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엄마는 방학 시작날이나 연말이면 우리들에게 고스톱을 하자고 하셨다. 과자랑 과일, 음료를 한 쟁반 차려놓고 점 10원이나 3,5,7..에 10원으로 내기를 했는데, 난 게임이 그리 재밌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하지만 엄마는 꿋꿋이 분위기를 띄우며 신을 내셨는데 그때 가끔 들었던 말이 "초장에 초싹, 파장에 파싹"이라는 말이다. 처음에 잘 따다가 끝판에 가서 다 잃고 지게 될 때 하는 말인데, 어떤 부분에서 지금의 나에게 이 말이 딱 어울릴둣해서 싫다. '초지일관'이 나에겐 가장 어려운 실천덕목이다.  

 특히 상담일에서 가장 걸리는데, 처음 상담공부할 때는 대단한 열정으로 시작했다가 지금은 열정이 식어서 하기 싫은 것을 다른 이유들로 변명하고 있다. 아이들, 집안일, 체력 등등... 

 자기 분야에서 30년, 40년간 경력을 쌓으며 열심히 일하고, 은퇴하고 나서도 그 분야 일을 찾아 하는 이들을 보면 존경스럽다. 

 열정의 분배를 잘 해야겠다. 부문별로, 시간별로... 초지일관이 되도록... 선택하고 집중해서...

 그러고보니 오늘 남편한테 발렌타인데이 초콜릿을 선물 안했다. 해마다 해왔던 일인데... 올해는 둘째딸한테 미루고 안했군...올해 정월대보름 음식 챙기는 것도 빼먹고... 달리 중요한 일이 없는데 이렇게 한두번씩 빼먹으며 하면 나중에 돌아볼때 보람이 덜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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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즈음 물건들 정리를 열심히 하고 있다. 내가 살아온 중에서 요즈음이 가장 열심히 정리하고 있는 기간이다.

 못 쓰게 된 물건들, 옷가지들, 책들 치워 버리고 찾기 쉽게 정리해 놓으니까 물건 찾느라 시간 허비할 필요 없어서 좋고, 부족한 물품 챙겨놓아서 급하게 써야할 때 여유가 있어서 좋다. 학교다니던 학생 때나, 직장생활하던 아가씨 때나, 아이들 키우던 최근까지도, 시간내서 물건 정리하고 미리미리 챙기는 걸 귀찮게 여겼다. 그럴 시간 있으면 책을 읽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뭔가 다른걸 찾아 했더랬다. 그래서 학교도, 직장도, 어머니댁이나 친정도, 아무튼 어딘가 다녀오려면 늘 허둥지둥 가게 됐던 것 같다...

 내 주변 정리해 놓고 아이들 것까지 챙겨놓느라 (다행히 남편은 치우지도 않지만 어지르지도 않는 스타일) 이웃을 만날 시간이 줄어들어서 외로움도 느끼긴 하지만, 허둥거림은 줄어서 좋다.

 소비하지 않고 살 수는 없겠고, 책이나 옷을 사더라도 가지고 있는 것들을 고려하고 유행을 많이 타지 않는 걸로 신중히 산다면 소비를 좀더 줄일 수 있겠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이미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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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하고 아이들 숙제 도와주고 남편 챙기고... 쳇바퀴 돌리듯 해야 하는 일상들이 맘에 들지 않아서 공부다 뭐다 하며 밖으로 다녀보기도 했는데... 쳇바퀴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니까 나도 힘들고 가족들도 힘들어서 다시 쳇바퀴 돌리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가끔은 쳇바퀴 돌리는 일에 재미를 느낄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나대신 우리 가정의 일상사를 돌봐주고, 나는 유유자적 인문학이나 그림공부같은, 쳇바퀴랑 관계없는 '(의식주에) 쓸데없는'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을 꿔보곤 한다.

