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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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정우라는 배우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었는데, 생각보다 깊은 사람 같다. 비싼 운동장비를 갖춘 레저 스포츠가 아니라 두 다리로 걷는 것을 취미로 하는 것도 멋있고, 무엇보다 인생철학이 무척 매력 있다. 확실한 루틴을 가지고 있어서 작은 슬럼프나 루머에 쉽사리 쓰러질 것 같지 않다. 동어반복이 있기는 하나, 밑줄 긋고 싶은 부분이 많았다. 작년 한 해는 연예계에 유난히 사건·사고가 잦았는데, 많은 후배에게 그의 건강함이 귀감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만, 요새 하정우 관련 기사가 많던데 부디 사실이 아니길 바란다. 이 책에서 보여준 건강함과는 거리가 멀다. 휴식을 주는 도구로 프로포폴이 걷기 대신 쓰였다면, 이런 글은 사기이고 기만이다. 사실이 아니라는 가정하에 이 책을 읽었다.)


(밑줄긋기의 쪽수는 종이책이나 e-book의 사용자 동작 환경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길 끝에 이르면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거라 기대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농담처럼 시작된 국토대장정은 걷기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우리가 길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다. 내 몸의 땀냄새,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꿉꿉한 체취, 왁자한 소리들, 먼지와 피로, 상처와 통증……오히려 조금은 피곤하고 지루하고 아픈 것들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별것 아닌 순간과 기억들이 결국 우리를 만든다. - P29

고민이 내 머릿속에서 슬금슬금 기어나와서 어깨 위에 올라타고 나를 짓누르기 시작하면 나는 ‘아, 모르겠다, 일단 걷고 돌아와서 마저 고민하자’ 생각하면서 밖으로 나간다. - P35

나는 나의 기분에 지지 않는다. 나의 기분을 컨트롤 할 수 있다는 믿음, 나의 기분으로 인해 누군가를 힘들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 걷기는 내가 나 자신과 타인하게 하는 약속이다. - P37

걷기는 몸의 균형을 잡아준다. 하루 만 보씩 걸으며 식사량을 아주 조금만 조절해도 한 달만 지나면 살이 꽤 빠진다. 그뒤 식사 조절을 계속하면서 두 달째부터는 만 보에서 만오천 보로 슬쩍 늘려서 걸어본다. 그렇게까지 힘들게 식이요법을 한 것도 아니고 하루종일 운동에만 매달린 것도 아닌데, 체중감량에 가속도가 붙어 다이어트의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P50

지치고 피로한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곧 휴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방기’는 결과적으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누적된 피로를 잠시 방에 풀어두었다가 그대로 짊어지고 나가는 꼴이 되는 경우가 많다. - P66

뭐든 꾸준히 하려면 그것이 ‘특별활동’이 아니라 습관이 되어야 한다. - P69

이것은 꼭 걷기에 관한 얘기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유난히 힘든 날이 오면 우리는 갑자기 거창한 의미를 찾아내려 애쓰고,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의미 없다’, ‘사실 처음부터 다 잘못됐던 것이다’라고 반명한다. 이런 머나먼 여정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최초의 선택과 결심을 등대 삼아 일단 계속 가보아야 하는데, 대뜸 멈춰버리는 것이다. - P86

일정한 곳에 출근하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언제 일이 들어오고 불쑥 스케줄이 잡힐지 모르니 늘 몸을 만들어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느슨하고 여유롭게 사는 보헤미안보다는 중요한 경기를 앞둔 스포츠 선수나 회사의 명운이 걸린 PT를 준비하는 직장인들과 더 닮아 있다. - P131

일탈도, 치기도 없는 약간은 재미없는 삶이라고 누군가는 말할지 몰라도, 나의 이런 하루가 나는 마음에 든다. 지금 여기서 동이 터올 때까지 매일 축배를 들기엔 아직 나는 갈 길이 한참 먼 사람이기 때문이다. - P132

몸에 익은 습관은 불필요한 생각의 단계를 줄여준다. 우리는 때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에 갇혀서 시간만 허비한 채 정작 어떤 일도 실행하지 못한다. 힘들 때 자신을 가둬놓는 것, 꼼짝하지 않고 자신이 만든 감옥의 수인이 되는 것, 이런 것도 다 습관이다. 스스로 키워놓은 절망과 함께 서서히 퇴화해가는 것이다. 하지만 걷기가 습관이 되면 굳이 고민하지 않고 결심하지 않아도 몸이 절로 움직인다. - P173

늪에 빠져들려 할 때는 변덕스러운 감정에 나를 맡겨둘 게 아니라 규칙적인 루틴을 정해놓고 내 몸과 일정을 거기에 맞추는 편이 좋다. 나에겐 일상의 루틴이 닻의 기능을 한다. 위기상황에서도 매일 꾸준히 지켜온 루틴을 반복하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희미하게나마 보인다. - P180

루틴의 힘은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잠식하거나 의지력이 약해질 때, 우선 행동하게 하는 데 있다. 내 삶에 결정적인 문제가 닥친 때일수록 생각의 덩치를 키우지 말고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살다보면 그냥 놔둬야 풀리는 문제들이 있다. - P181

말에는 힘이 있다. 이는 혼잣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결국 내 귀로 다시 들어온다. 세상에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은 없다. 내뱉어져 공중에 퍼지는 순간 그 말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 P204

독서와 걷기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저는 그럴 시간 없는데요’라는 핑계를 대기 쉬운 분야라는 점이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하루에 20쪽 정도 책 읽을 시간, 삼십 분 가량 걸을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 P226

나는 내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위치나 상황에 대한 공포가 있는 것 같다. - P258

배우의 삶에 슬럼프는 꽤 자주 찾아온다. 슬럼프에 익숙해져야 한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넘어지고 좌절하는 날들에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이러한 슬럼프를 많이 겪어보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경험일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을수록 이러한 슬럼프들은 나를 더 휘청거리게 하고, 다시 일어서는 데 더 오랜 시간을 소모하게 한다. 내가 아직 견디고 배울 힘이 남아 있을 때 찾아온 슬럼프는 실패가 아니라 나를 숙련시켜주는 선생님이다. - P303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위기와 절망 속에 있을 때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나는 때로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노력이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한다. 어쩌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도 모른 채 힘든 시간을 그저 견디고만 있는 것을 노력이라 착각하진 않는지 가늠해본다. - P313

그 상태에 오래 머물면 어떤 사건이 혹은 어떤 사람이 나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망가뜨리는 지경에 빠진다. 결국 그 늪에서 얼만큼 빨리 탈출하느냐, 언제 괜찮아지느냐, 과연 회복할 수 있느냐가 인생의 과제일 것이다. 나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든 지속하는 걷기, 직접 요리해서 밥 먹기 같은 일상의 소소한 행위가 나를 이 늪에서 건져내준다고 믿는다.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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