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의 모든 하루 - 김창완의 작고 사소한 것들에 대한 안부
김창완 지음 / 박하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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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어요>라는 책을 엉엉 울어가며 본 적이 있다.

그리고는 엄마, 나도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어, 라고 철이라곤 1도 없는 말을 했다가 등짝을 호되게 맞은 기억도.ㅎ

어린 나이에 힘든 투병을 해야 했던 소녀의 이야기였고, 그녀의 편지는 대개 이 사람 좋아뵈는 아저씨를 향했다.

어릴 때 기억이라 강렬했나보다.

내가 그때의 그 꼬마가 아니듯 이 분도 달라지셨을텐데, 이제는 구할 수도 없을 그 책을 떠올리는 것을 보면. 


잘 알지 못해도 느낌이 좋은 분이 있다.

책 역시 그랬다.

좋은 사람의 좋은 이야기는, 절로 미소를 머금게 한다.


부제가 "김창완의 작고 사소한 것들에 대한 안부".

제목이 말하듯, 스쳐지나가는 것들에 대한 단상을 담은 산문집이다. 


훈훈한 이야기가 많았다. 

길고양이가 도도해 자존심인가 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건 '생명'이었다는 이야기는 가슴이 찡했다.

"그 도도함이 생명의 잉태에 대한 어미 고양이의 강한 의지로 느껴졌습니다."

"별 볼일 없어 좋은 날입니다." 라는 말도 좋았다. 

나는 장기하의 <별일없이 산다>를 흥얼거리며 웃는 사람이라서.

일상도 악기처럼 튜닝해야 한다는 표현도, 음악과 함께 살아온 생을 보여주는 것 같아 상큼했다.

"날짜를 쓰다보니 날짜가 갓 태어난 아기같"다는 표현도 좋다. 

좀 처지는 날엔, 그것이 "그냥 잠깐 맡은 배역일 뿐"이라고 생각해보자는 것도 즐거움을 주고,

가끔, 손가락으로 카메라의 네모난 뷰파인더를 만들어 세상을 보라는 제안도, 혼자 조용히 따라해보며 씨익 미소짓게 했다.

오래된 LP판을 보며 중년의 아저씨가 울컥했다는 것도 가슴 짠한 무엇이 느껴진다. 

어머니의 분냄새, 우물가 냄새, 니스 냄새까지 기억나는데, 정작 "나의 냄새"는 "내 청춘의 냄새"는 기억에 없다는 것도..

애잔한 마음을 자아냈다.


"평소에 잊고 살지만 우리의 몸은 지금 최선을 다해 생명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런 말도 좋다. 
우리 모두 각자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는가.
본인에게 부족한 게 무엇인지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고, 굳이 찾아서까지 부족한 것을 알아서 뭐하겠느냐는 말도 상쾌하다.
인생에 순풍도 역풍도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땐 뻔한 소리를 하시려나 했는데, 
순풍도 역풍도 없이 노력한 만큼 얻는 편이 제일 좋은 것 같단 말도, 좋다. 

아, 좋다 좋다 좋다는 말을 남발하는 리뷰였다. 
책의 전반부 1/3에 좋은 글들이 몰려 있었고, 그 나머지는 살짝 지루하기도 했던 게 사실이다. 
오늘을 살아가는데 간절한 단 하나로 "어제의 기억"을 꼽겠다거나,
앞으로의 날이 아닌 "잃어버린 시간, 이미 써버린 시간이 나의 시간인 셈"이라는 말엔 동의할 수 없지만,
저자 역시 "사람이 가진 여러 재주 중에서도 잊는 능력이야말로 축복받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라며,
"선뜻선뜻 잊기로 합시다."라고 하니, 역시 만사엔 양면이 있다 정도로 이해한다. 

미소 짓게 하는, 좋은 점이 더 많은 책이었다.
문득, 아주 함량미달의 책이거나, 부인할 수 없는 장인의 걸작이 아니고서야, 좋고 나쁨의 차이는 종잇장 한 장 차이라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그 작은 차이가 큰 다름을 만든다.
오늘이 있어 행복하다는 감사의 표시로 하루를 시작하자는 말은 이미 식상한 표현이지만, 그럼에도 좋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마지막 글의 소제목은 "노란 리본이 있습니다".
그 날 이후, 어린이날이 마냥 해사하진 않다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깊은 공감을 표하며..
나이를 떠나, 다름을 떠나, 이렇게 저렇게 이세상을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충만감으로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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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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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무엇인가.

누군가는 상상력의 보고라고 하지 않던가. 

꿈을 꾸게 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것은 꿈이다. 


이야기는 끊임없이 반복되고, 중첩되고, 모순되며, 변주된다.

굳이 줄거리를 말하자면 이렇다.

1부. 이십대 후반의 전직 배우 아야미는 폐관을 앞둔 오디오 공연장의 사무직원으로 일한다. 

아야미에게 독일어 교습을 하는 극장장의 여자 후배 여니는, 아야미에게 한국에 처음 방문하는 어떤 작가를 도와주길 부탁한다.

마지막 공연 후, 아야미는 극장장과 '보이지 않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함께 여니를 찾아가지만 여니는 부재중이다. 

아야미와 극장장은 포도주를 먹기로 한다.

2부. 약을 배달하는 '부하'는 오래전부터 마음에 둔 시인을 쫓아 갔다가, 그에게 정기적으로 약을 배달받는 고객으로부터 시인이 독일어를 배우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종종 대화를 해서 돈을 버는 '프리랜서 여니'에게 전화한다. 

시인의 기록을 찾아보지만, 오래전 그녀 나이 49세에 이미 사망했다고 나온다. 

시인이 일하는 극장에 찾아가 "우리는 오랫동안 아는 사이"라고 말하나, 경비원에 의해 제지당한다. 

3부. 아야미는 여니의 부탁으로 한국에 도착한 볼피를 공항에서 데려왔고, 추리소설을 쓰는 볼피는 아야미를 여니라고 오인해 따라왔다. 

사진전에 갔다가 아야미는 김철썩 시인을 만나고, 아야미와 볼피는 광장의 스크린으로 아야미가 나온 가족찾기 방송 프로그램을 본다.

4부. 아야미와 극장장은 광장에서 포도주를 마신다.

극장장은 과거에 버스 운전을 했던 일을 이야기한다...


