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리뷰에서 '그렇게 사는 것이 옳아서 라기 보다는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인간. '자유'라는 낙인이 찍힌 또하나의 카인.' 이라는 글귀가 마음을 '때린다.'

모두다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어서 그렇게들 살고 있는 것 아닐까... 태어날때부터 프로그램되어 있나? 혹자들이 말하는대로 사주팔자대로...? 하느님을 믿으며 사는 사람들이나, 부처님을 따르며 사는 사람들이나, 무신론자들이나 중생들의 삶의 방식은 거기서 거기고 그러면서 또 각각 다르고... 수도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또 각각 달리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어서(그게 마음 편하니까) 그렇게 사는 걸거다.

요즈음 책만 읽으며 사는 삶(하루종일 책만 읽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을 내가 왜 피하려 하고 사람들 속에 섞여 들어가야 한다고(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하는 걸까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결론은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나로 하여금 책만 보고 있지 못하게 말린다는 것이다. 실천을 강조하는 책들이 내 마음에 와닿으니... 틱낫한 스님의 '화'에서, '모든 것은 변한다. 내가 서 있는 유일한 토대는 '행위'뿐'이라는 대목이나, 성서에서 이웃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는 부분이나, '모리와 함께 한 마지막 화요일'에서 가족사랑과 자신이 소속된 지역사회와 공동체에 헌신하기 등.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했던, 때때로 내가 그다지 원치는 않는다고 생각했던 상담가의 길이 결국은 나의 선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도를 닦는 것도. '그것이 옳아서' 라기보다는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어서' 라고 해야 맞을 나의 성장동기때문에. 그외에는 잘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잘 하고 싶은 것도 없으니까...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성서말씀대로 하느님의 법을 지키며,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서 전처럼 안타깝고 잘못살고 있는 것 같고 큰일난것 같고 하는 식의 판단을 덜 하게 될 것 같다. 그 사람들 나름대로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어서', 그리고 어떤 삶의 방식에도 장점이 다 있으니까 어떤 삶이 '더 바람직한' 삶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개인마다 각각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해, 또는 그로 인해 문제를 느낄 때, 그래서 도움을 청할 때, '그 개인에게 좀더 나은(만족스러운)' 방식에 대해 탐색하도록 도움을 줄 수는 있겠지...

아아... 나는 어째서 아무것도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얼마나 많은 판단을 하는지...

그래서 선현들께서 겸손하라고 가르치시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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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 그리고 가슴에서 손까지의 거리라고 하는 말이 있다.

실천을 요구받을 때마다 때로 사회에 무관심하게 살면서 책이나 읽으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못 하고 있나 생각하다보니,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대체로 실천을 촉구하는 책들인 것이다. 그러니, 책을 읽다 보면, 책만 읽고 있는 것이 마음 불편하게 느껴지면서 실천하는 쪽으로 가게 되나 보다. 그래도 마음이 따라주지 않으면 안되는데, 기도와 명상을 하다보면 마음이 또 이웃사랑으로 향하게 된다. 아직 기도의 양과 깊이가 많이 부족해서 분별이 잘 안되어 가지고, 해야 할 일과 하지 않는게 나은 일을 구분 못하고 있기도 하지만, 점차 나아지겠지.

실천은 결국 내면 깊숙이 자리잡은 나의 어떤 면이, 편하게 살고자 하는 또 하나의 나를 부축해 가며  하는 것 같다.

우선 중점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것은

1.말의 정화 - 말을 강하게 함으로써 상대방이 저항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말을 강하게 한다는 건 내가 그 생각을 상대방에게 강요하고 싶다는 의식의 표현일 것이다. 강요해서 될 일이 있겠는가?

2.생각의 정화 - 치심, 진심을 정화하기. 내 방식이 옳은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없겠고, 각자의 삶의 조건에 맞는 방식이 있을 터. 내 방식이 나름대로 좋다고 해도 반드시 단점이 따를 터. 예를 들어, 아이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은 서서히, 중용을 지키며 해야 할 것인데, 그걸 어찌 단숨에 이룰 수 있으리라 기대하겠는가. 나 자신도 이제 감을 잡은 정도이면서. 그냥 '집착을 하면 아이에게 부담이 될 수 있어요.'라고 한들 그 말이 상대방에게 어떤 의미로  느껴질지 알 수 없는 것. *거부감을 표시하면 물어봐야겠다. 어떤 의미로 느껴지는지...

3.수용하기 - 나에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수용하기. 그 사람이 힘들게 만들고 있는 제3자를 수용하지 말고. 특히 제3자가 아이이면 나는 그만 판단력과 자제력을 잃고, 짐작되는 그 아이의 심정을 대놓고 상대방에게 이야기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 상대는 저항을 느끼게 될 것임. '그럼에도 불구하고-그가 아이를 정서적으로 학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수용할 것. (나도 전에 그러지 않았던가. 내가 아이들에게 했던 것보다는 나으리라. 그런 나도 이렇게 변했는데(앞으로도 변해야 할 부분이 많지만), 그 사람은 훨씬 빨리 나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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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덕은 참아 견디기 어려운 사람들을 참아 견디는 데 있다고 알퐁소 리구오리 성인께서 말씀하셨어요.

