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왜 변화하지 않는지 알 것 같다. 누구도 진심으로 이 사람을 사랑해주지 않기 때문 아닐까? 자신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진심어린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을...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도 이유가 있겠지.

엄격하신 아버지와 남편 공양과 육남매 키우며 농사까지 짓기에 바쁘신 어머니 밑에서, 같이 사신 외할머니의 비판적인 세계관에 젖고, 두 형들의 간섭 아래서, 누나와 여동생, 남동생 사이에서 자라느라 스스로 무언가를 원해본 적이 없었던 남편. 본래는 명랑하고 낙천적인 성격인 것 같은데... 유교적인 신념을 내사해서 마음 안에 돌멩이들을 가지고 있는지라, 가족에게도 그 신념을 주장하는 남편.

남편욕을 여기저기 실컷 하고 났더니, 이제는 더이상 욕하고 싶지 않다. 상담에서 들어주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는 것 같다. 그럴만 하겠다며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부정적인 감정을 실컷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다시 좋은 감정을 갖고 싶어지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람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게 되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 계속 욕하는 것이 만족스러운 사람은 그냥 거기에 머무르게 되겠지. 그것도 한가지 방식이니까. 대체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엔트로피가 낮은 단계(불평, 원망, 미움, 자학 등등)에서 만족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러기 때문에 자존감을 높여주면 스스로 엔트로피가 높은 단계(용서, 사랑, 평화 등등)에 올라가려는 의지를 갖게 될 것이고. 그래서, 진실성, 공감, 무조건적 존중이 칼 로저스의 인간중심 상담의 기본 방침이 된다.

어제 쓴 일기에서 남편이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고 편안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내 마음을 읽고, 내내 마음이 걸린다. '용서'가 안된 것이다. '나'를 상처준 것에 대해서. 나와 나의 ego를 동일시하는 단계이다. 하지만 나는 나의 ego이상이다. 그러고 싶다. 마음이 평화로울 때  내가 ego 이상이라는 포근함이 들다가도 누군가 내 ego를 건드리면 다시금 나와 ego를 동일시하는 단계로 돌아간다.

남편이 행복하기를 바라지 못하는 마음 이면에는 계산도 섞여있다. 그가 행복해지려면 내 행복을 줄여야 될 거라는 계산이...그래서 행복을 바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계산이 나쁜가? 하고 다시 생각해 보았다. 아니, 멀리 볼 때 나쁘지 않다. 내가 계산하는 게 행복한 수준이라면 계산해서 둘다 어느정도 행복한 수준으로 조절해야 될 것이다. 내가 행복해야, 아이들이 행복해야 남편도 더 행복해진다는 것을 느낄 때까지 알리자.(마음 깊은 곳에선 알 것이다. 다만, 어린시절 보아왔던 부모님 모습과, 여러가지 두려움, 그리고 내가 자신에게 준 상처때문에 어깃장 놓는 거겠지.) 내가 남편을 용서하면 남편도 나를 용서할 것이다.

어느 신부님이 '용쓰지 말라' 하셨는데, 그 말씀이 맞는 것 같다. 용쓰다보면 결과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만큼 하자. 그러고나서 세월이 흐른 뒤, 더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지면 그때 더 행복하게 해주자. 밥이 되어주고 싶을 때 밥이 되어주자. 지금은 아니다.

이제, 남편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