  생필품이건 문화상품이건 뭐건 끊임없이 소비하거나 쓸데없는 걸 만들고 모으면서 살지 않을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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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애적 성격장애라고 불리는 진단이 있다. 지난 봄 10회기에 걸쳐서 노인복지관에서 했던 집단상담 과정 중에 유난히 내 마음에 거부감이 드는 어르신이 한 분 계셨다. 교장 퇴임하신 분이셨는데, 자기 자랑이 많고,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는 도중에, 그 분 이야기에 대해 피드백하다가 결국에는 또다시 자기자랑 쪽으로 화제를 돌리시곤 하셨다. 그 분을 나르시스트라고 생각하게 됐고, 한번은 4회기짼가 집단상담이 있었던 날 밤에, 그 어르신에게서 느꼈던 못마땅한 점(권위적인 태도)을 남편의 태도에서 느끼고는 한번에 싸잡아서 마음이 싸늘해지는 경헙을 했다.

 10회기가 끝날때까지 그 어르신을 대하는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표내지 않으려 애쓰느라 더욱 힘들었던 상담이었다. 그 분과의 감정의 얽힘만 아니었더라면 더 재미있었을텐데.. 다른 구성원들과는 별 문제 없었다.

 사실 나에게 그 분처럼 살고 싶은 마음이 많았던 것 같다. 부유한 가정에 아들로 태어나서 어려움 없이 자라고, 연세대 나와서 사업하다가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나서도 교직이 기다리고 있었다. 피난처 삼아 잡은 교직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가르치는 보람도 느끼고, 집안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학비도 보태주고, 선생님들과 자주 술자리 갖고 한턱 내고(부모님이 집을 사주시는 등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움 못느낌), 깔끔하게 살림하는 아내 만나서 아들딸 잘 키우고..아내의 잔소리에 괴로움과 외로움을 가끔씩 느끼지만 여자친구들과 이야기 나누며 털어내고 아내도 그런 걸 알면서 묵인해 주고...

 진짜 욕심쟁이에 자기애적이고 고집쟁이에 다소 냉소적인 것은 나. 

 그래도 이런 나를 엄마라고 부르며 자기 한 몸 의탁하고 있는 아이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나의 존재 이유-아이들.

 내가 나의 존재 이유를 알게 되기까지 그 애들조차도 나의 애정의 범위(엉뚱하게도 인류가 나의 애-증의 대상이었다.)에 별로 포함되지 못했으니...늦게나마, 엄마의 애정의 대상이 되어서 다행이겠다...철없던 나는 맹목적인 사랑을 비웃으며 조각 사랑을 주었던 거다. 한조각 사랑보다 맹목적인 사랑이 차라리 인간적이어 보인다.

 '삶을 바라보지 말고, 삶을 살자.'-이게 요즈음 나의 바램이고 실천하고자 하는 바다. 생각은 적게, 행동은 많이 하려 한다. 마음도 넓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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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의 자아 성장발달에서의 ‘집단무의식’의 역할 및 영향에 관하여

李 裕 瓊

(융학파 정신분석가, 한국융연구원)




들어가는 말




일반 심리학에서는 인격의 성장발달을 논하는데 있어서 ‘무의식’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정신의 크기를 자아(Ego, das Ich)의 크기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심층심리학’1]은 ‘무의식’을 자아에 영향을 가하는 실재하는 정신 영역으로 인식하여, 이를 인격의 성장발달과 연결시켜 논의할 가능성을 열었다.

그래서 S. 프로이트는 구강기, 항문기, 남근기등으로 나아가는 자아의 성장 발달의 단계를 리비도의 변환의 내용으로 다루었다. 또한 ‘이드(Id, Es)-자아(Ego)-초자아(Superego)’의 삼분법에서는 자아가 아래로는 이드에 위로는 초자아의 영향으로 끊임없이 갈등하고, 심하게는 노이로제와 같은 병적 상태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정신분석적 작업에서는 ‘무의식’을 억압된 성애적 내용으로 간주하여 오히려 자아의 발달사에 장애가 되는 요소로 보았다.

같은 심층심리학적 접근이지만 ‘무의식’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인격의 성장 발달에 관한 내용도 달라진다.

C.G. 융은 자아의 ‘의식’이 형성되기 전의 정신의 상태에 주목하면서, 개인정신의 기초가 되는 정신의 영역을 ‘집단무의식’이라 불렀다. 자아 ‘의식’은 개인인격의 전면에 나와 언제나 개인 인격의 주체인 것 같아 보이지만, ‘집단무의식’에서 분화 발전을 이룩하면서 상대적으로 후차적으로 생겨난 영역이다.