-당신이 진보하면 할수록 싸움이 적어질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훨씬 쉽게 이길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왜냐하면 당신은 사물의 좋은 면만을 보게 될 테니까요. 그때는 당신 영혼이 피조물 위로 높이 오를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마침내 사람들이 내게 무슨 말을 하더라도 내 영혼을 스치지도 않게 되었어요. 왜냐하면 나는 사람들의 판단이 얼마나 견고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각자 자기 주위에 선의 씨앗을 뿌려야 해요. 그것이 싹이 나올지 어떨지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할 뿐이고 성공은 예수님께 맡겨야 해요. 이웃에게 선익이 되는 것이라면 싸움을 두려워해서는 안 돼요. 자신의 평온함을 희생하고라도 꾸짖을 것은 꾸짖어야 하며, 그것도 수련자들의 눈을 뜨게 해준다는 의도보다는 좋으신 하느님께 봉사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질책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느껴야 하고 마음속에 분노의 그림자조차 있어서는 안됩니다.

-당신이 덕을 갖고 있지 못했다 해도 당신을 모든 위험에서 구해 줄 '작은 강아지(선의)' 한 마리는 갖고 있습니다. 이 강아지가 당신을 천국으로 인도해 줄 거예요! 아! 덕을 소유하고 싶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넘어지고 약해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영혼, 자기가 땅바닥에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또 뜻밖에 다른 사람들이 그 현장을 보게 되는 것을 기뻐하는 영혼은 얼마나 적은지요!

-피로에 지친 사람, 두통을 앓는 사람, 영혼에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 일을 반밖에 하지 못해도 육체와 정신이 건강한 이들이 완전하게 해낸 것보다 더 많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라도 우리의 판단은 이웃에게 호의적이어야 합니다. 언제나 좋은 면을 생각하고 항상 변호해 주어야 합니다. 만일 가치로움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라 해도 여전히 다음과 같이 생각할 근거는 있을 것입니다. "이러이러한 사람은 언뜻 보기에는 잘못했지만 본인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고, 만일 내가 더 나은 판단력을 행사할 수 있다면 나는 그에게 연민을 가져야 하고, 또 그 사람에게 엄격하게 대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다른 사람이 당신을 필요로 할 때, '바늘 한땀도 더 뜨지 말고 즉시'  일어나서 가도록 하세요. 

 ........................

*사람들의 비이성적인 견해에 나는 얼마나 괴로워하는가. 사람들의 판단이 얼마나 견고하지 못한가 깨달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말이 영혼을 스치지도 않게 되었다... 라고 성녀께서는 말씀하시는데... 나는 얼마나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겠으며, 상대방 또한 마찬가지일 것을... 사람들의 말에 이리저리 마음 산란해지지 않도록 하자.

*아이들이, 다른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할 때, 가급적 '바늘 한땀도 더 뜨지 말고 즉시' 일어나도록 한다면 사랑의 실천이 될 것이다. 나를 억제하는 데 꼭 필요한 덕목이다. 아이들 공부 가르치면서 동시에 내 책을 읽는 일은 이제 하지 말아야겠다. 나에게는 채우는 일이 아니라, 비우는 일이 필요하다. 비우기 위해 이런 책들을 가끔씩 읽어야 하지만, 과하면 이것 또한 채우는 일이 될 터, 안 읽느니만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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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hoyahan1님의 서재, 갈레아노의 책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 리뷰에서



"우리는 우리 인간 족속이 이웃을 집어삼키고 지구를 황폐화하기 위해 대단히 열심히 살고 있음을 잘 알고 있지만, 멀고 먼 구석기 시대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자신들이 일부를 이루고 살았던 자연에 적응하지 못했더라면, 또 채집하고 수렵하는 것을 나누지 못했더라면 우리가 지금 이곳에 없으리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어디에 살든, 어떻게 살든, 언제 살든, 한 사람은 그 속에 다른 많은 사람을 포함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좀 생.뚱.맞.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아메리카 인디언들이나 한반도의 조상들이 기술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자연을 훼손하는 행위를 진심으로 경멸했다는 것은 진실이다. 위의 말이 생뚱맞게 여겨지는 것 만큼 우리의 세계관은 전락한 것이다. 구조도 타락했고, 세계관도 타락했다면 세계관부터 끌어올려보는 건 어떨까? 예를 들면, "아무도 자신이 가장 편한 일을 하는 대신에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일을 함으로써 영웅이나 바보로 취급되지" 않는 것이 상식이 되는 것. 세계관을 바꿀 수 없다면 구조를 바꾸는 것은 더욱 요원한 일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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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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