애써 이렇게 요약하며, 시간상 1부와 2부-4부-3부 순으로 봐야한다는 말도 덧붙일 수 있겠지만,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 어느 페이지부터 읽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다.  

꿈에 논리적 흐름이 있던가, 합리성이 있던가. 


극장장은 한 때 버스 운전을 했고, 시인이었고, 마을의 약사였고, 과일행상을 하던 아야미의 아버지이기도 했고, 추리소설을 쓰는 볼피이기도 하다.

아야미는 스물 여덟살의 전직 배우이기도 했고, 시인이기도 했으며, 부모가 잃어버린 여니였고, 제약회사 영업사원이었으나 얼마 전에 사망한 남자의 부인이었으며, 마흔 아홉살의, 북쪽 사막에서 온 여니, 술 파는 여자 마리아이기도 하다.

모든 것은 불가능하고, 그래서 또 가능하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는 꿈이 있다면 각색을 의심하겠다. 

아야미가 듣는 뱃사람을 위한 바다의 일기예보는 어디서나 들려온다. 

공연장에 오는 음향기사는 흰 버스를 타고 오고, 그 버스 안에는 책 읽는 누이들이 있다. 

어디서나 등장하는 거친 질감의 흰 무명 한복 차림의 시각장애인 소녀, 마치 맥박을 측정하듯 아야미의 손목 안쪽 어딘가를 지그시 누르던 소녀 또한 아야미이기도 하다. 

책 안에서 뿐인가. 이야기는 소설 안팎을 넘나든다.

2부 초반 부하가 익사할 뻔한 위기에서 구해낸 남자는, <눈먼 부엉이>의 저자 헤다야트를 떠올리게 하고 만다. 


"아야미는 미래의 아야미 혹은 과거의 아야미였다. 또는 동시에 존재하는 둘 다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아야미는 닭이고 노파였다. 그것은 동시에 존재하는 밤과 하루의 비밀이었다."

이야기의 흐름을 좇던 나는 느슨해진다. 그저 맡기면 됐다. 어떻게 흘러가든 상관없었다. 그 반복의 운율에 눈과 마음을 뺏겼다.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꿈이기 때문에, 아무 의미도 없는 공상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꿈인 동시에, 현실이다. 

내가 사는 현실은 이렇다. 

너의 어제와 나의 어제는 다르다. 우리가 함께 한 순간일지라도. 

너와 나의 이야기는 언제나 다르다. 


"나를 꿈꾸고 있는 자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어떤 신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라면, 내가 당신 상상의 산물이라면."

"우리가 서로의 상상의 산물이라는 사실에 건배."


또한 작가로서의 고민을 본다. 극장장은 추레한 시인들을 묘사한다. 

"(...) 오랜 시간 동안 좌절과 서글픔을 억누르는 모양새로 굳어진 안면 근육, 게다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흉함, 예외 없이 평균 이하로 왜소하거나 뚱뚱한 육체, 가난을 상징하는 모든 종류의 외모들(...) 그래요 그들은 그들은 마치 죽은 사람들 같았습니다!"

극장장이 만난 시인은 자신의 이름을 김철썩이라고, "자신의 관 위로 흙을 퍼붓는 소리"로 필명을 지었다 한다. 

김철썩 시인은 "자신은 타인을 설득하는 일에 한 번도 성공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그래서 항상 뭔가 말을 걸면, 그 대답으로 세상은 흙을 한 삽 떠서 그의 무덤에 퍼부었다는 거지요. 그래서 자신은 깊이깊이 묻히게 되었다고(...)" 한다.

시인의 무덤에 흙을 파묻는 것. 유치한 감상일지라 해도, 설득과 소통의 실패로 인한 절망으로 읽고 만다. 

그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아야미를 극장장은 제지하지만, 그 역시 다르지 않다. 

"나는 곧 그들이었던 셈이죠. (...) 그들이 곧 나 자신의 환영이었으므로, 혐오하는 것 말고 나에게 다른 대책이 남아있지 않았던 겁니다. 나는 스스로의 유령, 아마도 내 미래의 유령과 이야기를 나눈 겁니다."

"타인에게서 인정과 사랑을 받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말과 개념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처럼 자아의 세계에서도 과연 그만큼 결정적일까요... 왜냐하면... 당신이 말한대로 우리는 시인이 아니니까요. 언어로 타인을 설득하는 일이 우리의 소명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타인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슬픈 자의식조차도 마침내 느끼지 않게 된다면, 그건 너무나 고독해요, 아야미."

소통. 나와 닮은 사람을 사랑하는 모두의 소명. 

우리 서로 통하지 못했다는 의식조차 없다면, 그것은 서로 통하지 못했다는 사실보다 더 절망적이다.


'부하'는 여니에게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한다. 여니는 답한다. 

"그럼요, 당신 말을 듣겠어요. 그리고 내 말도 들어주세요. 그러기 위해서 당신은 전화한 거잖아요, 아닌가요?"


화자와 청자가 바뀌며 여러번 등장하는 말. "나를 다른 세계로 데려다줘요."

"당신도 이제 알고 있겠죠, 세개의 동굴은 나에게 속한 육신의 세개의 구멍에 해당한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은 곧 당신에게 속한 장소이기도 하답니다. 왜냐하면 그 장소는 당신에 의해서 비로소 성격을 부여받았기 때문이에요. 육체가 교통하는 요소들이 없다면 우리는 그 어떤 다른 통로를 통해서도 지금 내가 당신을 아는 것처럼, 그리고 당신이 나를 아는 것처럼 존재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열락의 거울상이 없다면, 우리의 원형은 존재하지 않아요."


이야기 자체의 즐거움, 작가로서의 정신, 잠깐의 작법까지.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을 떠올리기도 했다.

"아직 구체적으로 스토리를 구축한 건 아닙니다. 책을 쓸 때 나는 머릿속에 동시에 몇 가지의 시나리오를 만들어놓고 그걸 모두 글로 표현하려고 시도를 해요. 그래서 하나의 이야기가 여러가지 버전을 갖게 되지요. 그렇게 써놓은 모든 버전을 직접 읽어보고 그중에서 한가지로 선택을 해요."


더위를 묘사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나도 모르게 다가오는 여름을 떠올리며 몸서리치기까지.

"한여름의 대도시는 수천 년 전 열대의 컬트 종족이 세워놓고 사라져버린 혼몽의 사원이었다." "사람들의 꿈을 잠식했다."

