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문득 발견한 행복(A Short Guide to a Happy Life),       

                                                                                                             애너 퀸들런,    뜨인돌

글보다 사진에 더 눈이 가는 책...

-죽어가면서, 직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게 후회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평-대부분의 시간을 직장에서 보냈으니까 그렇겠지..직장 안다니며 산 사람은 직장 없이 산게 후회될 수도...)

-당신이 다른 계획을 세우느라 바쁜 동안 그대에게 일어나는 일이 곧 인생이다.-존 레논 (평-계획 세우는 것도, 그동안 일어나는 일도 다 인생... 내가 무언가 하는 동안 내 주변, 세계, 우주에서 일어나고 있을 일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때로는 좋을 것이다. 단면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제목을 안적어준 시)   그웬돌린 브룩스

        작은 순간을 다 써버려라.

        곧 그것은 사라질 테니.

       쓰레기든 금이든

       다시는 같은 겉모양으로

       오지 않는다.

-내 인생이나, 내가 속한 세상을 그렇게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인생을 작고 소박하게 느낍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송이, 수선화, 내 아이와 나란히 소파에 앉아 있는 느낌, 남편이 램프를 켜놓고 책을 읽는 표정, 아이스크림... 인생은 순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긴 회색 시멘트 바닥 위에 반짝이는 작은 조각이 놓여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 것이 자연스럽게 다가와 알게 되면 좋겠지요.

..삶의 여백을 만들고, 그걸 사랑하고, 사는 법, 진짜로 사는 법을 스스로 배워야 합니다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세상의 모든 선을 바라보고, 그 중 일부를 되돌려 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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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사는 것이 멋진 삶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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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을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中,    백성욱 가르침

마음에 간절히 그리면 그대로 되어진다. 그래서 중생은 시시각각으로 소원을 성취하지만, 아상이 있기 때문에 또 시시각각으로 불만을 갖게 된다.

닦는다는 것은 절대적인 어떤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되고자 하는 바로 그 마음을 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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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자유의 길,       안셀름 그륀

      중풍병자의 치유

예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하고 며칠 뒤 다시 가파르나움의 어떤 집에 가셨다. ...그때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데려왔다. 그들은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를 침상에 뉘어 예수께 내려보냈다.... 경직되고 마비된 상태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물음에 대해 우리는 먼저 마비의 근본 원인으로 불안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불안은 나를 마비시킨다. 불안은 나를 경직되게 하고 주저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 앞에서 무엇인가 말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나는 경직되고 마비된다. 다른 사람의 판단에 겁을 먹고 있는 것이다. ..어려운 상황, 권세있는 사람, 위험 등에서 우리는 불안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행여 자신의 죄가 드러날 수 있다는 불안을 느끼기도 한다...예수께서는 중풍병자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대 죄가 용서 받았습니다."

환자에게 죄를 용서하다니 무슨 말인가?

예수께서는 마비가 내적 태도와도 관련됨을 느끼신다. 죄란 무엇인가 결핍된것, 빗나간 삶을 뜻한다. 중풍병자는 자신이 완전해야 하며 나약한 점을 보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빗나간 인간존재의 삶을 살고 있다. 그는 결코 나약한 점을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기에, 그 자체로 빗나가 있었고, 질병으로 인해 침상에 묶여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실패를 피하는 사람은 항상 불안의 무덤에 머물러 있게 된다. 중풍병자는 계명을 어긴 적이 거의 없었지만, 당당한 삶을 거부했다. 그의 본질적 죄는,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삶을 당당하게 제대로 살지 않았다는 데 있다. 예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삶을 당당하게 살지 못한 삶, 삶을 거부하는 태도를 지적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와 하느님에 의해 조건없이 받아들여졌음을 선언하시어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신다. "그대는 죄책감을 버려라.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고 그대 자신을 자학하지 마라. 그대 자신이 될 수 있도록 용기를 가져라. 그대의 실패와 나약함에도 일어서라. 삶을 거부하는 태도를 버려라. 그대 자신을 신뢰하며 살아라."...이제 중풍병자는 더 이상 불안에 얽매여 있지 않다. 그는 자신의 삶을 더 이상 거부하지 않는다. 이제 신뢰가 불안을 이겨낸다.  그는 일어나는 일을 감행한다.

나(저자)는 중풍병자의 태도를 익히 알고 있다. 언젠가 피정 지도를 맡았을 때, 나는 피정 참가자들에게 좋은 강의를 하기 위해 늘 노심초사했다. 아주 좋은 피정이 되어, 참석자들이 모두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억압했다. .. 이때 예수의 이런 말씀이 마음에 떠올랐다. "일어나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시오." 나는 이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골똘히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고, 그것은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그냥 강의실에 가서 내 마음속에 있는 느낌을 신뢰하며 강의를 시작했다. 이것은 내게 일종의 해방을 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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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풍병자에게 죄가 있었다는 것은 나에게는 이런 의미로 다가오기도 한다. '판단'이라는 죄. 우리는 성장하면서 여러가지 판단을 당하고, 거기에 민감한 사람들은 스스로 또 판단기준을 세워 남들을 판단함으로써, 그런 판단을 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삶을 좁혀간다.

