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룡 - 설득과 통합의 리더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유성룡의 인생은 전쟁과 함께 불타올랐고, 전쟁의 끝남과 함께 빛을 잃었다. 그가 이순신을 조정에 천거했기 때문일까. 유성룡과 이순신의 말로는 너무나도 닮았다. 7년에 걸친 전쟁이 끝나가자 유성룡은 조정에서 탄핵을 받고 파직된다. 그리고 유성룡이 조정에서 쫓겨난 바로 그 날,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숨을 거둔다. 두 사람이 전쟁 중에 세운 공에 비하면 너무나도 서글픈 결말이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파멸에 깊게 개입되어 있는 사람이 바로 선조였다. 나는 유성룡의 업적에 대한 호의적인 고찰인 이 책을 읽는 내내 화가 났다. 유성룡에 대한 반감 때문이 아니라 바로 선조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살피기 위해서는 그가 살던 시대를 살필 수밖에 없는데, 조선시대는 왕조시대이므로 유성룡의 삶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선조를 끊임없이 만나야만 했다.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선조는 내가 아는 한 최악의 임금이다. 나는 조선후기의 난맥상의 일차적 원인이 선조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체제는 모순이 있기 마련이고, 누적되는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면 무너지기 마련이다. 임진왜란은 조선전기 200여 년간 누적된 모순들이 총체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물론, 임진왜란 자체는 외부의 힘에 의해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 전개 과정을 보면 내적 모순들의 분출을 볼 수 있다. 집권층의 병역기피, 공납제도의 불합리, 사대주의에 입각한 주변국에 대한 정보수집과 외교의 실패, 전면전에 적합하지 않은 제승방략 체제의 고수, 조정내 당파의 형성 등 해결을 요하는 문제들이 임진왜란이라는 외부의 침입과 함께 거칠게 표출된 것이다. 하지만 선조는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도 없었고, 죽는 순간까지 이런 문제의 존재 자체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오직 자신의 목숨과 왕권을 지키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그가 제일 먼저 보인 행동은 파천이었고, 이런 무책임한 모습은 백성들의 반감과 비웃음을 살 수밖에 없었다. 왜군이 도성에 이르기도 전에 궁궐이 타버린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선조의 과오가 소심함에만 그쳤다면 그나마 다행이었겠지만, 그에 더해 파렴치하기까지 했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도망친 것에 대한 자괴감은 자신과는 반대로 백성들의 찬사를 받던 전쟁영웅들에 대한 질시로 나타났다. 김덕령과 유성룡, 이순신의 슬픈 말로는 선조의 시기심의 발현이었다. 조선 후기의 극심한 당쟁과 민심의 이반이 선조의 무능력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저자가 유성룡의 업적을 말하기 위해 자주 인용한 기록은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그리고『서애선생 연보』나 『서애유사』이다. 실록은 그렇다고 쳐도 『연보』를 쓴 정경세는 유성룡의 문인이며, 『유사』의 저자인 허목은 숙종 때의 인물로 유성룡과 같은 남인인데 어느 정도까지 신뢰해야 할 지 의문이다. 스승이나 같은 당파의 인물의 공을 치켜세우는 것은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최소한 양반 또한 군역을 지게 하는 속오군, 공을 세운 천민에게도 벼슬을 주는 군제개혁이나 공납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한 작미법을 주창한 점 등의 업적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이러한 제도들이 전후 그의 실각과 함께 유야무야 돼버렸지만 유성룡의 진정성과 혜안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표면 위로 드러난 체제의 모순들을 명확히 알고 있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시대를 꿰뚤어보고 비전을 제시한 것이다. 또한, 이순신과 권율 등을 천거하여 전쟁에 대비하게 한 점도 그의 뛰어난 인재발탁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하나, 유성룡이 보여준 위대함은 유연한 사고와 융통성이다. 그는 보통 남인으로 분류되지만 당파에 기울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의 유연한 사고는 교조화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다양한 대안과 비전을 제시할 수 있게 했다. '새는 양쪽 날개로 난다'는 말이 있다. 진보와 보수가 양립하여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국가 발전에 유익하다는 말이다. 나는 거기에 덧붙여서 '양 날개를 움직이는 것은 머리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진보와 보수의 여러 목소리가 나올 수 있지만 최종적으로 국가가 나가야할 길은 그 둘의 의견을 종합하여 화합시키는 비전을 제시하는 지도자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유연성을 발휘하는 통합적이고 중도적인 인물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만약 있다고 하더라도 보수와 진보 양 쪽의 공적이 되어 제거되는 일이 많았다. 김구와 여운형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입만 열면 '빨갱이 새끼들'이니 욕을 하는 극우파는 그렇다 치더라도, 다양한 목소리가 분출되는 것이 건강한 사회라고 주장하는 진보적 인사들조차도 조금만 다른 의견을 내세우면 회색주의자니 변절이니 몰아세우는 일이 많다. 새는 양쪽 날개로 날아야 한다는 말이 단지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기 위한 말잔치는 아닌가 의심스럽다.


  사회를 어느 한 편으로 끌어가려고 해서는 문제는 해결될 수 없고 오히려 반대편의 반발로 인해서 극심한 혼란을 야기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지도자는 양 측의 견해를 모두 들으면서도 융통성과 유연한 사고를 하는 중도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개방성 안에서 새로운 비전과 방향이 제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성룡은 그 혼란한 시대에 이런 지도자상을 보여준 인물이다.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졌던 시대가 이제는 좌파와 우파로 갈라져 날마다 서로에게 분노의 펀치를 날리고 있다. 누구 하나 먼저 쓰러지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기세다. 누군가가 2MB각하를 '신보수'라고 규정짓고 '실용주의'를 말하며 그에게 유연함을 기대했지만, 결과는 그 또한 '꼴통'에 지나지 않았다. 겪어봐야만 아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이 시대에 유성룡이 그리운 이유는 그와 같은 유형의 지도자만이 현재의 난국을 해결하고 좌우를 아우르며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기심에 찬 선조와 기득권 유지에 급급한 당인들이 유성룡를 내쳤듯이, 그런 지도자가 나타난다손 치더라도 '빨갱이'와 '가짜진보'라는 모순된 꼬리표를 달게 한 채로 우리 손으로 내치지는 않을지‥.


  사실 예전에는 유성룡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었다. 악플보다 무플이 더 무섭다고들 하는데, 유성룡에 대한 나의 관심은 '무플'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징비록』과 이 책을 읽으면서 유성룡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순신도 유성룡이 아니었다면 빛을 보지 못하고 역사에 묻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이 책은 엄격한 의미에서 평전이라기보다는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대와 유성룡의 대응을 집약해서 보여준다. 하지만 시대와 주변 인물에 대한 설명이 유성룡과 유기적으로 결합하지 않은 느낌도 든다. 또, 나는 대체로 저자의 평가에 동의하는 편이지만, 유성룡과 남인에게 편파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유성룡을 비판하는 글에 대해서는 김장생의 왜곡사례 등을 들며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있지만, 유성룡을 칭찬하는 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 측면이 그렇다. 칭찬하는 인물이 남인은 아니었는지, 유성룡의 문하생은 아니었는지 그런 점을 충분히 감안하게 해주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리고 약간의 오타를 보았는데, 56쪽 첫째 줄의 1591년은 1590년이 맞을 것 같고, 79쪽 끝에서 두 번 째 줄의 '유성룡'은 '이순신'으로 바꾸는 것이 맞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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