말하자면 모든 자아 ‘의식’의 표상과 행동은 무의식’의 원형적 심상(心象)을 바탕으로 하여 발달해 온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하루 중 꽤 많은 시간을 ‘무의식’의 영향을 받거나, ‘무의식’의 인격과  동일시하는 데에도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C.G. 융의 분석심리학적 입장에서 아동의 자아의 성장 발달에 있어 ‘집단무의식’의 역할과 그의 영향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자아의 분화 정립에 있어서의 ‘집단무의식’의 역할




분석심리학적으로 ‘집단무의식’은 개인 정신의 기초가 되는 정신이다. 인간의 정신은 탄생 時에 백지가 아니다. 신생아의 자아는 마치 거대한 ‘무의식’의 바다에 한 점 핵세포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무의식적 상태를 나타낸다. 이처럼 한 개인의 성장과 발달은 자아의 성장발달의 역사인 것이다. 아이는 초기의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점차 약간의 의식성을 획득하면서 본능적인 욕구를 개별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좀 지나면 언어적인 표현을 동원할 정도의 의식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 의식성은 ‘나’라고 부르는 자아의 ‘의식’이 아니다. 이 시기에 아이는 자신을 제 삼자로 인식한다. ‘나’라고 부르며 자아 의식과 동일시하는 시기는 대략 3-5세 사이에나 가능하다. 그리고 ‘내가 있다’는 느낌을 가지기까지 경우에 따라서는 사춘기에 이르는 긴 시간이 요한다. 이처럼 아동기에는 ‘집단무의식’의 특성들이 더 지배적이다.

‘집단무의식’으로부터 점차 자아의 크기가 형성되고 마침내는 독립 분화하는 내용이 개인 인격의 발달 과정이다. 아동의 자아는 충분한 분화 및 정립이 있기까지 종종 ‘집단무의식’과의 ‘신비적 분유’2]의 상태에 있게 된다. ‘신비적 분유’의 상태란 자아가 근원적 정신인 ‘집단무의식’과 동일화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는 외부에 투사되어 실재의 부모와의 동일화로 드러나는데, 특히 어머니와의 동일화가 더 두드러진다. 우리는 모두 어머니의 몸을 빌어서 태어나기 때문에 자아를 산출하는 ‘집단무의식’은 어머니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집단무의식’은 자아가 ‘신비적 분유’의 상태에서 벗어나 분화 및 정립을 하도록 요구한다. 초기의 아동의 삶에서는 그러한 목적에서 자아에 영향을 가하는 ‘집단무의식’의 활동이 우세하다.