"그 집은 열대성 무더위를 섬기기 위한 사원이나 마찬가지였다. 더위는 그 집에서 늪처럼 부풀면서 팽창했다. 그래서 몬순병이라고 불리는 정신의 어떤 고통스러운 몽환 상태를 생성했다."


'부하'는 시인이 되고 싶었으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단지 되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는 꿈과 현실이 동떨어진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전혀 모순으로 느끼지 않았다."


독서를 할 때 감정적 소모가 크고, 그걸 즐기면서도 경계하는 나는, 한 작가의 책을 완독해본 적이 없다.

여전히 그럴 계획은 없지만, 만일 완독하기 가장 두려운 작가를 꼽으라면 이 사람, 배수아 작가의 글을 택하겠다. 

그녀 작품에 대한 내 방식의 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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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을 꿰뚫는 세계사 독해 - 복잡한 현대를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역사
사토 마사루 지음, 신정원 옮김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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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공부하는 느낌으로 잘 봤다. 

부제로 "복잡한 현대를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역사"라 하고, 

역자 후기에도 "해석의 깊이가 다소 얕다고 느낄지도 모른다"고 단서를 달았지만, 내 수준엔 딱. 

일본인이 제국주의 어쩌고 하면 일단 움찔하게 되는 면이 있지만 침략을 옹호하는 식의 불편함은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전쟁을 저지해야할 대상으로, 내셔널리즘을 위험한 사상으로 경계하고 있으니,  

역사를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으로서 보면 될 듯하다. 

저자 역시 세계사는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봐야 함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요약 위주의 리뷰를 잘 하지 않지만 흥미로웠던 부분이 많아 정리해 둔다. 물론 내 관심가는 부분 위주.

이하, 특별히 밝히지 않는 한 본문의 요약이다.


저자가 밝히는 이 책의 목적은 세계사를 통해 아날로지analogy적인 관점을 기르고, 그리하여 전쟁을 저지하기 위함이다.

아날로지란, 비슷한 사물을 연관해 사고하는 방식으로, 이것으로 생소한 대상도 냉정하게 분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고.

저자는 오늘날 세계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제국주의를 되풀이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그래서 현 시대를 '신제국주의 시대'로 명명하고,

이 신제국주의 시대를 가동하고 있는 자본주의, 내셔널리즘, 종교, 이 3요소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해 나간다.  

 

신/구 제국주의는 공히 외부의 착취와 수탈을 통해 생존을 도모한다는 제국주의의 본질과 행동양식을 갖고 있고, 

국가 기능이 강화된다는 특징이 있다.

차이점이라면, 신제국주의는 식민지를 두지 않고 전면전을 피한다는 것. 


저자는 '품격 있는 제국주의'라는 말 자체가 아이러니임을 인정하면서도, 일본 스스로 제국주의국가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키나와라는 외부 영역이 엄연히 존재하고, 제국주의국가는 외부영역을 구조적으로 차별하므로.

"제국주의국가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일은, 자기 자신의 손이 이미 더러워져 있음을 아는 일이다."

"외부에 가하는 고통을 최소로 줄이고 일본 국가의 이익을 도모하는 일, 그러한 의식을 가지는 것이 품격 있는 제국주의로 향하는 첫걸음이다."

과거의 실수(전쟁)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역사에서 아날로지와 아이러니를 이끌어내는 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내셔널리즘에는 원초주의와 도구주의라는 상반된 두가지 사고가 있다고 한다. 

원초주의란, 민족에게 근거가 되는 구체적 원천(언어, 혈통, 지역, 종교 등)이 있다는 실체주의적 사고이다. 

도구주의는, 민족이란 개념을 엘리트들이 만들었다고 보는 사고이다. 

이는, 국민이란 마음속에 이미지로 그려지는 상상의 정치적 공동체라는 시각으로, 실체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도구주의의 대표학자는 앤더슨으로, 그는 그 이미지가 공유되는 방법으로 '출판자본주의'의 힘을 말한다.

너무나 다양한 구어로 출판을 할 수 없으므로 다수의 독자가 존재하는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출판용 언어'가 만들어지고,

이것이 국어 혹은 표준어라는 시스템으로 자리잡았다고. 

같은 글을 읽음으로써 '우리'라는 공통된 인식이 생겨난다고 보는 것이 앤더슨의 시각이다.


이 도구주의 학자의 한명인 어니스트 겔너가 내린 내셔널리즘의 정의는 이렇다.

"민족주의는 일차적으로 정치적 단위와 민족적 단위가 일치해야 하는 정치적 원리다."

내셔널리즘 사상이 있고 그 운동이 생긴 것이 아니라, 내셔널리즘 운동이 있고 나서 그 사상이 생긴 것이라고.

다시 말해, 최초에 민족이 있은 후 내셔널리즘이 생긴 것이 아니라 내셔널리즘이라는 운동에서 민족이 생겨났다는 것.

겔너는 내셔널리즘을 근대 특유의 현상이라고 여긴다. 

산업사회 이후로 사회가 유동화하면서 국가가 제공하는 보편적 교육이 필요해졌고, 이때 언어의 표준화가 시작된다.

이는 곧 광범위한 사람들의 문화적 동질성으로, 또 내셔널리즘으로 이어진다. 


원초주의는 내쳐지고, 도구주의 쪽이 더 상식적이라는 데 의견이 모이는 가운데, 앤서니 스미스의 의견은 조금 다르다. 

스미스는 근대적 네이션을 형성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보고 이것을 에스니ethnie라고 한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에스니란 공통의 조상·역사·문화, 어떤 특정 영역과의 결합을 지니며 내부에서의 연대감을 소유한, 이름을 가진 인간 집단"을 말한다.

에스니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 인위적으로 민족을 창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에스니를 가진 집단이 반드시 네이션을 형성하지는 않는다는 것. 

즉, 네이션이 생겨났기 때문에 에스니가 '발견'되는 것.


국제정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분쟁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현재 전세계에 문제가 되고 있는 IS는, 국가 지배가 아닌 이슬람혁명을 기치로 내걸고, 전세계를 이슬람화하겠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슬람원리주의는 단일 칼리프caliph(황제)가 지배하는 세계제국 수립을 지향하며,

그 교의에 의하면 혁명에 참여할 경우 반드시 승리한다.

왜? 성공하면 성공한 것이고, 그 과정에서 전사하면 순교한 것으로 저 세상에서 행복을 얻으므로. 이것이 그 위험성이다.