나도 이런 중풍병자 중의 한사람이었다. 경직된 사고방식과 판단체계와 나에 대한 지나친 기대를 가진...

'판단'으로부터 훨씬 자유로워지니까 세상이 더 환하게 보이고 사람들의 장점과 재능이 보이기 시작한다.

요즈음 아픈 것은 나의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나타나는 일종의 통과의례인 것 같다. '선악과'를 뱉어내는 중이다. 그것이 '선과 악을 가리고자 하는 판단'의 과일이라면...

백성욱 스님 말씀에 따르면, 닦는다는 것은 그렇게 되고자 하는 바로 그 마음을 쉬는 것이라는데, '만족'이 있어야 가능한 것 같다.

이제 나는 남편에게 만족하고 아이들에게 만족하고 나 자신에게 만족한다. 이렇게 복잡한(내 판단이겠지) 이 세상도 만족스럽다. 때때로 불만스러운 점이 생기기도 하겠지만, 이전처럼 괴롭진 않을 것 같다. 하늘아래 새로운 일 없다고, 사람이 나타난 이래, 세상이 불합리하고 부조리하지 않았던 적이 단 하루나 있었겠는가... 그런게 현세상인 것을... 나자신과 가족들을 사랑하고, 내 작은 힘으로 이웃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조금씩 해나가며, 그 결과를 즐기는 것, 그것이 나의 삶이 될 것이다.

이제, 겸손하고 단순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제비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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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여기서 '자유'란 어떤 것일까? 사람마다 다를 것이고, 상황에 따라 다를텐데...

퍼온 글에서...

자유로운 사람


일평생 밖에서 자유롭게 산다 해도
정작 마음은 죄와 질곡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마치 죄수와 같은 사람들이 많다. 반면 그들은 감옥에 갇혀
가장 비참한 삶을 살고 있지만, 내면으로는 산꼭대기 위를
날아다니는 새처럼 자유로운 사람들이다.


- 윈 형제_폴 해터웨이의 《하늘에 속한 사람》중에서 -


* 누구나 자유를 원합니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를 꿈꿉니다.
그러면서도 그 자유를 자기 자신이 가장 많이 제약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바깥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놓아주는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스스로 쳐놓은 작은 욕심의 울타리를 허물고
생각의 울타리를 더 크게 넓히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자유는 무엇일까? 혹시 이웃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안하는 자유는 아닌가? 그러면서 마음에 걸리지도 않는 자유? 그런 자유의 부산물은 외로움이리라. 나 혼자만 외로우면 괜찮지만, 아이들까지 그런 삶의 태도를(자기도 모르게) 갖게 되고, 아이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외로움이 찾아들게 될 것이다.

'스스로 쳐놓은 작은 욕심의 울타리'에는 크고 작은 것들이 많이도 들어가 있다. 때로는 서로 상충되는 것들도 - 아무것도 안하는 자유vs사람들을 제대로 도울 수 있게 되는 전문성과 영성, 아이들을 위한 밑거름vs나의 자아실현, 무소유vs안락한 생활환경, 내멋대로vs온화함과 절제... 이 모든 것들이 혼재된 것이 또한 '현재의 나'이기도 하다. 꼭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한다는 법이 있는 건 아니니까... 지켜보자. 내가 어느 쪽으로 더 기울어지게 되는지...어쩌면 상충되는 듯이 보이지만 잘 융화시켜나갈 수도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한쪽으로 기울어질 수도 있고, 조화를 이룰 수도 있다. 아마 나의 '무의식속의 원함(이것을 팔자라고 봐도 될까? 내 영혼이 체험하고자 하는 목표이고?) 이 나를 이끌 것이다. 내가 보고 싶은 것들을 보게 되니까...나로서는 원치 않는 걸 듣는 건 아주 힘든 일이다. 요즈음,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하느님에 대해서 심리학적으로 접근해 가는 방법이 더 마음에 와닿는다. 그러면서 여기저기 몸이 좋지 않았다. 잘 못 자고, 잘 안 먹고, 생각은 많이 해서 그런 것 같다.(심리학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거라면, 신학과 심리학을 더 깊이 접목시켜 연구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일상생활은 예전보다 더 잘 꾸려가니, 많이 나아졌다. 어제 영성지도하시는 아주머니께서 평일미사 웬만하면 꼭 참석하라고 권하셨는데, 내 마음이 내킬 때까지는 주일미사만 참석하려고 한다.