아동기 자아에 영향을 미치는 ‘집단무의식’은 주로 ‘모성원형’과 ‘부성원형’이다.3] ‘모성원형’의

역할은 실제로 외부세계의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먹이고 보살피듯이 내부에서 자아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보호해주는 ‘집단무의식’의 측면이다. 특별히 자아를 산출한 원초적인 ‘집단무의식’을 어머니적인 것으로 여기듯이, ‘모성원형’은 내면의 어두움의 주체로서 어리고 약한 자아를 ‘무의식’의 영향으로부터 지켜주는 보호자 역할을 한다. 이에 반하여 ‘부성원형’은 주로 자아가 외부세계에 발을 들여놓도록 하는 안내자이고, 그에 따른 위험을 지켜주는 보호자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아동에게 나타나는 노이로제의 원인을 실재의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찾으려 한다. 하지만 ‘분석심리학’에서는 내부의 ‘원형’과의 관계에 의한 것으로 보고자 한다. ‘집단무의식의 원형’은 자아가 분화 성장하도록 영향을 가하게 되는데, 그 영향력이 자아와 심한 갈등을 불러일으키면서 노이로제와 같은 상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외적으로는 지나치게 아이를 보호하려는 어머니 때문이거나 심한 의존성을 가진 아이 때문으로 나타나겠지만, 내면적으로 보면 상대적으로 자아의 분화 정립이 지연되고 있을 때, 아이는 종종 어머니가 마녀나 귀신 및 위험한 괴물의 형상으로 변하여 나타나는 꿈을 꾸게 된다. 이는 ‘집단무의식’이 아이로 하여금 내적이든 외적이든 어머니적인 것과 거리를 유지하도록 하는 효과를 고려하여 그러한 상을 만든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려고 하거나, 사춘기에 이른 아이들의 꿈에서도 같은 내용의 꿈을 꿀 수 있다. 많은 경우에 실재의 어머니에게서 따스한 보살핌을 원하면서도, 그러한 역할을 하는 어머니에게 까닭없이 짜증스러워하거나 못견디게 저항을 느끼는 것도 자아의 성장과 분화가 이루어질 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어떤 경우는 아이가 어머니의 품을 떠날 때 자신의 육체가 파괴당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질 수도 있다.  자아 ‘의식’의 분화 및 정립이라는 과정은 개인에 따라 다양하게 진행될 수 있다. 어떤 경우는 자아가 ‘집단무의식’과의 신비적 분유의 상태를 상대적으로 오래 지속시키도록 한다. 너무도 불안정한 자아의 입장을 고려한 ‘집단무의식’의 보상적인 역할4]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약 아이가 아주 불리한 외적 환경에 처해있다면, 즉 부모를 잃었거나, 심한 신체적 상해,성폭행과 같은 사건 등으로 심한 심리적 충격을 받는다면, 내면의 부모상(父母像)은 그러한 충격에서 견딜 수 있도록 자아를 지지하여 보호한다. 연약한 자아가 ‘어버이-원형’의 힘을 얻어야 하는 동안은 자아의 분화 및 독립은 유보된다. 프로이트는 아동기의 어떤 충격적인 장면이나 사건을 자아가 불쾌하므로 억압하여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실제 아동의 자아는 그러한 내용을 억압할 만큼 강하지 않으며 오히려 ‘집단무의식’이 그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그 내용을 무의식에 저장하여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자아가 성장하여 그와 같은 내용을 소화해 낼 수 있을 정도의 시기에 그 기억을 풀어놓곤 한다.

이상에서 보듯이 ‘집단무의식’은 자아가 분화 독립하도록 종용하고 경고하기도 하는 규제자이며, 또한 아이의 생존을 위협하는 극단의 상황에서도 견딜 수 있도록 계속 근원적인 힘을 제공하는 보호자이다.

궁극적인 ‘집단무의식’의 목적은 자아가 분화하여 독자적인 영역의 확보를 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아 ‘의식’이 ‘집단무의식’의 영향을 벗어날 때 아동에게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다고 느끼게 한다.




‘집단무의식의 원형’의 영향




생의 전반부 과제는 ‘집단무의식’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개인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는 외적으로 아이가 실재의 어머니에서 떨어져 나와 점차 독립하여 성장하는 것으로 설명되곤 한다. 사회적으로는 아이가 일시적이나마 가정을 떠나 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에 소속되게 하여 그러한 내용이 실천되게 하는 제도적 장치가 있다.

