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님 서거 때도 성당에 가지 않았던 게 마음에 조금 걸리긴 하다. 형식적인 것이 싫은 나로서는 관혼상제의 절차들이 번거롭게 느껴진다. '좋고싫음이 남아있으면 아직도 재앙이 남아있다는 것' 이라던 백성욱 선생님의 가르침이 마음에 떠오르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피하고 싶은 것이 번거로운 절차들이다.

교황님도 그렇지 않았을까? 신문에서 잠깐 보았는데, 그렇게 여러나라에서 여러 사람들이 온 것 하며, 광장을 가득 메운 인파들이 하느님 앞에 '송구스럽게' 또는 '불편하게' 느껴졌을지도...

하느님은 '열손가락 깨물어서 안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대로 우리를 느끼실지도 모른다. 교황님이나 살인자나 똑같이 사랑하실지도... 그들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 다 알고 계실 테니까... 하느님은 똑같이 사랑하시는데, 다만 보통 평범한 사람들보다 교황님이 하느님을 더 사랑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보면, 어떤 사람이나 다 존경심을 가지고 대해야 할텐데, 현재의 나는 '어떤 사람도 다 거기서 거기다.'라는 생각으로 대하고 있다. 훌륭하게 보이는 사람은 그 사람대로 그럴만한 배경이 있어서 그렇고,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은 그 사람대로 그럴만한 배경이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니까, 그의 노력조차도 '팔자' 또는 '행운'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언젠가는(몇 생 후에라도) 성불할 것을 믿으면 나아지려나? 낫고 싶다. 모든 사람을 존경심을 가지고 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울엄마도, 남편도, 올케도, 나를 불편하게 하는 친구도.

'노력'을 행운으로 여기지 말고, 몇 겁의 생애를 거치면서 얻어진 결과물로 생각하면...? 그리고, 내 눈에는 노력하는 걸로 비추어지지 않는 사람도 그 나름대로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하느님만이 아실 것이다, 누가 성불할지.  교황님일 수도 있고, 평범한 회사원일 수도 있고, 꼬마일 수도 있고, 범죄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 돌아가실 때 오른쪽에 있던 사형수가 낙원에 들어가리라는 약속을 받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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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글샘 > 삶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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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동물로서 출발한 존재이다. 그런데 간혹 그 한계를 벗어나서 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이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 예수님, (노자님도...?) 거기에 거의 도달한 사람들이 고승들과 성인, 성녀들 일거고...

'악'에 대해 많이들 연구했겠지만, 특별히 거기에 대해 읽은 책은 없고, 그냥 요즈음 생각해 보는건데, 우리의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동물적인 본능을 말하는 것 아닐까? '이드'의 영역.(첨가 - 그리고, 왜곡된 초자아, 자아의 영역도)

그리고, '선'은 하느님 마음에 가까운 마음일거고...  사람의 마음에는 하느님의 영, 사람의 영, 악의 영이 자리잡고 있다고도 한다. 하느님의 영과 악의 영 사이에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면서들 살게 되는 것이라고... 그래서 하느님과 가까워지려면 양심성찰을 부지런히 하고, 알게 된 것을 실천하라고 권한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막는 것이 '죄'이기 때문에 죄를 멀리 하고 기도를 충실히 하면 하느님께서 일상 속에서 우리와 함께 늘 하심을 느낄 수가 있다고... 역설적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갈수록, 자신이 완전하지 못함을 알게 되어 겸손해지는 것 같다.

-성찰하는 것이 좋을 항목들 : 거짓말(선의의 거짓말도), 성냄, 격분, 보복, 미움, 욕설, 중상, 질투, 거만, 교만, 비웃음, 악평(명예훼손), 적개심(악의), 완고한 고집, 잘난체함, 아는체, 억측, 자부심, 허영, 건방짐, 경솔, 아첨, 말씨가 퉁명스럽거나 날카롭거나로 불친절함, 게으름, 인색, 꾸밈 또는 ...체함, 냉정함, 미지근함, 실망, 욕정 등등

처음에 열심히 성찰할 때는 마음이 괴로왔다. 왜이리도 씻어야 될 마음의 때들이 많은지... 어디부터 어떻게 손을 대어야 할지 모를만큼...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니, 더 괴로워지면서, 하루빨리 털어버리고 싶었다. 원래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어둡기 때문에) 때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다가, 하느님의 빛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자신의 때를 더 잘 볼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소심증에 걸릴 필요는 없다고... 소심해지지 않으면서 양심을 성찰하는 것이 정말 어려웠다. 이젠 무덤덤하지만... '죄'라기보다 '잘못'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렇게 나자신과 화해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1년 정도 걸린 것 같다. 수치심을 극복해가는 경험, 죄책감에서 조금 벗어나는 경험(아직 덜 자유롭다), 어떠한 생각도 행동도 잘잘못을 판단하지 않고 담담하게 바라보며,  나 자신과 타인들을 관대하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 이런 것들이 겸손해야 생길 수 있는 것임을 요즈음 깨닫는다. '꿋꿋한 겸손'