'신과 나눈 이야기'에서 말하듯이, 하느님은 인간의 예배도 찬미도 필요없으시고, 다만 지켜보며 우리가 원할 때 도와주시는 분 아니실까? 하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평가하시는 하느님, 벌하시는 하느님, 화내시는 하느님상은 인간들의 마음의 투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상조차도 그 시대 사람들의 집단무의식의 투사가 아닐까? 하고...

그러고보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획기적인 하느님상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당시 기득권층으로서는 '악의 우두머리'라고 생각할만도 하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과 희생'의 하느님상이 진짜 하느님상에 가까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우리에게 전해진 예수님 모습도 예수님의 일부이고, 때로는 복음사가들의 마음이 투사되었을 수 있으니까...성령께서 작용하셨다 할지라도... 그 당시 사람들의 한계속에서 작용하신 성령이실 것 아닌가? 진리는 말로 다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데...)

내적 자유는, 내가 남을 판단하지 않고, 남들도 옳을 수 있고 나도 옳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일일이 마음에 새겨두지 않을 때 커질 수 있을 것 같다. 그 사람으로서는 그렇게 반응할 수도 있는 거니까.

남에게 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받기도 쉽다.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남에게 자유를 주어야 나도 자유롭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에 만족하기',  '너무 궁리하지 않기'도 자유로움에 한몫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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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정말 투사가 될 수 없다. 인생에서도... 그냥, 기도하는 순례자로 남는 것이 내 본성에 맞는 선택인 것 같다.

내 앞에 어떤 운명이 펼쳐져 있든 두려움없이 나아가는 것. 그러고 싶지만, 나로선 역시 성모님께 기도를 청하면서, 가능하면 고통이 적은 쪽으로 삶의 길이 펼쳐지기를 바란다.

주일 미사를 두번 빠지고, 평일미사는 두주간 빠졌는데, 영혼이 메마르는 것 같다. 다시 미사에 참석해야겠다.

오늘 예수님 메세지 책을 펼쳤는데, '육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지체는 어떤 것이든지 잠깐밖에 살지 못한다. 굵은 가지는 하나도 몸통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이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어느 것이든지 잘려 나갈 것이다. .. 밝은 것은 모두 밝은 채로 남아있어야 하고, 어둡게 하는 것은 모두 제거되어야 한다.' 라는 대목이 눈에 띠었다. 본래의 오늘의 메세지는 '내 사랑 안에서 네 영혼을 즐거워하게 하고 나를 찬양해라.'는 대목인데...성모님 메세지는 '아끼는 사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예수님은 돌아가심으로써 그 사랑으로 (너희에게)당신 생명을 주신다....이 갈바리아길을 너희도 순하고 온화하게 걸어가야 한다....너희 마음이 침묵에 잠기게 하여 그분의 '신적인 말씀'에만 귀를 기울여라. 침묵하여라. 아무도 판단하지 말아라.  너희 삶으로 말하여라.'이다...

신의 메세지, 예수님의 메세지, 성모님의 메세지들이 여러 종류 있는 것 같다. 심리학자들은 자기 무의식의 이야기를 듣는 거라고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중에 자기 무의식에서 듣고 싶어하는 내용과 같은 것이 있을 때 선택하면 되지 않겠는가... 성철 스님도 소화 데레사 성녀도 겸손하고 참회하고 말없이 실천하라는 걸 가르치셨는데, 내가 그걸 원하면 순명하면 될 것이다.

요즈음, 내 영혼을 즐겁게 하려면 우리 가족과 알콩달콩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나의 자아가 '나'에서 '가족'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전에 세계평화니 이웃을 위한 기도니 했던 것은 '나'의 본성적인 허영심에서 비롯된 거짓 자아확장이었다는 걸 요즈음 깨닫는다. 나의 만족감을 위한... 내가 '가족 이기주의'에 빠지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자랑스러워 하면서... 하지만,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나의 가족'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부르짖는 세계평화는 모래위에 쌓은 성 같은 것 아닐까? 조금만 시련이 오면 바로 '나'로 되돌아가버리게 되는...

그렇게 볼 때, 가족을 생각하는 것이 이기적인 것만은 아닌 것 같고 자아확장의 발전단계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것 같다. 다만, 여기 머무를 것이냐 더 확대할 것이냐 선택을 해야겠지. '자기 생명을 바치고 싶은, 아끼는 사람'의 범위를 어디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내가 생각하는 '생명'은 시간, 관심, 노력, 희생이다. 내가 팔팔하게 살아있다는 것은 지기 싫어하고, 희생하기 싫어하고, 관심이 '나'에게만 있고, 귀찮아 하고... 이고, 생명을 바친다는 것은 관심을 그들에게로 쏟아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그들의 영혼에 좋을 일을 해 주는 것일 거라 생각한다.