저자는 이슬람 제국주의가 폭주하는 위기를 바티칸(교황청)이 심각하게 인식했다고 보고 있다. 

기독교가 반격에 나서려면 젊고 건강한 교황이 중심이 되어 전략을 세우고 실행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2013년 베네딕토 16세의 이례적인 생전 퇴위는 가톨릭교회가 그 위기를 인식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한다.

바티칸이 이슬람원리주의를 봉쇄하기 위해 내놓은 수단은 '대화'이다. 

대화를 통해 이슬람 온건파를 아군으로 삼고, 아군이 된 이슬람교도가 과격파로 인해 이슬람교가 세계의 적으로 몰려서는 안된다고 여길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저자는 EU와 IS를 비교하는 작업을 거친다. 

둘을 아날로지적으로 보는 것이 터무니없어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저자 역시 언급하면서도, 

근대의 기본적 시스템인 국가나 민족이라는 틀을 초월하고자 한다는 점을 EU와 IS의 공통요소로 보고 있다. 

EU의 탄생 목적은 내셔널리즘의 억제에 있다. 

두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전쟁만큼은 하고 싶지 않다는 강한 염원이 EU라는 형태의 결정체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으로 종교적인 가치관을 중심으로 한 결합에는 민족이나 내셔널리즘을 초월하는 방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IS 또한 글로벌 이슬람주의를 통해 국가나 민족이라는 틀을 극복하고자 한다. 

단, EU와 IS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IS가 국가나 민족이라는 틀을 초월해 인간을 살해하는 사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슬람원리주의의 폭주를 저지할 방안으로, 

에스니를 자극함으로써 이슬람교에 대한 귀속의식보다도 민족의식을 강화시키는 것을 효과적으로 보고 있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자본주의가 세계화를 향해 나가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빈곤과 격차 확대라는 현상이 나타난다. 

부와 권력의 편재가 초래하는 사회불안과 정신의 공동화는 사회적 유대를 해체하고, 분리된 개인을 고립시킨다. 

그러면 국가는 내셔널리즘을 통해 국민 통합을 꾀하게 되고, 동시에 제국내 소수민족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민족 자립을 향해 움직인다. 


책은 현대의 신제국주의가 너무 큰 희생을 치르지 않고 모두가 공생하는 법을 모색하는 것으로 맺어지고 있다. 

구제국주의는 두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너무나 큰 희생을 치르고 끝났다. 

현대 신제국주의는 제3차 세계대전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우크라이나·팔레스타인·이라크·시리아 등지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전쟁과 분쟁을 해결하려면 단 하나의 방법, 더는 죽고 죽이고 싶지 않다고 여기는 것밖에 없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번째, 다시 한 번 계몽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인권·존엄·사랑·신뢰같은 오래된 개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이야기하는 것, 즉 바르트가 말하는 '불가능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것. 

두번째, 전근대의 정신,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감각을 연마해 국제사회의 수면 아래 벌어지는 일을 꿰뚫어야 한다.

'보이는 세계'를 중시하는 근대의 정신은 구제국주의 시대에 전쟁이라는 파국을 초래했다. 

또한, 국가나 민족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있음을 철저히 가르쳐야 한다. 세계에는 다양한 역사가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감각을 연마하려면 아날로지적으로 사고해야 하고, 

"근대의 종교인 자본주의와 내셔널리즘에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아날로지를 숙지하고 역사를 이야기하는 이성을 충분히 단련해야 한다."


책 내용이 매우 흥미로운데 정리해두지 않으면 금세 잊을 것 같아 작정하고 요약을 했다.

오랜만에 공부하는 기분, 쏠쏠하다. 


저자는 거듭 일본의 교과서와 다른 나라(러시아, 영국 등)의 교과서를 비교하며 

"역사 교과서를 비교해서 읽어보는 일은 역사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강조한다. 

또한, "일본의 교과서가 가치관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서 필요한 요소를 누락시키지 않을 정도로만 기술되어 있"다고 평가하며,

냉전이 종결된 후 역사교육이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개탄하기도 한다.

"그 결과 빈곤하고 조잡한 역사관이 제멋대로 날뛰고 있으며, 이는 헤이트스피치나 극단적인 자국지상사관으로 나타났다."


일본의 교육관련비용이 2013년 기준 OECD 국가 가운데 최하위라는 사실과 이로 인한 인재 유출을 우려하고 있다. 

한국도 좌시하지 말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합리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내셔널리즘은 근현대인의 종교"라고 말한다.

종교인 이상, 누구나 품고 있다고. 그러므로 내셔널리즘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역사의 다양한 견해를 깨달아야 한다고. 

누군가는, 우리는 모두 차별주의자라고 했다. 그것을 어떻게 드러내는지에 우리 사회의 행복이 달렸다고.

우리 안의 내셔널리즘과 차별주의자라. 

편견과 이기주의에 의한 폭력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생각해볼 만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에겐 상식적인 이야기일테지만 나처럼 세계사에 퍽 무지한 사람이라면, 

그렇지만 흐름을 한번쯤 이해하고 싶은 욕심이 있던 사람이라면, 흐릿하게나마 그 윤곽을 더듬을 수 있게 하는 좋은 책일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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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1
윌리엄 포크너 지음, 김명주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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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서, 나가사와는 작가 사후 삼십 년이 지나지 않은 책은 읽지 않는다고 했다.
현대 문학을 신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인생은 짧으므로, 시간의 세례를 받지 않은 작품을 읽는데 시간을 소모할 수 없다고. 
오래 전 그 문장이 떠오르는 순간. 이 작품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읽다가.

책의 내용을 말하자면 간단하다.
시골 마을, 오남매의 엄마 애디가 사망하자, 남편 앤스와  다섯 자녀가 그녀를 고향 제퍼슨에 묻어주기 위해 떠난 아흐레 간의 장례 여행기이다. 
그 여정은 물론 평탄치 않다. 폭우로 목숨을 걸고 강을 건너야 했고, 한여름의 무더위 아래 시체는 썩어가고, 화재 사건까지 일어난다. 
그도 간단치 않은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독자를 사로잡는 독특한 화법과 끊임없이 호기심을 자아내는 내용전개, 오롯이 개인적인 감상을 할 수 있는 시간까지.
대중소설과 순수소설, 그런 분류가 과연 가능한 것이라면, 이 책은 그 모든 요소를 한껏 충족시킨다고 생각한다. 