원시부족에서는 자아 ‘의식’의 분화를 돕고자 하는 집단적 장치로서 통과의례나 성인식이 있었다. 이러한 의례는 자아 ‘의식’이 다시 이전의 상태에로 되돌아가지 않도록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의례를 치른다는 것은 아이가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분리되는 상징적 기간을 지내고 나서, 성인 집단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획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부 환경에서의 압력이 없고, 비교적 순탄하게 자아 분화 및 정립이 이루어진 경우 ‘원형’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원형’의 영향력으로 인해 한 개인의 삶이 운명 지워진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심각하게는 정신병적인 상태로 될 수 있는 요소이다. 자아가 한 ‘원형’과 두드러진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은 대부분 가족관계에서 한 구성원에 대해 특별하게 일어난 자아의 정서에 기인한다. 이러한 정서적인 경험이 내부의 원형상을 형성하게 한다. 남성의 경우는 어머니, 여성의 경우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그러한 정서적 반응이 더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원형적 관계가 자아로 하여금 어떠한 의식의 태도로 방향을 잡아 자라게 하는 심리적 요인이 된다. ‘자아’는 그 원형에 상응하는 대상을 외부에 투사하여 관계함으로써 (이는 비단 실재의 아버지나 어머니뿐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대상들까지 포함한다) 자아 ‘의식’은 특정의 양상을 가진 인격체로 성장하는 것이다. 이를 분석심리학에서는 ‘페르조나’6]라고 부른다. ‘페르조나’를 채우고 있는 내용은 그 특정의 원형의 영향하에 이루어진 자아의 성장부분에 해당한다. 이러한 가상의 인격체인 ‘페르조나’가 나중에 노이로제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여자아이가 ‘부성원형’의 영향을 받는 경우 일찍부터 환경에 눈을 뜨고 유능한 아이로서 반응한다(앞서 보았듯이 ‘부성원형’은 외부세계의 안내자이다). 자라면서 점차 지성적 측면을 강화하는 성장행로를 밟게 된다. 그것이 아버지와의 관계에 상응하는 등가물이기 때문이다. 이 여성이 노이로제에 걸리지 않으려면 그러한 지성적 작업에서 계속적인 정서적 열광의 상태에 있어야 하고, 거듭 창조적 실현의 출구를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그녀 또한 현실적인 존재로 살아야 하며, 학문의 영역에서 그러한 지속적 열광이 불가능하게 되기 쉽다. 사춘기 이후 이성과의 만남에서 종종 노이로제적 증상이 두드러진다. 이때 상대가 되는 이성은 정서적 등가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삶의 흐름이 중단된 상태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남자아이의 경우 ‘모성원형’의 영향을 받으면 실재 세계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의 혹은 환상의 세계를 획득하게 된다(‘모성원형’은 언제나 내면세계의 안내자이다). 남성에게서 실재의 세계는 근원적 상태, 즉 ‘모성원형’과 멀어지면서 이루어낸 아버지적인 것이다. 남성에서 자아 자신의 성공적 성숙은 바로 남성성의 확보와도 같다. 그러나 ‘모성원형’의 영향으로 자신도 모르게 여성의 세계에 동화하게 된다. 남성에게서 다른 세계와 연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세계를 형성하기 불가능한 것과도 같다. 결국은 ‘모성원형’의 영향으로 미숙한 남성의 ‘페르조나’를 형성하게 한다. 

이처럼 ‘원형’의 영향 下에 있는 자아의 성장은 어떤 전형적인 ‘페르조나’를 형성하면서 인격의 참다운 성장을 불가능하게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능이 나름대로 적절한 행로를 찾을 수 있어서, 큰 문제없이 그러한 영향력을 극복한다. 그러나 그러한 ‘원형’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평범한 정신의 보수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경우든 자아와 ‘원형’과의 관계는 마치 초개인적인 것, 혹은 신적인 것과의 관계로 나타난다. 이를 경험하는 ‘자아’로 하여금 언제나 그 원형은 누미노스한 힘을 가진 특별한 것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그것을 외부에 투사하였을 경우 그 관계에서 ‘자아’는 아주 특별한 영향을 받게 된다.

단순히 일상의 평범한 내용을 취하지 못하게 하는 그러한 경험적 내용들로 이루어진다. ‘원형’의 영향으로 형성된 ‘페르조나’가 아무리 고상하다고 하여도 그것은 참된 개인 인격의 실체가 아니다. 자아 ‘의식’이 자신을 그러한 존재로 믿고 동화하고 있는 상태가 됨으로써 자신의 본질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처럼 아동에서 해결되지 않은 ‘원형’의 영향은 아무리 긍정적이어도 나중에 엄청난 삶의 장애처럼 드러난다. 흔히 이를 어머니나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자아에 일방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주고자 하는 것이 ‘집단무의식’의 궁극목적이 아니다. 생의 전반부에 작용하는 ‘원형’의 영향은 특정의 자아를 하나의 영웅적 삶의 현장으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가진다. 아동기의 많은 아이들이 자신에게서 도저히 유래할 수 없는 삶의 고통 속에 던져진다. 앞서 보았던 부모를 잃는다거나, 심한 신체적, 정신적 상해를 입은 아동은 마치 영웅신화에서의 주인공처럼 풀기 어려운 삶의 과제를 받은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아동의 자아가 그러한 어려움에서 ‘원형’의 보호를 받으면서 초개인적인 원형적인 힘을 사용하게됨으로써(신비적 분유의 상태이므로) 무의식적으로 개인성의 크기를 넘어선 인격을 경험한 것이다. 이러한 원형적 상황에서 경험한 초개인적인 인격이 그 개인으로 하여금 집단적 보수주의로부터 벗어나기를 요구한다. 그래서 사실상 아동기에 ‘원형’의 영향을 받은 자는 인간으로서 하나의 심오한 질문을 던지도록  운명지어진 것이다. C.G. 융심리학에서 인간 삶의 과제로 제안한 ‘개인의 전(全)-인격화(Individuation)’도 이 길을 통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맺는 말: 집단정신에서 벗어나기




