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기술-공격적이지 않으면서 단호하게 나를 표현하는, 폴렛 데일, 푸른숲

'고장난 녹음기 테크닉'은 우리의 타당한 의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상대할 때 효과적이다. 또 까다로운 사람들을 상대할 때도 한번 써볼 만한 방법이다. 우리가 할 일은 상대방이 어떤 말로 반격하든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마치 고장난 녹음기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다. 아무리 끈질기게 공격하거나 저항하는 사람도 이 '녹음기 전략'에는 두 손을 들고 만다. 고장난 녹음기와 말씨름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사례-나는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주면서 5주의 기한을 주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에 제출되는 논문은 어떤 이유에서든 받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마침내 5주 기한이 끝나는 날, 과제를 제출하지 않은 몇몇 학생이 나를 찾아왔다. 그들 가운데 한 학생이 예외를 인정해달라며 나를 이런 식으로 조종하려고 했다.

댄:정말 죄송합니다, 교수님. 하지만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논문을 끝내지 못했어요.

나:미안하다, 댄. 하지만 5주 기한이라고 공지를 했잖니. 시한이 지난 과제는 받을 수 없다.

댄:하지만 지난밤 컴퓨터 프린터가 고장이 났어요.

나:안됐구나, 댄. 하지만 5주 기한이라고 공지를 했잖니. 시한이 지난 과제는 받을 수 없단다.

댄:지금 제 플로피 디스크 안에 과제가 담겨 있어요.

나: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5주 기한이라고 공지를 했잖니. 시한이 지난 과제는 받을 수 없단다.

댄:교수님, 제발....교수님 강의에서 최소한 B학점을 받지 못하면 제 평점이 뚝 떨어질 거예요.

나: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5주 기한이라고 공지를 했잖니. 시한이 지난 과제는 받을 수 없단다.

댄:장학금을 못 탈지도 몰라요.

나:참 안됐구나. 하지만 5주 기한이라고 공지를 했잖니. 시한이 지난 과제는 받을 수 없단다.

댄:정말 불공평하세요, 교수님.

나:당연히 넌 그렇게 느끼겠지. 하지만 5주 기한이라고 공지를 했잖니. 시한이 지난 과제는 받을 수 없단다.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과 그 사람의 노예가 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특히 여성들은 내키지 않아도 '예'라고 대답함으로써 자신의 시간과 요구를 소홀히 여기는 실수를 자주 저지른다. 변화를 이끌어내고 싶다면 가장 먼저 변해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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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태한 알로이시오 노래

마음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

'마음과 영혼의 동반자' 채준호 신부님 강의 들으러 갔다가 산 CD이다. 자그마한 체구와 수줍은 미소로 소년같은 분위기를 지닌 구태한 알로이시오가 소녀같은 글씨체로 'To. 박 프란치스카, 행복하세요'라고 써준 음반인데, 음색도 맑고 감미로워서 듣기에 좋다.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기에 그렇게  애틋한 듯 하면서 부드럽게 노래부를 수 있는지 궁금해진다. 아 ~ 세상은 아름답다. 푸른 하늘과 나무와 풀과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가 있고, 멋진 친구들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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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왜 변화하지 않는지 알 것 같다. 누구도 진심으로 이 사람을 사랑해주지 않기 때문 아닐까? 자신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진심어린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을...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도 이유가 있겠지.

엄격하신 아버지와 남편 공양과 육남매 키우며 농사까지 짓기에 바쁘신 어머니 밑에서, 같이 사신 외할머니의 비판적인 세계관에 젖고, 두 형들의 간섭 아래서, 누나와 여동생, 남동생 사이에서 자라느라 스스로 무언가를 원해본 적이 없었던 남편. 본래는 명랑하고 낙천적인 성격인 것 같은데... 유교적인 신념을 내사해서 마음 안에 돌멩이들을 가지고 있는지라, 가족에게도 그 신념을 주장하는 남편.

남편욕을 여기저기 실컷 하고 났더니, 이제는 더이상 욕하고 싶지 않다. 상담에서 들어주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는 것 같다. 그럴만 하겠다며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부정적인 감정을 실컷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다시 좋은 감정을 갖고 싶어지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람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게 되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 계속 욕하는 것이 만족스러운 사람은 그냥 거기에 머무르게 되겠지. 그것도 한가지 방식이니까. 대체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엔트로피가 낮은 단계(불평, 원망, 미움, 자학 등등)에서 만족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러기 때문에 자존감을 높여주면 스스로 엔트로피가 높은 단계(용서, 사랑, 평화 등등)에 올라가려는 의지를 갖게 될 것이고. 그래서, 진실성, 공감, 무조건적 존중이 칼 로저스의 인간중심 상담의 기본 방침이 된다.

어제 쓴 일기에서 남편이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고 편안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내 마음을 읽고, 내내 마음이 걸린다. '용서'가 안된 것이다. '나'를 상처준 것에 대해서. 나와 나의 ego를 동일시하는 단계이다. 하지만 나는 나의 ego이상이다. 그러고 싶다. 마음이 평화로울 때  내가 ego 이상이라는 포근함이 들다가도 누군가 내 ego를 건드리면 다시금 나와 ego를 동일시하는 단계로 돌아간다.