고향에 묻히고 싶다는 그녀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목숨을 걸만큼, 애디를 향한 그들의 사랑은 애절한가.
애디가 병석에 누워 있는 동안, 남편 앤스는 왕진비가 아까워 의사를 부르지 않는다. 희망적 기대일랑 일말도 없이, 그녀가 죽을 것을 확신한다. 
맏아들 캐시는 아직 살아 있는 그녀가 쓸 관을 짜느라 여념이 없다. 아직 살아 있는 어머니를 위한 관이라니. 
둘째 아들 달은 "난 엄마가 없기 때문에 엄마를 사랑할 수 없다" 말하고, 3달러를 벌기 위해 임종을 앞둔 그녀를 두고 집을 떠난다. 
외동 딸 듀이 델은 엄마의 죽음일랑 안중에도 없다. 이참에 읍내에 나가 원치 않게 하게 된 임신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급급할 뿐.
막내아들 바더만은 아직 어려 엄마의 죽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이 죽인 물고기와 어머니를 동일시하며 뒤죽박죽 되는 그의 사고 역시 흥미롭다.)

매정한 그 가족보다 남이 낫다고 여겨질 정도. 
알량한 제 기준에 의해서였을지언정, 이웃집 코라는 진심으로 애디를 위해 무릎꿇고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고, 그녀의 남편 툴 역시 일하지 않는 앤스를 도우며 살아왔다. 

물론 모든 남이 같으랴. 여기 직업정신이라고는 일말도 찾아볼 수 없는 의사 피바디도 있다.
그는 애디에게 왕진을 가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고, 내참, 죽어가는 사람을 되살려 놔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당당하기까지. "자네 마누라 따위가 내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생명을 우습게 여기는 작자가 그래도 의사랍시고 어찌됐든 환자를 도우러왔건만, 애디는 실낱같이 남은 생명력으로 의사를 거부한다. 
피바디의 통찰은 눈여겨볼 만하다.
"동정심과 연민에서 우러나와 진짜 도움을 주려고 하는 사람을 방에서 쫓아내고, 그 대신에 자기를 고작해야 마차 끄는 말로밖에 여기지 않던 짐승 같은 인간들에게 매달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이 바로, 이해 불능의 사랑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결국 애디는 죽는다. 
듀이 델이 죽은 엄마를 붙들고 하는 통곡은 한 편의 쇼와 같고, 피바디는 부인과 엄마를 잃은 그 가정의 식탁 앞에 앉아 음식 투정을 한다. 
앤스는 그녀의 죽음이 하느님의 뜻이라며 기다렸다는 듯 받아들이고,  "난 이제 새 이빨을 해넣을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한다. 
남편 앤스의 캐릭터는 단연 돋보인다. 22세 때 병을 앓은 이후로 한번도 일을 하지 않은 앤스. 
툴의 표현을 보자. "모든 일에 그러하듯이, 자신은 능력이 없어서 시도조차 할 수 없기를 마치 바라는 것 같다."
장남 캐시가 지붕에서 떨어져 여섯 달 동안 누워 있는 동안, 아들 대신 자신이 노동해야 했음에 분개하는 작자. 
일하지 않고 멍청하게 들판을 바라보는 달을 사람들이 정신병원에 보내라고 하자 역시 분노를 표한다. 
"법을 내세워 내 일손 하나를 빼앗으려고 한 것이다."
부르지 않았는데 의사가 오자 치료비를 내야 할 것을 한탄한다. 
이 모든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는 타인의 불운은 당연하지만 자신의 불운은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자신은 죄를 지은 일이 없으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읖조리는 말, "난 도무지 아무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다."
피바디가 그를 평하길, "나무에게는 뿌리를 주시면서 앤스 번드런에게는 발과 다리를 주시다니, 이건 하느님의 실수다."


애디의 죽음 앞에, 오직 셋째 아들 주얼만이 인간적인 반응을 보인다. 마지막 순간까지 애디가 보고 싶어한 아들, 주얼. 
그녀의 죽음을 준비하는 가족에게 "엄만 그 정도로 아프진 않아." 외치는 주얼.
살아 숨쉬고 있는 엄마가 보고 있는 앞에서 관을 짜는 캐시의 비정함과 숨조차 쉴 수 없도록 부채질 해대는 듀이 델의 무성의함에 분개한다. 
"하느님이 있다면, 도대체 하느님은 왜 있는지 모르겠군. 높은 언덕에 엄마와 나 단 둘이 서서, 저자들의 얼굴 위로 바위를 마구 굴려버리고 싶다. (...) 엄마가 조용히 지낼 수 있을 때까지."

그런 그에게 아버지 앤스가 하는 말은 코웃음이 나온다. "넌 엄마에 대해 애정이나 다정함이 조금도 없어. 넌 그래 본 적이 없지."
다른 형제들보다 키가 훌쩍 큰 주얼. 애디에게 유난히 많이 맞고, 유난히 예쁨받은 아들.  
코라 역시 애디가 주얼에게 가장 각별했음을 간파한다. "독살해 버리고 싶을 만큼 미워하는 앤스를 그래도 참아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주얼 때문이었다."

소설은 각 챕터마다 화자를 달리하는 독특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단 한 번 등장하는 애디의 독백은 강렬하고, 그녀의 깊은 비밀을 고백한다.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는 오랫동안 죽어 있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라고" 아버지께 들어온 애디는, 생명이 움트는 봄이 견디기 힘든 감수성 풍부한 여인이다.
앤스와 결혼하고, 캐시에 이어 달을 낳자, 그는 앤스에게 보복할 것을 결심하며, 자신을 고향 제퍼슨에 묻어줄 것을 요구한다. 
마음도 통하지 않고, 모든 노동까지 중단한 앤스와의 결혼생활은 고통이었다. 

