 법칙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법칙을 권하는 사회는 무섭다.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20만 명의 항복한 군사들을 땅에 묻는 항우가 현대에서 다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나는 초한지를 다르게 이해했으면 한다. 물론, 소설에서 창작해내기도 힘든 다양한 캐릭터를 가진 인물 군상들이 등장하는 역사 속의 세계 그 자체로도 멋지다. 그리고 수십 번의 전투에서 항우에게 지고도 끝내 대세를 바꾼 유방의 인내와 노력. 그토록 인간적으로는 여렸던 항우가 현실에 부딪히는 과정에서 보여준 혹독한 모습들과 몰락 또한 반면교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초한지를 읽히며 강권하는 그 처세술과 인간관계술이라는 것을 넣어둘 때가 되었다. 제일 좋은 것은 초한지 그 자체로 느끼는 것이겠지만 배우려거든 세상이 권하는 것과는 반대로 배우는 것이 어떨지. 20대에 다시 읽은 초한지가 그런 의미에서 너무나 새로웠다. 사족으로 내가 40대에 다시 초한지를 읽는다면 그때는 또 어떻게 생각이 바뀔지 또는 바뀌지 않을지 궁금하고 불안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