남편이 행복하기를 바라지 못하는 마음 이면에는 계산도 섞여있다. 그가 행복해지려면 내 행복을 줄여야 될 거라는 계산이...그래서 행복을 바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계산이 나쁜가? 하고 다시 생각해 보았다. 아니, 멀리 볼 때 나쁘지 않다. 내가 계산하는 게 행복한 수준이라면 계산해서 둘다 어느정도 행복한 수준으로 조절해야 될 것이다. 내가 행복해야, 아이들이 행복해야 남편도 더 행복해진다는 것을 느낄 때까지 알리자.(마음 깊은 곳에선 알 것이다. 다만, 어린시절 보아왔던 부모님 모습과, 여러가지 두려움, 그리고 내가 자신에게 준 상처때문에 어깃장 놓는 거겠지.) 내가 남편을 용서하면 남편도 나를 용서할 것이다.

어느 신부님이 '용쓰지 말라' 하셨는데, 그 말씀이 맞는 것 같다. 용쓰다보면 결과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만큼 하자. 그러고나서 세월이 흐른 뒤, 더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지면 그때 더 행복하게 해주자. 밥이 되어주고 싶을 때 밥이 되어주자. 지금은 아니다.

이제, 남편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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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들을 포함해서 아이들이 행복했으면

친구들이 행복했으면

남편이 편안한 사람이 되었으면('남편이 행복했으면 '이라는 말이 아직 안나오는 것이 마음 아프다. 내가 덜 치유됐기 때문일 것이다.)

친지들이 행복했으면

온 세상 사람들이 평화로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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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은 기뻐하는 나를 자주 알아차린다. 아이들과 놀이터에 가서 맨발로 모래밭을 밟으며 햇볕을 쬐면서 하늘과 나무를 볼 때 살아있음을 느낀다.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들을 때 미소짓게 되고, 같이 개그프로 보면서 깔깔거릴 때 즐거움을 깊이 느낀다.

언어로 전달되는 메세지는 45% 정도라고 하는 학자가 있다. 그중에서도 말의 뜻으로 전달되는 것은 7%에 불과하고, 나머지 38%는 말의 속도, 목소리 크기나 높이 등으로 전달된다고 하며, 나머지 55%는 자세, 몸짓, 눈깜빡임의 속도, 호흡 등 생리적인 반응으로 전달된다고 한다. 상대방에게 무의식적으로 보내는 메세지가 이렇게 많은 줄은 몰랐다.

결국 '말하고 듣기'는 온몸으로 하는 거라는 얘기다. 가끔 꿈을 통해, 말한 사람의 진실을 파악하게 되기도 한다는데...꿈을 '무의식의 지혜'라고 하는 이유를 알겠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알아차린 것보다 더 많은 무의식적 알아차림이 있다는 것! 결국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지, 나도 모르게 온몸으로 그 메세지를 보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인들에게서는 가만 있어도 맑은 기를 느끼게 된다는 것인가?)

내가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을 마지못해, 혹은 귀찮아하며 보내면 아이들은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시간을 보내도 만족스러워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난 토요일, 게슈탈트 치료하는 교수님의 강의를 들었는데, 그분이 20대 시절, 꿈에 자신이 작은 아이 모습으로 빌딩 옥상에 서있는데, 그 빌딩이 자꾸 몸체를 흔들어대며 자신을 떨어뜨리려 해서, 안떨어지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깨곤 했다고 한다. 어느날, 여자친구랑 '투다리'에서 술을 마시다가 생각이 나서 그 빌딩의 모습을 해보았단다. 머리 위에 꼬마가 서있고, 자신은 그 꼬마를 떨어뜨리려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 보는데, 순간 드는 느낌이 '꼭대기에 있는 꼬마가 귀찮다.'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동시에, 자기 부모에게서 느꼈던 느낌이 확 알아차려졌다고 한다. "아! 내가 어렸을 때에 우리 부모님은 내가 귀찮았구나!"하고... 여러가지 정황들을 볼 때 그 느낌이 맞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 강의를 들으며 우리 아이들도 나랑 남편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염려되었다. 나도 남편도 한가지에 몰두하면 다른 것 하기를 귀찮아하는 사람들이라서...그리고 꽤나 목적지향적인 사람들이라서 자주 아이들에게 방해받는 기분을 느꼈다. 후유~ 이 죄를 어찌할거나.

반성되면서, 한편으론, 나도, 이 교수님도 상담의 길로 접어들어 치유받고  다른 사람들을 돕고 있듯이, 때가 되면 누군가가 우리 아이들을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하며 희망을 갖는다. 우리 아이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도울 것이고.

요즈음은 무슨 일이든 아이들이 같이 하고자 하면 즐겁게 응해 주려고 한다. 쓰레기 버리러 갈 때, 수퍼마켓에 잠깐 가려고 할 때, 아이들이 따라 나서면 시간이 배 이상 걸리지만, 그것도 일종의 놀이로 즐기려 한다. 전엔 귀찮아하며 마지못해 같이 가곤 했다. 드물긴 하지만, 정말 바빠서 혼자 가겠다는데 따라가겠다고 떼를 쓰면 단호하게 거절하기도 하고. 예전엔 마음이 분주해선지 늘 바빴는데, 요즈음은 정말 바쁜 경우는 많지 않다. 생활이 많이 단순해졌나보다.

확실히 아이들이 많이 밝아졌다.

게슈탈트 치료에선 목표가 awareness(자각,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만큼 알아차림이 중요하다. 그를 위해 "생각하지 말고 감각으로 돌아와라."라고 한다. '지금여기'에서 있는 그대로의 느낌을 알아차리기. 개체가 유기체 욕구를 매 순간마다 억압하거나 투사하지 않고 잘 인식할 수 있을 때 건강하다고 본다.

치료기법으로 들어가면 아주 역동적이고 다분히 상담자의 끼가 필요한 치료방법들이 나온다. 매력적이다.

이 점에 대해서 상담소장님에게 질문했더니, 심리적으로 억압하는 것 없이 자유로우면 누구나 끼가 자연스럽게 발휘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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