"원한다면, 앤스나 그 단어를 쓰라고 해. 앤스 혹은 사랑, 아니면 거꾸로 쓰더라도 전혀 상관없었다." 
"앤스 혹은 사랑,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나의 고독은 이미 깨졌고, 깨졌기에 고독은 다시 완전하게 되었다. 앤스 혹은 사랑, 어떤 것이든 나의 완결된 고독의 테두리 바깥에 존재했다."
"그(앤스)는 내게 있어 이미 죽은 존재였다." 
그녀의 비밀은 "죄를 창조한 다음 그 죄를 정당화한 하느님이 임명한 도구" 휘트필드 목사와의 사이에서 주얼을 낳은 것이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 아무도 속이려고 하지 않았다. 발각된다 할지라도 난 그다지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들은 모두 나만의 자식들이다. 땅 위에서 거칠게 들끓는 피에서 나온 아이들이다. 나와, 살아있는 모든 존재로부터 나왔다. 누구의 자식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두의 자식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당당하다. 
아버지가 말했던, 살아 있는 이유가 죽을 준비를 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며, 동시에 그녀는 아버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남자란 일이 끝난 후 집을 청소하는 것에 대해서 알지 못하니까."

뒤이은 휘트필드의 독백은 역겹기 그지없다. 그는 애디가 죽기 직전에 변심해 그들의 죄를 사람들에게 고백할까 두려워한다. 
서둘러 애디의 집으로 가는 동안 홍수로 위험한 상황에 처하자 "나는 용서받았음을 분명히 깨달았다"고 말한다. 이 자에게 신앙과 용서는 얼마나 편리한가. 
그녀의 집에 도착해 애디가 이미 죽었음을 알자, 주님이 그의 속죄를 받아주셨다고 판단한다. 
그녀가 죄악을 발설하지 못하고 죽은 것이, 무한한 지혜를 지닌 하느님 덕분이라며 칭송하는 것.
"하느님의 손길이 나를 지켜주는 가운데, 거센 물살의 위험을 겪음으로써 나의 죄악은 용서된 것이다. 주님, 풍성하고 전능하신 사랑이여. 오, 찬양합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상가에 찾아 온 휘트필드를, 사람들은 존경할 것이다.

코라와 생전의 애디가 나눈 대화 또한 의미심장하다. 
인간은 하느님을 섬기고 찬양해야한다고 굳게 믿는 코라에게, 하루하루 스스로의 죄악을 깨닫고 속죄한다는 애디의 태도는 오만함일 뿐이다. 
"하느님이 아니라 당신이 죄악과 구원을 결정한다는 것은 오만이에요. 고통받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고, 고통속에서도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인간들이 해야 할 일이지요."
덧붙여 말하길, "휘트필드 목사님처럼 거룩하시고 하느님의 숨결을 가까이 느끼면서 사는 분이 당신을 위해 그토록 기도하고 애쓰셨는데도 아직도 그런 생각을 버리지 못했나요?"
코라는 생각한다. "그녀가 지은 죄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 주얼을 편애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징벌인 셈이다." 
애디가 답한다.
"그(주얼)는 나의 십자가이고 동시에 나의 구원일 거예요. 그는 나를 물과 불에서 구해낼 거예요. 비록 내가 삶을 포기할지라도 그가 나를 구할 거예요."


장례 여정 중, 홍수로 불어난 강을 건너다가 관은 물에 휩쓸려 갈 위기에 처하고, 화재사건으로 불에 타버릴 위기에도 처한다. 
이때, 목숨 걸고 어머니의 관을 물에서, 불에서 구해낸 것은, 바로 주얼이었다.
무더위에 견딜 수 없는 냄새를 풍기며, 온 동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온 가족 각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어 썩어가며 제퍼슨으로 향하는 그녀의 육신. 
그 여정을 멈출 수 있는 기회의 박탈. 그렇다. 그것은 벌이자, 곧 구원이었다. 

원제는 <As I Lay Dying>이다.
나는 민음사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읽었고, 다른 출판사(부북스)에서 <내가 누워 죽어갈 때>로 나온 판본도 있다.
철저하게 영문법상으로만 따지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용상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가 더 맞겠다 생각하다가,
어쩌면 <내가 누워 죽어갈 때>가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녀는 관 속에 누워서도 평화를 맞이하지 못하고 다시금 죽어가고 있는지도. 그렇게 고통을 자처함으로써 스스로 죄사함을 내리는 지도. 


여행의 마지막, 앤스는 의치와 새 부인을 얻는다. 문자 그대로, 부인을 땅에 묻자마자 새 부인을 들인 것. 
코라 역시 목화 수확이 끝나기도 전에 앤스가 새 여자를 얻을 것을 간파했지만, 이리도 빠를 줄은 몰랐을 것이다.
강을 건너다 다리를 다친 맏아들 캐시는 불구가 되지만, 새 엄마가 들고 오는 소형 축음기에 만족감을 표한다.
듀이 델은 낙태를 하려다가 능욕 당한다. 바더만은 다시 바나나를 먹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미친 장례 여정을 견딜 수 없던 달은 이를 멈추기 위해 화재 사건을 내고, 그 방화사실은 듀이 델에 의해 알려지게 된다. 그녀의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임으로. 그로 인해 달은 정신병원으로 보내진다.
엄마의 비밀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것 또한 달이었다. "나는 엄마 스스로가 속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과 주얼을 미워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왜냐하면 주얼을 사랑하기 때문에 엄마는 계속 속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숨겨야 하는 자신을 미워하면서, 숨겨야 하기 때문에 주얼 또한 미워하면서 말이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어머니 애디를 사랑한 달과 주얼, 다른 결말. 
어쩌면 삶의 비정함과 허무함을 일찍이 간파해버린 달이 애디를 가장 많이 닮은 자식이 아닐까 한다.


캐시의 독백,
"누가 미치고 누가 정상인지 말할 권리를 가진 사람이 있는지, 난 확신할 수 없다. 정상적이거나 비정상적인 갖가지 일을 저지른 후, 다시금 똑같은 공포와 놀라움으로 자신의 광기 어린 행위를 지켜보는 누군가가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주얼이 그토록 절박하게 엄마를 강물에서 건져낸 것은 어쩌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일지도 모른다"며 달의 행동에 정당성을 인정하면서도, 생각하기를 멈춘다. 달은 정신병원에 가게 된 처지를 비관하며 정녕 미친 듯이 웃어댄다.

책의 말미, 한 챕터의 제목은 화자가 "달"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내용은 마치 제삼자가 말하는 것만 같다. 
가령 "달은 잭슨에 갔다. 낄낄 웃고 있는 그를 기차에 집어 넣었다. 낄낄거리면서 기다란 기차 안에서 걸어다녔다." 
위의 캐시의 독백이 다시금 생각나는 대목. "(...) 자신의 광기 어린 행위를 지켜보는 누군가가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해석되었으므로, 절대 번역이나 편집의 실수는 아니길.)