온화하고 겸손하게... 어제 읽은 '배움의 도'에서도 마음에 와닿았던 단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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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움의 도 中 

                                                                  파멜라 메츠 풀어씀, 이현주 옮김,          민들레

온화함

잘 배우기 위해서는

온화함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온화한 학생은 자신의 생각에서 자유롭다.

 

그는 하늘처럼 너그럽고

떠오르는 해처럼 한결같으며,

태산처럼 굳건하고

바람 부는 날의 대숲처럼 유연하다.

보이는 것을 기대하지 않고

인생의 오솔길에서 닥쳐오는 모든 것을 활용한다.

 

온화한 학생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

모든 것을 그대로 두기 때문이다.

그는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를 돌보듯이

자신의 행복을 돌볼 수 있다.

 

생선 조리듯이

배움이란 작은 생선을 조리는 것과 같다.

젓가락질을 너무 많이 하면 요리를 망치고 만다.

 

그대의 배움을 道의 중심에 두어라.

곤경이 그대에게 아무 힘도 쓰지 못할 것이다.

곤경이 없으리라는 말이 아니라,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말이다.

곤경을 맞아 대결하려 하지 말아라.

그러면 곤경이 스스로 사라질 것이다.

 

겸허

교사에게 큰 힘이 있음은

그가 바다처럼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개울과 강이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교사가 더 큰 힘을 지니려면

그만큼 더 겸허해야 한다.

겸허하다는 것은

道를 믿고 자기를 방어할 필요가 없게 됨을 뜻한다.

 

위대한 학교는 위대한 인격과 같다.

실수를 저지르면 그것을 깨닫고, 깨달으면 고친다.

실수를 깨닫게 한 교사를 가장 중요한 교사로 삼으며,

자신의 추종자를 적으로 여긴다.

 

교실이 道안에 잠겨 있다면,

자기 학급 학생들을 돌보되

다른 학급에서 일어나는 일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그 교실은 그 학교의 본보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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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인데, 그것이 왜 이리 어려운지... 

아이가 자라는 동안, 부모의 기대, 선생님의 기대, 사회의 기대 등 여러가지 '조건화'가 가해질 때, 아이는 본성을 감추면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페르조나(외적 인격)를 만들어 가고, 이후에는 그 페르조나를 자신의 실체로 인식하게 되면서 삶의 질곡이 생긴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생긴 질곡에다가 다른 조건화(인정받고 싶은 대상이 자신에게 기대한다고 생각되는 것)가 덧붙여지면 다시 삶의 질곡에 빠지게 된다는 것. 그래서,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과 공감, 수용을 통해(조건화가 덧붙여지지 않는 상태), 자신의 본성을 자유롭게 탐색할 수 있게 되면 삶의 질곡에서 빠져 나올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무조건적'이 참으로 어렵다는 걸 자주 느낀다.  이게 道의 상태가 아닐까? 부모의 가치관, 세계관을 접어두고서 아이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것. 진단하지도, 평가하지도 않고... 아이의 눈높이에서 '같이' 바라보기. 이것만 되어도 상담(또는 인성 교육)의 반은 성공하는 것 같다. 그 다음, 자신의 행동의 결과에 직면시키는 것은 아이가 충분히 부모를 신뢰하고, 들을 준비가 된 후에 조심스럽게, 가급적 직접적인 제시보다는 질문을 통해서 아이가 직접 통찰할 수 있도록...

이론은 알겠는데, 실제 상황에 부딪치면 침착과 온화함을 자주 잃고 헤맨다. 아이 마음을 비참하게 만들기도 하고...  '배움이란 작은 생선을 조리는 것과 같다. 젓가락질을 너무 많이 하면 요리를 망치고 만다.' - 특히 민감한 둘째 아이를 대할 때 잊지 않으면 좋겠다. 아이가 이야기를 많이 하고 싶어하고, 제법 대화가 되어서, 이야기 하다 보면 들어주다 말고 나도 모르게 '젓가락질'을 너무 많이 하게 되는 것 같다. 숙제할 때 너무나 꼼지락거려서 늦어지면 짜증나는 마음을 담아서 잔소리하게 되기도 하고...

그래서 가끔 요리가 망쳐지고, 아이는 '마음이 웬지 우울해요.' 라고 울먹이고, 나는 마음 풀어주느라 힘들어지고... 그냥 들어주기, 인내심(아니, 이 말에는 힘이 들어가 있다. 온화함이 낫겠다)을 갖고 지켜보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렇게 기도해야겠다. "저는 아이에게 마음내키는대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온화하기를 더 원합니다. 때때로 온화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어떤 건지 압니다. 그러니까, 저는 더 자주 온화해질 수 있습니다. 그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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