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교육
로맹 가리 지음, 한선예 옮김 / 책세상 / 200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책날개의 로맹 가리의 사진이 참 인상적이다. 고집스럽게 꽉다문 입과 콧수염. 짙은 눈썹. 화룡점정! 그의 얼굴에 중절모가 어울려 특유의 카리스마를 더한다. 소설의 제목에서도 그의 카리스마와 재치가 풍긴다. '유럽의 교육'이라니! 그 전쟁통의 비참함에 대한 역설적인 제목은 초반부터 독자를 휘어잡는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한다.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유럽의 교육'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아담 도브란스키의 것으로, 전쟁의 광기와 학살, 그 비참함 속에서도 결코 중요한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절대적으로 사라지지 않는 '희망'이라는 것의 존재를 이 참극이 궁극적으로 드러내줄것임을 믿는다. 그에게 이 전쟁은 시련이며 교육과정이다. 그리고 이 광풍이 지나가면 희망과 평화가 도도하게 드러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또하나는 야네크의 것이다. 그는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전쟁과 증오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전쟁은 세계에 대해 순수와 희망을 품은 자들을 현실의 비참함과 회의에 대한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교육'으로 이해한다.  소설은 비참하고 우스꽝스러운 전쟁 속의 폴란드를 비추면서도 이 두사람의 시각을 교차하며 보여준다.

  사실, 이념과 사상은 인간에게 더 큰 이익과 행복을 주기 위해 발명(?)되었지만 그것들은 어떻게 이용되었는가. 인민의 무한 평등과 이익의 공평한 분배를 부르짖었던 공산주의는 이념에 반대하는 자들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고, 최소 자본의 최대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는 빈자의 비참한 삶을 방관했다. 무슨 주의며 무슨 사상은 인간의 삶의 행복을 보장하는 수단이 되지 못하고 그 목적이 되어 무수한 광기와 허무를 방관해왔다. 오히려, 그 광기의 변명이 되고 그럴듯한 명분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야네크는 말한다.
 

…세계 구석구석에서 사람들이 유럽을 찾아와요. 공부하기 위해서요. 하지만 그 유명한 유럽의 교육이 가르치는 것은 결국, 자기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사람을 죽이는 데 소용이 될 만한 그럴싸한 이유들과 용기를 찾아내는 법일 뿐이에요.… (본문 281쪽)


  사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거대하고 거창한 것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사랑하고 먹고 따뜻하게 지내는 것뿐인데, 평화롭게 사랑하는 것, 굶어 죽지 않는 것, 얼어 죽지 않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지구는 둥글며 자전한다든가, 맞춤법이 어떻게 된다든가 하는 것 등 제 나이 또래의 여자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들을 다 깨우치는 것보다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본문 194쪽)


  이 단순한 삶을 얻기가 왜 이렇게 힘이 드는가. 얼마나 더 파괴해야 그것을 얻을 수 있는가. 얼마나 더 '교육' 받아야 '중요한 것'만 고스란히 드러날 수 있는가. 소설 속에서 작가 스스로 이렇게 자문하고 있고, 나 또한 그렇게 묻게 된다. 작가는 이 질문에서 어떤 명확한 답을 주지는 않은 것 같다. 도브란스키의 희망과 야네크의 회의 속에서 야네크의 손을 들어주는 듯 싶지만 결코 도브란스키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도브란스키가 말하는 희망이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삶을 이끌어왔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회의의 끝은 죽음뿐이다. 결국 우리는 끝없는 회의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무의미하게 보이는 걸음을 내딛을 수밖에 없는걸까.

  끝으로,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야네크가 도브란스키를 달래는 장면이었다. 순수한 청년을 닳고 닳은 꼬마가 달래는 풍경. 무언가 잘못되도 대단히 잘못된 우스꽝스러운 장면이지만 웃을 수 없는 비극. 그 장면하나가 소설의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야네크는 이제 불과 열다섯 살이고, 도브란스키보다 열 살이나 어렸다. 하지만 그 대학생을 향한 거의 아버지와도 같은 보호본능이 갑자기 뜨겁게 솟구쳤다. 그는 빈정거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우월하고 세상사에 통달한 듯이 보이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그는 웃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깨를 으쓱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얼마나 많은 꾀꼬리가 필요한 거냐고 신랄하게 묻지 않으려고 애썼다. (본문 282쪽)

  이런 말을 덧붙이면 사족이 되겠지만 번역에 대한 아쉬움을 말하고 싶다. 책을 읽으면서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을 모두 번역의 책임으로 돌린다면 그것은 나의 억지일 것이다. 하지만 도브란스키의 소설 부분이나 몇몇 부분에서 느끼는 어려움은 나의 수준미달이 전적인 이유인것 같지는 않다. 외국인의 말을 들을 때 단어와 문장이 한데 섞여 '후루룩' 들려오는 느낌이랄까. 번역이 나에게는 부드럽지 않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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