이 훌륭한 소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다층적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윌리엄 포크너에게 페미니즘적 시각이 있었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여성의 삶을 각별히 바라보는 인식과 통찰이 있었음은 확실하다.
직접적인 화자로서는 단 한 번 등장하지만 제목부터 내용까지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애디의 인생, 그리고 듀이 델, 또한 코라도. 
애디의 말을 보라. "캐시가 태어났을 때, 모성이란 말은, 그 단어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고, 홀로 전전긍긍하는 듀이 델의 모습은 어떠한가.
"난 내가 걱정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 한다. 걱정할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울 줄도 모른다. 내가 울려고 애쓰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뜨거운 흙 속에 아무렇게나 떨어진 젖은 씨앗이 된 것 같다."  
무엇도 명확히 알아낼 수 없고, 볼 수도 없다고 말하는 듀이 델의 절망적 심리상태. 
"내가 누구인지, 내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여자인지도 모르겠고,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내가 깨어나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깨어나는 것의 반대가 무엇인지도 기억할 수 없었다. 그런데 무엇인가 스쳐가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을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애디도, 듀이 델도, 코라도, 다른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원초적 불행 속에 살아간 것은 아닌가.


신앙에 대한 것 역시 여러 해석이 가능할 테다. 전편 가득 모든 등장인물은 하느님을 말하고, 신앙을 고백한다. 신앙을 의심하는 것은 죽은 애디 뿐.
애디와 간음하여 주얼을 낳은 것은 하느님 가까이 있다는 휘트필드 목사이고, 애디가 앤스를 참고 살 수 있게 한 것은 사생아 주얼이라는 삶의 아이러니.
캐시가 다리를 다치게 된 것이 하필 교회 지붕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나로선 신앙을 찬양한다고도, 부정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녀를 살게 한 것도, 그녀를 두 번 죽게 한 것도, 주얼이었다. 그녀의 십자가이자 구원. 

작품 해설에서, 의외의 부분이 감명 깊고, 밑줄을 긋고 싶었다.
"머리는 명석한데 삶에 대한 성찰과 느낌이 없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상상력도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 포크너를 권하고 싶다. 한 점으로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하며 존재가 확대되는 기쁜 체험이 있길 바란다."

덧.
1. 바나나가 몇 번 등장하는데, 가령 "오로지 바나나를 먹기 위해서 그 모든 위험을 무릅쓰는 거다." 
평범한 일, 하찮은 일을 의미하는 정도로 이해되면서도, 나로선 생소한 표현이라 혹시 어떤 어원이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2. 200페이지에 "처녀 적 내 몸의 모양은   이다."라고 나온다. 
편집상 실수일까, 원문이 정녕 그러할까. 공백이 매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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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픔에 관하여
샤먼 앱트 러셀 지음, 곽명단 옮김, 손수미 감수 / 돌베개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굶주림에 관한 셀 수 없이 많은 지식이 총망라된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책이다.
이성만을 동원하고 싶었으나, 결국은 감성을 뒤흔들었다. 


총 14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단식 광대들>에서, 저자는 인간이 배고픔에 반응하도록 만들어져 있고, 또 그것을 견디도록 형성된 존재라는 것을 설명한다. 
"우리는 모두 단식 광대"라고. 
실제로 역사 속에서 단식은 공연으로 이용되기도 했고, 관객은 이에 환호했다고 한다. 그러나 곧 그 인기는 사그러들었다고.
저자는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단식 광대>를 인용하며, 인간은 죽은 단식 광대보다 생기 넘치는 새끼 표범을 사랑할 수밖에 없노라고 말한다.
"우리 대부분이 동질감을 갖는 것은 새끼 표범이다. (...) 음식이 생명이다. 생명은 자유다. 제약을 받는 생명조차 자유다."

예술 및 종교에서 배고픔은 통찰에 이를 수 있는 독특한 형식의 고난으로 간주되었지만, 결국 배고픔은 죽음의 문제라는 것에 저자는 주목한다.
한때 저자는 기근에 관한 자료 수집을 하며 세상에 굶는 사람이 10억명이란 사실, 미국에서조차 아이들이 굶는다는 사실에 비통함을 견딜 수 없었다고 한다.
"나는 내가 낳은 딸에게 내 몸을 먹였건만. 나중에 낳은 아들도, 나를 빨아먹었건만. (...) 인간의 삶을 중심으로 보면, 하와Eve도 프로메테우스도 오디세우스도 우리가 아닌가. 내 삶을 중심으로 보면, 나는 세상 사람을 먹였는데도 아이들은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비통함은 얼마가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우리 대부분은 극도로 차오른 피로감을 안다. 우리는 두려워한다. 타인들의 고통이 우리네 삶에서 기쁨을 덜어낼까봐. 고통을 겪는 사람들과 나란히 있으면 우리가 기쁨을 누리지 못할까봐.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아이를 가까이 두어서는 안된다. 먹을 게 없어서 아이가 죽어가다니 말도 안된다. 그런 아이는 주방 창문으로 내다보는 풍경을 박살낸다."
그리하여 애써 모른 척 했다고, "비통의 문도 닫아버렸다"고. 
그녀의 고백에서 타인의 고통을 모른 체 할 수 없는 사람이 가진 감수성과 죄책감, 인류애를 본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가 가진 보편적 감정임을.
문을 닫아버렸으나, "자물쇠까지 잠그지는 못했"던 그녀는, 막대한 노력이 들어갔음이 분명한 결실, 이 책을 저술해낸다. 

세계 각지에서는 기아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동시에 어느 한쪽에서는 사람들의 병리적 행동을 방조하는 건 아닌지, 일할 동기 부여에 방해가 되는 건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를 낸다. 
저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당신이 19세기에 살고 있지 않는 이상, 그런 주장은 여섯 살배기 한 아이를 보는 순간 설득력을 잃고 만다."

단식의 이로움을 설파하는 사람들도 많다. 
자살을 위해 단식을 했던 헨리 S. 테너가, 열흘의 단식 뒤 건강이 현저하게 좋아져 "몸 자체가 지닌 회복력"에 관한 순회강연을 다녔다는 것도 흥미로운 사례다. 
그러나 의학계는 대체로 이에 회의적이라고 한다. 반면 소식의 이로움에는 대체로 의견이 모이고 있다고. 
단, 아래의 사항 역시 주시해야겠다.
"그러나 모든 배고픔은 거의 예외 없이 부정적인 정서 반응을 유발한다. 배고픔의 메커니즘은 약간의 괴롭힘이다." 

