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영혼의 동반자'에서

                                                                                                                  채준호, 바오로딸

-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랑을 받는 것이 주는 것보다 쉽다고 생각하겠지만 심리학적으로 보면 사랑을 받는 것이 더 어려울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이 타인에게 사랑을 줄 때는 사랑을 언제, 어떤 방법으로, 얼마만큼 베푸는가에 따라 선택할 여지가 있기 때문에 관계 안에서 자신이 조종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상대방으로부터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상대방에게 자신을 맡겨야 하고 전적으로 신뢰해야 하며, 자신을 완전히 열어놓아야 한다. 자신을 개방한다는 것은 언제나 상처를 입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사랑을 받는 것은 주는 것보다 신뢰하는 능력이 커야 가능하다.

-자립심이 약한 사람들은 인간관계를 맺는 방법도 조건적이다. 당신이 나의 욕구를 채워주면 나도 당신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겠다는 내적 태도 때문에 인간관계를 오래 지속시키지 못한다. 특히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맞추지 않으면 인간관계가 끊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을 정직하게 드러내기가 힘들고, 상대방이 자신을 이용하는 관계 안에 그냥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의존적으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사랑받기 위해 더욱 상대방에게 민감해져야 하겠다.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나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의 방식을 수용하고 신뢰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 나약한 나로서는 지치지 않고 사랑을 주기 위해 받을 줄도 알아야 하니까... 그리고 정직하게 나를 드러내기. 그로 인해 상처받더라도 돌아서서 잊어버리기. 준 사랑은 오래 기억하지 말기. 받은 사랑은 잊어버리지 않기.  이제서야 사랑을 주고받는 방식을 배워가는, 사랑의 길의 어린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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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본성은 참으로 야릇하다고 데레사 성녀께서도 말씀하셨다.

 +온갖 수단을 다 썼으나 아직도 세속에 머물러 있는 자신을 보고 그녀의 영혼은 고뇌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나는 고뇌의 대양 속에 잠겨 있으면서도 하얀 비둘기로 장식된 예쁜 파란 모자를 처음으로 써보고는 기뻐했지 뭡니까! 우리 본성의 변덕스러움이란 얼마나 야릇한지요!"

 나야말로 야릇한 본성의 집합체란 생각이 요즈음 자꾸만 든다. 내 안에는 참 별게 다 들어있다. 그렇지만 이런 내가 못견디겠던 시기는 넘겼나보다. 이런 내가 그럭저럭 봐줄만 하다. 어찌 생각하면 내 안에서 공격성이 줄어들면서 그 에너지가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인정을 바라는 에너지(신랄하게 말하면 성적 에너지)로 바뀌었나 하는 생각도 들고... 공격에너지와 성적에너지의 합은 보존되는 것일까?  '공.성 에너지 합의 보존 법칙'이라는 가설을 세워볼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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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善若水(상선약수)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水善利萬物而不爭(수선리만물 이부쟁) 물은 선하여 만물을 이롭게 하며 다투지 않고,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처중인지소악 고기어도) 사람들이 꺼려하는 곳에 머물기 때문에 道에 가깝다.

居善地 心善淵 璵善仁 言善信(거선지 심선연 여선인 언선신) 거함에는 땅이 좋고, 마음은 깊은 것이 좋고, 사귐에는 어진 것이 좋고, 말에는 신의가 있는 것이 좋고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정선치 사선능 동선시) 정치는 다스려지는 것이 좋고, 일은 잘하는 것이 좋고, 움직임은 때에 맞아야 좋다.

夫唯不爭 故無尤(부유부쟁 고무우) 물은 오직 다투지 않기 때문에 허물이 없다.(?)

*마지막 줄에서 한자나 번역 둘중 하나가 틀렸을텐데, 언젠가 확인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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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내가 내 생애를 다시 살 수 있다면, 나는 항상 아기 예수의 손을 잡고 있는 아주 작은 아이가 되고 싶습니다.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

-성숙한 덕은 어린이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노자, BC7세기)

-덕이 높은 사람이란 어린이의 마음을 잃지 않는 자이다.(맹자, BC 7세기)

-사내다운 덕을 실천한다 함은 항상 선의 길에 나아가는 것이며 어린이로 돌아가는 것이다.(도덕경)

 

-사람들이 내 노력을 참작해 주고 내가 진보하는 것을 알아보아 주기를 바란다고 했더니, 데레사 수녀는 즉시 다음과 같이 엄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알을 낳자마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알리는 암탉을 흉내내는 것입니다. 암탉처럼 당신은 자기가 잘했거나, 혹은 자신의 지향이 나무랄 데가 없을 때는 모두가 그것을 알고 당신을 존경하기를 원합니다... 이들은 각자 자기의 작은 틀 안에서 제각기 자기들의 의향, 건강, 가족, 영적 진보, 또는 개인적 이해관계를 생각하고, 때로는 다소 좋지 않은 말들을 하기도 하는 사람들인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천국에서만 사랑받고, 존경받기를 원합니다. 거기에서만 모두가 완전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 '멸시받는 것'조차 저에게는 과분한 영광입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멸시하기 위해서는 그를 생각해야 하니까요. 작은 모래알은 '잊혀지기'만을 열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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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행을 실천하지 못하게 될 때 결코 그것을 병이나 기후, 또는 슬픔 같은 어떤 자연적인 이유 떄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당신은 거기서 커다란 비하의 재료를 끌어내고, 당신 자신을 '작은 영혼들' 가운데에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런 나약한 방법으로밖에는 덕행을 실천할 수 없으니까요.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영웅적 덕행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당신의 승리에는 언제나 얼마만큼의 실패가 섞여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언제나 당신을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의 이득입니다. 자기는 불완전하다고 믿고 남들은 완전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행복입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덕이 없다고 생각한다 해도 그것은 당신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아 가지 않으며 당신을 더 가난하게 하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내적 기쁨을 잃는 쪽은 다른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이웃의 선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감미로운 것은 없으니 말입니다. 당신을 불리하게 판단하는 사람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당신이 그것으로써 하느님 사랑을 위해 겸손해진다면 당신에게는 그만큼 더 좋은 것입니다.

                                                                                                       아기예수의 성녀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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