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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 리브로 / 1998년 7월
평점 :
품절
정권이 바뀌어도 같은 자리에 계속 앉아 있는 정치인들이 있다. 정견은 애매모호하고, 과거전력이 문제가 되면 '젊은 날의 실수'쯤으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간다. 우리는 오래 사는 사람을 '생존능력 최강의 인간'이라고 부르며 인정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왜 이런 정치적 '수명'이 긴 인물들을 '정치적 인간'이라고 부르며 나름의 인정을 해주는 것일까. 왜 겉으로는 그의 변절을 흉보면서도 '정치적'이라는 수사를 붙여 미화해주는 것일까. 진정 정치를 잘하는 '정치가'들이 억울해서 가슴을 칠 일이다.
이런 역설적 '정치적 인간'의 전형이 바로 조제프 푸셰다. 그는 역사가 한 순간에 들어올려져서 요동쳤던 프랑스 혁명기의 사람이다. 혁명과 반동, 공화정과 왕정이 맹렬히 싸우던 그 시대에 사실 제 한 목숨 건사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었다. 당통, 마라, 데물랭, 로베스피에르, 나폴레옹 등등. 수많은 영웅적 인물들이 순식간에 들어올려졌다가 무참하게 내팽개쳐졌다. 하지만 혁명의 처음부터 루이 18세의 집권으로 왕정으로 돌아간 시기까지 내내 자리를 지켰던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푸셰다.
그는 완벽한 이기주의자였다. 남보다 자기 자신을 아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철저히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만을 사랑했다. 정치인의 본분인 '사회의 희소한 자원을 배분하는 일'이나 '국리민복'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오직 권력을 잡기 위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때문에 어떤 정견에도 묶이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았다. 그가 충성했던 단 하나의 대상은 '권력'이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늘 모호함을 유지했고, 역사가 칼날을 들이대고 선택을 강요하면 늘
'다른 사람이 대신 피를 흘림으로써 결말이 났다.(본문 120쪽)'
실로 대단한 정치적 생존력을 가졌지만 그의 말년은 우울했고, 그의 죽음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았다.
이렇게 '찰나'만을 생각하는 정치인 푸셰는 죽었지만 우리는 지금도 푸셰의 아들 손자들이 당당히 여의도를 활보하는 것을 보게 된다. 탁월한 저자 슈테판 츠바이크는 푸셰가
'한번도 이상에 봉사한 일 없이, 인류의 도덕적인 정열에 헌신한 일도 없이 언제나 찰나와 인간 사이의 사라져버리기 쉬운 덧없는 총애에만 봉사한 죄값(본문 335쪽)'
을 치러야만 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역사의 힘을 긍정하며 푸셰를 조롱하지만 사실 나는 푸셰와 같은 인물에 대한 '역사의 처벌'에는 관심이 없다. 이 '정치적 인간'들이 누릴 것은 다 누리고 말년에 약간의 외로움을 겪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무엇인가 말이다. 역사의 복수치고는 너무 가볍지 않은가. 나는 오히려 이 득시글한 푸셰의 소굴에서 정말 제대로 된 '정치적 인간'을 보고 싶다. 애매모호한 중립이 아닌 중용의 덕을 갖춘 진정한 정치가를 보고 싶다. 왜 푸셰와 같은 인물들이 '정치적'이라는 수사를 독점해야 하는가. 그들로 부터 그 부당한 이름을 뺏어서 그들에게 달아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역사의 힘이다.
고명섭씨의 『광기와 천재』라는 책의 푸셰에 대한 꼭지를 읽고 그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서 선택한 책이다. 물론, 슈테판 츠바이크라는 저자에 대한 믿음도 큰 몫을 했다. 하지만 책을 다 일고 난 지금은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문장은 술술 읽히지 않지만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만드는 맛이 있다고 기억한다. 지금까지 읽은 그의 책들은 그랬다. 하지만 이 책은 번역의 문제일까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일까 왠지 뭔가가 부족하게 느껴진다. 투박한 책의 편집도 그렇고, 에너지나 활력이라는 단어를 쓰면 될 것을 굳이 '에네르기'라고 한 부분도 그렇고, 저자와 책의 이름을 깎아 먹는 부분이 많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