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어 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7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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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중 셰익스피어의 4대비극에 속하지 않는것은?' 하고 묻는 객관식 질문에 고민하지 않고 정답을 찍어낼 수 있고, 네 작품의 줄거리도 줄줄 말할 수 있으면서, 정작 제대로 읽은 작품은 몇 되지 않는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서가에서 <리어왕>을 꺼내어든 것은 바로 그 부끄러움을 타개하고자 하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 결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리어왕>이 원래 이렇게 어려웠었나? 책을 읽는 내내 '참 어렵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주인공들의 대사가 착착 감기지 않고 붕붕 뜨는 느낌이랄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아 몇번이고 되풀이해서 읽어야 했다. 셰익스피어는 당대에도 인기를 얻었던 작가인데, 어떻게 이렇게 말이 어려울 수 있을까. 새삼 배신감이 들면서 책을 놓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책을 붙잡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그 매력은 서사의 보편성이 아닐까 싶다. 물론 주인공들은 지금과는 동떨어진 시대의 왕과 왕비, 공작과 백작, 하인과 주인들이지만 그들이 뭉치고 흩어지며 쏟아내는 이야기들은 지금과 많이 다르지 않다. 그들의 분노와 갈등, 배반과 결탁, 증오와 사랑. 그 감정들의 양상은 안방극장을 장악한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와 별반 다르지 않고, 우리의 삶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셰익스피어가 당대에도 인기를 얻고, 사후 5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명성을 얻고 있는 이유는 그가 인간에 대해서 포착하고 이해한 것들이 너무도 정확해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극 중 리어는 브리튼 왕국의 위엄과 의지를 한 몸에 갖춘 존경받는 군주지만 그도 '사랑받고 싶어하고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어서 보여주는 리어의 '분노와 저주'는 모든 이성적 판단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 상황을 파국으로 몰아간다. 예상치 못한 '배반과 음모' 그리고 그 와중에서도 변치 않는'사랑과 충성'. 시공간적인 배경만 달리하면 이것이 500여년 전의 고전이라는 사실을 누가 믿겠는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한 '코딜리아'를 버리고, '리간'과 '고너릴'의 달콤한 말에 속은 리어를 보니, 외양과 말에 현혹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감언이설에 속아, 일생을 통해 쌓아왔던 권력과 부와 명예를 한 순간에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흔한지. 아직까지도 그런 사람들이 신문 1면에 등장하고 후회와 눈물로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으켜보지만, 비슷한 일은 1년 후에도 10년 후에도 일어날 것이다. 아무것도 꾸미지 않은 '쌩얼'에 대한 감탄과 찬사가 이어지더니 언제부턴가는 '쌩얼 화장법'이 등장했다. 아무것도 꾸미지 않은 본연의 모습인 '쌩얼'에 대한 추종이 오히려 꾸미지 않은 듯한 화장법의 유행을 불러왔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인류의 역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누군가는 속이고 누군가는 속을 것이다. 사람의 진심을 보는 눈을 갖추기 전까지는.

  좋은 글이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고전이란 시대를 초월하여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글이 아닐까한다. 그런 의미에서 <리어왕>은 지금도 낡지 않은 대중성있는 작품이다. 아직까지도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연극과 영화, 음악, 소설을 통해서 여러 사람에 의해 변주되고 있다는 것만 봐도 그 보편성을 알 수 있다. 그 고전을 희곡으로, 또 우리 말로 읽는다는 것의 의미가 크지만 오히려 말의 어려움이 대중성을 반감시키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패러디물을 보고 재미를 얻은 누군가는 셰익스피어의 진면목을 확인하기 위해 이 책을 찾을 것이다. 가는 길이 멀고 어려워서 찾지 않을 수도 있지만, 찾아갈 고향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가치있을 것이다. 이 책이 한국인을 위한 셰익스피어의 고향으로 남아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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