책 전반에 걸쳐, 저자는 굶주림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과 그 과정을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러 종교(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에서의 단식 역시 적지 않게 다뤄지고 있으며,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이 어떻게 단식 투쟁을 했는지, 정부가 어떻게 그들을 막았는지는 여권 신장의 힘겨운 역사를,
마하트마 간디의 수십 차례에 걸친 단식 투쟁은 인도의 역사를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1981년 봄부터 여름사이 옥중에서 사망한 10인의 아일랜드 공화국군의 단식투쟁은, 잃어가던 대중의 지지를 되살렸다고 한다. 
단식 투쟁에 관한 윤리는 진화하고 있고, 인용된 에릭 에릭슨에 의하면 이것은 "숭고한 행위 못지 않게 타락한 행위가 될 수 있"지만, 
저자는 이것을 짚는다.
"그들의 무력함이 곧 그들이 바치는 제물이다. 그렇게 드러내는 약함이 그들이 지닌 힘이다."

7장 <굶주림 질병 연구>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조명하고 있다. 
숫자만으로도 울컥할 수 있다는 처음 알았다. 
"1941년, 점령당한 폴란드에서 허용된 1일 배급량은 독일인 2,613칼로리, 폴란드인 699칼로리, 유대인 184칼로리였다."
약 3년 동안 나치의 공식 정책은 기근이었고, 바르샤바 게토의 최고 책임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굶주림과 궁핍에 시달리다 사라질테니, 유대인 문제 중에서 남을 것은 오직 공동묘지뿐이다."
끊임없이 프리모 레비의 책 제목을 상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인간인가>.
병원이 있었으나 그 열악함으로 누군가는 "이 불쌍한 아이들의 목숨을 연장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인간적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유대인에게는 의사라는 직함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이때, 많은 의료 장비도, 연구실도 없었으나, 그들은 한 분야의 본격적인 연구에 돌입하고 성과를 이룩한다.
바로 굶주림에 대한 연구. 풍족한 것은 오로지 굶주림을 연구할 실험대상이었으므로. 
그들 스스로도 유대인 학살의 피해자였던 연구자들은 죽어가는 여인의 혈액을 검사하고, 윗몸일으키기를 시키기도 한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의사들은 구슬렸다. 윗몸일으키기를 한 번만 더 해 보라고. 주삿바늘을 한 번만 더 꼽자고. 그러면서 다짐했다. 이 처참한 참상에서 어떤 의미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고, 배우고 대대로 전해줄 무엇인가를 얻어낼지도 모른다고."
지옥과 다르지 않던 곳에서 의미를 찾던 그들 역시 대개는 살아남지 못한다. 그러나 굶주림 질병 연구 논문의 서문은 이렇게 씌어졌다. 
"그러니 그대는 그대가 이룩한 일로써 그 졸개에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아주 죽지는 않으리라고."

그 외에도 세계 각지의 수많은 연구들로 "제2차 세계대전은 배고픔이 풍성했던, 굶주림 연구의 보고였음이 드러났다."
소위 "미네소타 실험"으로 불리는 기아 연구에서, 전쟁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은 자진하여 의학 실험용 기니피그가 되기도 했다. 
이 실험은 기아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심신이 건강한 남성들로 구성된 피험자들은 정해진 기간 내, 안전과 정상적 환경이 보장된 실험이 이뤄졌음에도, 태도와 정신이 바뀌게 된다. 
기아는 그들에게 평정심, 관용, 참을성을 앗아갔고, 우울증은 물론 심지어 손가락을 자르는 자해를 하게 만든다.
실험이 끝난 뒤 신경과민을 호소하던 사람들은 호전되었으나 대부분은 과체중이었고, 무기력감과 부종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9장 <배고픔 인류학> 역시 굶주림이 하나의 문화권 전체를 어떻게 처절하게 변화시키는지 잘 보여준다.
오랫동안 굶주림에 시달려온 아프리카 여러 종족의 비정함, 중국의 식인 행위. 1959년 이후까지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이 듣기만 해도 힘겹다. 
제 아이의 죽음 앞에서조차 태연자약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굶주림의 폭력.

그녀가 전하는 숫자들. 
약 8억 명이 만성 영양실조에 걸린 채 세상을 살아간다.
이세상 곳곳에서 어린이가 1분에 11명씩 죽는다. 어린이 1억 5,000만명은 저체중, 1억 8,200만명은 발육부진.
과테말라에서는 5세 미만 어린이의 절반 가까이가 만성 영양실조이며, 약 16퍼센트는 급성 영양실조에 시달린다고 한다.
기근을 겪은 태아는 성인으로 살아가는 동안 내내 영향을 받고, 심지어 양극성 장애나 정신병으로 이어지기도 한다고. 

책의 말미, 저자는 모두의 각성을 강하게 촉구한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이, 세상 사람들 입에서 더는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하니까. 우리는 모르는 게 아니니까. 행동을 하지 않는 것뿐이니까."
"어른이 굶는 건, 현재의 문제이다. 아이가 굶주리면, 차원이 달라진다. 미래에도 문제가 된다. 아이는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잠재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정말 둘러댈 핑계가 없다. 굶주림을 없애기 위해 우리가 삶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 전부를 다 누릴 수 있다. 그저 우리의 탐욕스러움을 탓할밖에."

마지막 장은 <아일랜드 여행>이다. 
피할 수도 있는 재난을 방치한 대가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죽어가게 한 아일랜드의 대기근. 그들은 역사를 잊지 않았다. 
"아일랜드 대기근의 유산은 복합적이다. 분노와 죄책감과 내면화된 정의감이 혼재한다. 그러나 대기근 이야기에서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아마도 가장 놀랍도록 희망찬 것은, 오늘날의 아일랜드 상황일 것이다."
아일랜드의 발전과 성 패트릭의 전설을 이야기하며 저자는 책을 끝맺는다. 
"그 단식 앞에서, 하느님조차 굴복했다"고. 

제목에, 건방지게도 "배고픔에 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이라고 붙였다.
세상 어딘가에서는 단지 먹지 못해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일말이라도 도울 수 있다는 것.
죄책감을 이용하는 종류의 마케팅에 찬성하지 않지만,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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