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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3 - 후한.삼국 시대.오호십육국.위진남북조 : 군웅과 패자 ㅣ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3
진순신 지음, 이수경 옮김 / 살림 / 2011년 7월
평점 :
오래 전에 사놓고 이제서야 읽는다. 책장은 빛을 바래있고, 여러 차례 읽으려고 시도했던듯 흔적이 남아있었다. 사실 삼국지 영웅들 이야기를 읽고자 후한말까지 부리나케 읽었다가 더 진도가 나가는 것은 실패했었더랬다. 책장을 덮은 지금도 서진(西晉) 이후의 시대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다. 혼란의 시대라, 왕가의 자제로 태어나는 것도 이름 없는 민초로 사는 것도 괴로운 시절이었던 것 같다. 불교와 도교가 전성을 이루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남의 나라 역사에 대해 해박하게 알고 있을까 감탄하며 읽었지만, 오타가 너무 많다. 처음에는 숫자를 세다가 너무 많아서 포기했다. 출간 이후에라도 관심을 기울여서 지속적으로 보정하는 작업이 있었으면 한다. 이제 4권을 바로 읽게 될까? 아무래도 또 여러차례 전진과 퇴보를 계속할 듯하다.
유적과 부곡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슷한 처지의 패거리가 둘로 갈려서 유적이 호족을 위협하면 부곡이 그것을 막았다. 하지만 실제로 싸우는 두 무리는 비슷한 신세였다. - P11
제위에 오른 이듬해 광무제는 아내인 곽씨의 외숙 유양을 모반을 꾀했다는 죄목으로 처형했다. 후한의 정사인 『후한서』는 당연히 광무제에게 유리하게 기록했다. 거기에 모반이라 적혀 있는데 주살의 이유로 이보다 나은 것은 없다. 한왕조 부흥이라는 점에서 보면 준황족이나 그 방계인 광무제 유수보다 황족인 진정왕 유양 쪽이 훨씬 한나라 황실 혈통에 가깝다. 더구나 광무제로서는 ‘이 사람 덕분에 천하를 얻었다‘는 일종의 빚 같은 것을 느꼈을것이다. 만일 그가 사라져 준다면 광무제도 마음이 편했을 터였다. 적미군의 간부 중에서도 번숭(樊崇)과 봉안(逢安)은 일단 용서했다가나중에 ‘모반‘이라는 죄목으로 처형했다. 어쩌면 두 사람 모두 광무제에게 위험한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천하를 얻는 일이 결코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 P39
속담에 이르기를 귀(貴)해지면 친구를 바꾸고, 부(富)해지면 아내를 바꾼다 하였소. 이것이 인정(人情)이 아니겠소?
대사공이 되고 열후가 되었으니 아내를 바꾸면 어떠냐, 그것이 인정이 아니냐는 뜻이었다. 이에 송홍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신이 듣건대, 빈천의 벗은 잊어서는 안 되고, 조강의 처는 당(堂)에서 내려가게 해선 안 되는 줄 아옵니다.
가난한 시절의 친구는 잊어서는 안 되며, 밀기울과 쌀겨만 먹고 고생을 함께한 아내는 집에서 내쫓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광무제는 병풍 뒤에 있는 누이를 향해,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단념하는 수밖에요. 라고 말했다.
함께 오래 산 마누라를 흔히 ‘조강지처‘라고 일컫는데, 이는 송홍의 일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예교 시대였던 후한에서 송홍 같은 사람은 요컨대 시대의 모범생이라 할 수 있겠다. - P82
귀경에 즈음해서 후임 서역도호인 임상(任尙)이 조언을 청했을 때, 반초는 물이 맑으면 물고기가 없다‘는 『공자가어(孔子家語)를 인용해, 사소한 잘못에는 관대하고 대강을 파악하고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타일렀다. 반고가 떠난 뒤, 임상은 친구에게 "반초에게는 기묘한 꾀가 있을 줄 알았는데 지극히 평범한 말만 해줬다"고 말했다 한다. 반초는 후임인 임상이 너무도 엄격하고 더구나 성급한 것을 걱정했던것이다. 애초에 기책을 바라는 마음가짐이 좋지 않았다. 반초의 생각대로 임상은 서역에서 민심을 장악하는 데 실패했다. 서역은 다시 어지러워졌고 임상은 소륵에 포위되었다. - P103
진식에게는 또 한 가지 속담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느 해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고생하고 있는데 어느 날 밤 진식의 집에 도둑이 들어 대들보 위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 챈 진식은 아들과 손자를 불러놓고 위엄 있고 엄숙한 몸가짐으로 일장 훈화를 늘어놓았다.
무릇 사람은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선하지 않은 사람도 반드시 근본이 나쁜 것은 아니다. 평소의 잘못된 버릇이 습관이 되어 나쁜 짓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저 들보 위의 군자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대들보 위에 숨어 있던 도둑은 놀라서 뛰어내려와 벌을 받겠다고 했으나, 진식은 잘 타이르고 비단 두 필을 주어 보냈다. 그 후 그가 다스리던 태구현(太도縣)에는 도둑이 끊겼다고 한다. 이 일화가 유명해져 도둑을 양상군자(梁上君子)‘라고 부르게 되었다. - P177
손권을 화나게 만든 것은 외교의 실패였고, 자기편 간부에게 불만과 공포심을 갖게 한 것은 내정의 실패였다. 엄격한 눈으로 보면 관우의 길음은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 P258
예로부터 허무를 존중하는 노장사상이 번성한 것을 서진 멸망의 한 원인으로 꼽는 설이 있다. 그러나 사상이 나라를 망하게 하지는 않는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사람이다. 왕연 같은 사람은 고향인 낭야에서 책과 가야금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며 노장 사상에 젖어 있는 게 나았다. 명문출신이면 무조건 정부 고관이 되는 인사제도에 문제가 있었다고 할수밖에 없다. 석륵은 흙벽을 무너뜨려 왕연 일행을 깔아 죽였다. - P381
북위-서위-북주-수-당. 역사의 주류는 이렇게 흘러갔다. 이 흐름의 원인이 군대의 조직화에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북주가 주(周)‘를 국호로 선택한 것에서도 살필수 있지만, 고대의 성스러운 왕조인 주(周)에서 그 이상을 구할 마음이었다. 우리는 부견과 효문제의 과도한 이상주의에 큰 위험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상(理想)이 전혀 없는 정권은 그 이상으로 위험하다. 위험이라기보다는 뼈대가 없어 약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북제는 힘의 움직임에만 눈을 빼앗겼다. 후경의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공신 주살이나 파벌싸움 같은 힘의 조작에 모든 기력을 쏟아 부었다. 『주례(周禮)』에 따른 관제(官制)를 시행한 북주는 그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상을 내걸었다는 점이 무형(無形)의 힘이 되지는 않았을까? - P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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