일반적으로는 우리가 적응해야 할 환경이 외부에만 있는 것으로 인식한다. 분석심리학적 관점에서는 외적 환경만의 고려는 인간을 반만 이해한 것으로 본다. 우리가 적응해야 하는 환경은 또한 내부에도 있다. 그러나 이 내외적 환경의 적응에 있어 언제나 ‘원형’의 영향력이 작용한다. 앞서 ‘원형’의 영향을 받음으로써 바로 비본질적인 인격인 ‘페르조나’를 형성한다는 것을 보았다. ‘원형’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동은  또한 외부 환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영향을 받아 지나친 순응(적응이 아니다!)을 한다. 한 개인이 궁극적으로 진정한 인격적 성숙을 위해서는 ‘원형’의 영향을 극복해야 한다. 영웅신화에서의 반드시 물리쳐야 할 괴물은 심리학적으로 다름이 아니라 그러한 ‘원형상’이다. 물리쳐야 할 집단적인 것은 동시에 외부에도 있다.

현대는 공동체의 삶을 강조한다. 사회 조직체의 힘이 개인을 능가한다. 개인은 집단 속에서 하나의 부속품처럼, 혹은 집단의 소모품처럼 의도된 계획에 의하여 길러진다.

인격의 성숙을 자아의 기능적 유능함이라고 여긴다. 이같이 개인성이 획득되지 않은 각 집단의 구성원은 집단인들이다. 각 개인의 인격은 변하지 않고 머물며, 시간이 흐를수록 집단은 조직체가 대신 변화하고 성장한다. 이는 현대적 의미의 보수주의인데, 원래 ‘집단무의식’에서 자아 의식의 영역으로 도약하는 정신의 발달사에 전적으로 역행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외부에서 개인성을 넘어선 집단정신이 자아의 분화와 성장에 ‘원형’과 같은 영향력을 행사한다.  메스컴을 통하여 알려진 대중적 인물에 대해 미치도록 따르는 젊은이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개별적인 인격체로써 인격적 성장의 과정을 밟아 본적이 없다.

그들은 단지 다수 중의 하나인 상태로 자라왔기 때문에 외부에서 끊임없이 감정적으로 몰두할 대상을 가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몰두의 순간이야말로 바로 집단인으로 길러진 자들이 유일하게 살아있다고 느끼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감정이 흐르는 순간은 자신의 유일한 존재감을 느끼는 순간인데도 그것마저도 외부의 대표 인물에게 쏠리게 됨으로써 자신은 열광자 이상이 아닌 상태로 남게 된다. 실제 그 열광자 각각은 바로 그렇게 홀로 대중 앞에 나설 수 있는 개별인물에 대한 동경 및 일종의 동일화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이상의 의미에서 현대의 아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집단정신에 사로잡히기 쉽다. 가정에서나 학교 모두 유능한 존재가 되라고 하고, 이상적인 존재가 되라고 한다. 아동기의 자아 성장은 결코 지적 유능함과 같은 자아의 기능에 기초하지 않는다. 현대의 아동들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대부분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집단정신의 영향에 관련된 것이다. 말하자면 아동이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나 아버지와 동일화하고 있는 상태에 대한 ‘무의식’의 강력한 보상적 행위가 만들어낸 증상일 것이다. 그 아동의 어머니나 아버지 모두 집단인들이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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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유능함...내가 NT라서인지 유능한게 너무 좋은데... 자아성장이 지적 유능함에 기초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럴법하고...부모가 성숙해야 아이의 자아성장도 수월하다는 이야긴데... 휘유~ 난 겁도 많고 귀찮은 것도 많은데...내가 행동하기 싫어하는 것은 지적 유능함에 집착때문일까? 여러가지 이론들을 알고 싶고 더 알고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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