담담하게!!! 종종 넘어지더라도 관대하게!!! 나도, 다른 사람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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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름간  어지럽고 힘들었던 건 알고 보니, '불안장애' 증상이었다. 그걸 알고 사흘만에 '부활'했다. 지난 일요일 부활절에...^^

 남편이 전에 바리사이파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가끔 '살기가 귀찮다'고 말하곤 하는 점, 실제로 실생활을 귀찮아 하는 점 등등 때문에 아이들을 두고 마음놓고 세상을 떠날 수 없었다. 남편이 본래는 밝은 사람인데, 나로 인해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어서 밝지 못했으니까... 어쩌면 나도 남편으로 인해 더 어두워졌는지도 모르고... 상호 영향을 주고받을텐데, 서로 좋은 영향도 어느정도 주고받았겠지만, 주로는 나쁜 쪽으로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서로  배려를 조금 주고 많이 받으려고 하면서...

 그랬는데, 내가 상담도 받고 하느님을 알게 되면서, 나도 서서히 변했지만, 남편도 많이 긍정적으로 변했다. 그래서, 이제는 안심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이번 설 즈음해서 들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때부터 조금씩 아파지기 시작했는데,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과 '신과 나눈 이야기'를 읽으면서 인디언들의 영성에 깊은 공감이 느껴지면서 살고싶은 방식이 내 마음속에 자리잡게 된 것 같다. 그러면서 살고싶어졌던 것 같다. '의무'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 그렇지만 사랑으로 '의무'들을 주체적으로 하는 삶. 내적으로 자유로운 삶. 'must'가 아닌, 'hope'의 삶.

가족들을 더 잘 돌보고 아이들의 발달을 지켜보며 지지해 주고, 책도 더 많이 읽고, 아이들이 독립할 나이가 되면 이웃을 위해 내가 하고싶은 일을 본격적으로 하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는  3월 들어서면서,  '예수, 자유의 길'을 읽으면서 하느님 믿는 방식을 달리 해보겠다고 모색하면서부터 못일어날 정도로 어지럽고 눈이 침침하고 심장이 약하고 빠르게 뛰고... 하는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해서, 두려울 정도였다. 내과랑 이비인후과, 안과까지 가보았다. 내과에서는 별 이상 없고 빈혈만 약간 있다 하고, 귀가 멍한 증상과 어지럼증 때문에 이비인후과 약을 먹었는데, 별 차도가 없었다.  상담소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고서, 그것이 불안장애 증세(어지럼증과 심장박동 항진에다, 신체의 떨림, 설사, 잠 깊이 못자는 것, 잘 못 먹는 것 포함)인 것을 알았다. 일종의 신경증. 신경증이 이렇게 강한 증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니... 알고 나서 사흘동안, 살기를 원한다고, 기쁘게 살기를, 자유롭게 살기를 원한다고 기도드렸다. 그리고, 나았다. 불안장애는 또 뭐란 말인가... 그냥 불안한 정도가 아니라, 장애까지 올 정도면... 그만큼 불안이 심했다는 얘기다. 무의식 속으로 억압해 넣어서 크게 못 느꼈을 뿐... 작은 불안들은 있었다. 내가 직면할 수 있을 정도의 소소한 불안들은... 하지만, 큰 불안요소는 내가 억압했었나보다. 내가 교회활동을 안하면 하느님께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혹은 내가 하느님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 은총과 보호없이, 만일 아이나 내가 일찍 죽는다면 그걸 못견딜 거라는 데서 오는 불안, 어렸을 때 제대로 따뜻하게 보호받지 못함으로 인해 생긴, 누적된 불안들의 총합, 내가 태어나기 전에, 백일만에 죽은 딸아이로 인해 생긴, 내가 아플 때면 우리 부모님이 느끼셨을 불안이 나에게 전염된 걸로 인한 불안 등등.

 내가 많이 나아져서 정신력이 꽤 강해지자, 예수님을 따르는 방식을 달리 해보겠다는 배짱이 생긴 거고, 그러자  억압된 불안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던 것 같다.

 성서 표현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악한 영을 쫓아내실 때, 빠져나가면서 사람을 쓰러뜨리고 나갔다는 대목들이 있는데,  실감이 났다.

 나의 이 불안 문제와 삶에 대한 희망 문제는 책들을 통해 예수님께서 현존하시며 치유해 주신 기분이 든다. 두 책 다 가톨릭신자인 친구들이 좋은 책이라며 빌려주어서 읽게 된 책들이다. '예수, 자유의 길'은 친구의 서재에서 list를 보다가, 어찌어찌 알라딘에서 알게 되었고...

앞으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모색하면서, '한결 새로운 나'로 변신중이다. 아마도 6개월쯤 걸릴 것 같은 예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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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에서...

할아버지의 어록

-"꿀벌인 티비들만 자기들이 쓸 것보다 더 많은 꿀을 저장해 두지... 그러니 곰한테도 뺏기고... 우리 체로키한테도 뺏기기도 하지. 그놈들은 언제나 자기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쌓아두고 싶어 하는 사람들하고 똑같아... 뒤룩뒤룩 살찐 사람들 말이야. 그런 사람들은 그러고도 또 남의 걸 빼앗아오고 싶어하지. 그러니 전쟁이 일어나고... 그러고 나면 또 길고 긴 협상이 시작되지. 조금이라도 자기 몫을 더 늘리려고 말이다. 그들은 자기가 먼저 깃발을 꽂았기 때문에 그럴 권리가 있다고 하지... 그러니 사람들은 그놈의 깃발 때문에 서서히 죽어가는 셈이야... 하지만 그들도 자연의 이치를 바꿀 수는 없어."

-작은나무가 소작인의 딸에게 신발을 선물했을 때, 소작인이 딸아이를 회초리로 때린 후, 작은나무에게 신발을 되돌려주며 "우린 동정 따윈 바라지 않아...아무한테도...특히 이교도 야만인들한테는..."이라고 했을 때, 한참 후에(작은나무의 마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할아버지는 "그 사람이 가진 건 자부심밖에 없을 거야... 좀 잘못 발휘되긴 했지만. 그 친구는 그 딸이나 자기 자식 중의 누군가가 자기들이 가질 수 없는 걸 좋아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던 거야. 그래서 자기들이 가질 수 없는 걸 받아들고 좋아할 때는 매를 드는 거란다... 애들이 깨달을 때까지 매를 때리지... "

할아버지는 내가 아직 이해가 안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려고 하지 않아. 그렇게 하려면 힘이 들거든.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게으름을 감추려고 이런저런 말들을 함부로 하고, 다른 사람들더러 '떠돌이'라고 부른단다."

 

할머니의 가르침

-할머니는 사람들은 누구나 두개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하셨다. 하나의 마음은 몸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꾸려가는 마음이다. 몸을 위해서 잠자리나 먹을 것 따위를 마련할 때는 이 마음을 써야 한다. 그리고 짝짓기를 하고 아이를 가지려 할 때도 이 마음을 써야 한다. 자기 몸이 살아가려면 누구나 이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것들과 전혀 관계없는 또 다른 마음이 있다. 할머니는 이 마음을 영혼의 마음이라 부르셨다.

만일 몸을 꾸려가는 마음이 욕심을 부리고 교활한 생각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해칠 일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이익볼 생각만 하고 있으면...영혼의 마음은 점점 더 졸아들어서 밤톨보다 더 작아지게 된다. 몸이 죽으면 몸을 꾸려가는 마음도 함께 죽는다. 하지만 다른 모든 것이 다 없어져도 영혼의 마음만은 그대로 남아있는다. 그래서 평생 욕심부리면서 살아온 사람은 죽고 나면 밤톨만한 영혼밖에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다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그런 사람이 다시 태어날 때에는 밤톨만한 영혼만을 갖고 태어나게 되어 세상의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몸을 꾸려가는 마음이 그보다 더 커지면, 영혼의 마음은 땅콩알만하게 줄어들었다가 결국에는 그것마저도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말하자면 영혼의 마음을 완전히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이 되고 만다.

영혼의 마음은 근육과 비슷해서 쓰면 쓸수록 더 커지고 강해진다. 마음을 더 크고 튼튼하게 가꿀 수 있는 비결은 오직 한 가지, 상대를 이해하는 데 마음을 쓰는 것뿐이다. 게다가 몸을 꾸려가는 마음이 욕심부리는 걸 그만두지 않으면 영혼의 마음으로 가는 문은 절대 열리지 않는다. 욕심을 부리지 않아야 비로소 이해라는 걸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더 많이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영혼의 마음도 더 커진다. 이해와 사랑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사랑하는 체 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하셨다.

영혼의 마음이 자꾸자꾸 커지고 튼튼해지면, 결국에는 지나온 모든 전생의 삶이 보이고 더 이상 육신의 죽음을 겪지 않는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할머니는 내 비밀장소에 있는 사향나무에게도 나무의 영혼이 있다는 걸 내가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한번은 작은나무의 부주의로 할아버지가 방울뱀에게 물려 거의 돌아가실 뻔 했을 때, 작은나무가 죄책감을 갖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건 누구의 탓도 아니며, 심지어 방울뱀의 탓도 아니라고 하셨다. 또 이미 일어난 일을 놓고 잘잘못을 따져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방울뱀 껍질로 작은나무의 벨트를 만들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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