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을 꿰뚫는 세계사 독해 - 복잡한 현대를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역사
사토 마사루 지음, 신정원 옮김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6년 5월
평점 :
품절


오랜만에 공부하는 느낌으로 잘 봤다. 

부제로 "복잡한 현대를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역사"라 하고, 

역자 후기에도 "해석의 깊이가 다소 얕다고 느낄지도 모른다"고 단서를 달았지만, 내 수준엔 딱. 

일본인이 제국주의 어쩌고 하면 일단 움찔하게 되는 면이 있지만 침략을 옹호하는 식의 불편함은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전쟁을 저지해야할 대상으로, 내셔널리즘을 위험한 사상으로 경계하고 있으니,  

역사를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으로서 보면 될 듯하다. 

저자 역시 세계사는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봐야 함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요약 위주의 리뷰를 잘 하지 않지만 흥미로웠던 부분이 많아 정리해 둔다. 물론 내 관심가는 부분 위주.

이하, 특별히 밝히지 않는 한 본문의 요약이다.


저자가 밝히는 이 책의 목적은 세계사를 통해 아날로지analogy적인 관점을 기르고, 그리하여 전쟁을 저지하기 위함이다.

아날로지란, 비슷한 사물을 연관해 사고하는 방식으로, 이것으로 생소한 대상도 냉정하게 분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고.

저자는 오늘날 세계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제국주의를 되풀이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그래서 현 시대를 '신제국주의 시대'로 명명하고,

이 신제국주의 시대를 가동하고 있는 자본주의, 내셔널리즘, 종교, 이 3요소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해 나간다.  

 

신/구 제국주의는 공히 외부의 착취와 수탈을 통해 생존을 도모한다는 제국주의의 본질과 행동양식을 갖고 있고, 

국가 기능이 강화된다는 특징이 있다.

차이점이라면, 신제국주의는 식민지를 두지 않고 전면전을 피한다는 것. 


저자는 '품격 있는 제국주의'라는 말 자체가 아이러니임을 인정하면서도, 일본 스스로 제국주의국가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키나와라는 외부 영역이 엄연히 존재하고, 제국주의국가는 외부영역을 구조적으로 차별하므로.

"제국주의국가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일은, 자기 자신의 손이 이미 더러워져 있음을 아는 일이다."

"외부에 가하는 고통을 최소로 줄이고 일본 국가의 이익을 도모하는 일, 그러한 의식을 가지는 것이 품격 있는 제국주의로 향하는 첫걸음이다."

과거의 실수(전쟁)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역사에서 아날로지와 아이러니를 이끌어내는 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내셔널리즘에는 원초주의와 도구주의라는 상반된 두가지 사고가 있다고 한다. 

원초주의란, 민족에게 근거가 되는 구체적 원천(언어, 혈통, 지역, 종교 등)이 있다는 실체주의적 사고이다. 

도구주의는, 민족이란 개념을 엘리트들이 만들었다고 보는 사고이다. 

이는, 국민이란 마음속에 이미지로 그려지는 상상의 정치적 공동체라는 시각으로, 실체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도구주의의 대표학자는 앤더슨으로, 그는 그 이미지가 공유되는 방법으로 '출판자본주의'의 힘을 말한다.

너무나 다양한 구어로 출판을 할 수 없으므로 다수의 독자가 존재하는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출판용 언어'가 만들어지고,

이것이 국어 혹은 표준어라는 시스템으로 자리잡았다고. 

같은 글을 읽음으로써 '우리'라는 공통된 인식이 생겨난다고 보는 것이 앤더슨의 시각이다.


이 도구주의 학자의 한명인 어니스트 겔너가 내린 내셔널리즘의 정의는 이렇다.

"민족주의는 일차적으로 정치적 단위와 민족적 단위가 일치해야 하는 정치적 원리다."

내셔널리즘 사상이 있고 그 운동이 생긴 것이 아니라, 내셔널리즘 운동이 있고 나서 그 사상이 생긴 것이라고.

다시 말해, 최초에 민족이 있은 후 내셔널리즘이 생긴 것이 아니라 내셔널리즘이라는 운동에서 민족이 생겨났다는 것.

겔너는 내셔널리즘을 근대 특유의 현상이라고 여긴다. 

산업사회 이후로 사회가 유동화하면서 국가가 제공하는 보편적 교육이 필요해졌고, 이때 언어의 표준화가 시작된다.

이는 곧 광범위한 사람들의 문화적 동질성으로, 또 내셔널리즘으로 이어진다. 


원초주의는 내쳐지고, 도구주의 쪽이 더 상식적이라는 데 의견이 모이는 가운데, 앤서니 스미스의 의견은 조금 다르다. 

스미스는 근대적 네이션을 형성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보고 이것을 에스니ethnie라고 한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에스니란 공통의 조상·역사·문화, 어떤 특정 영역과의 결합을 지니며 내부에서의 연대감을 소유한, 이름을 가진 인간 집단"을 말한다.

에스니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 인위적으로 민족을 창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에스니를 가진 집단이 반드시 네이션을 형성하지는 않는다는 것. 

즉, 네이션이 생겨났기 때문에 에스니가 '발견'되는 것.


국제정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분쟁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현재 전세계에 문제가 되고 있는 IS는, 국가 지배가 아닌 이슬람혁명을 기치로 내걸고, 전세계를 이슬람화하겠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슬람원리주의는 단일 칼리프caliph(황제)가 지배하는 세계제국 수립을 지향하며,

그 교의에 의하면 혁명에 참여할 경우 반드시 승리한다.

왜? 성공하면 성공한 것이고, 그 과정에서 전사하면 순교한 것으로 저 세상에서 행복을 얻으므로. 이것이 그 위험성이다.


저자는 이슬람 제국주의가 폭주하는 위기를 바티칸(교황청)이 심각하게 인식했다고 보고 있다. 

기독교가 반격에 나서려면 젊고 건강한 교황이 중심이 되어 전략을 세우고 실행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2013년 베네딕토 16세의 이례적인 생전 퇴위는 가톨릭교회가 그 위기를 인식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한다.

바티칸이 이슬람원리주의를 봉쇄하기 위해 내놓은 수단은 '대화'이다. 

대화를 통해 이슬람 온건파를 아군으로 삼고, 아군이 된 이슬람교도가 과격파로 인해 이슬람교가 세계의 적으로 몰려서는 안된다고 여길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저자는 EU와 IS를 비교하는 작업을 거친다. 

둘을 아날로지적으로 보는 것이 터무니없어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저자 역시 언급하면서도, 

근대의 기본적 시스템인 국가나 민족이라는 틀을 초월하고자 한다는 점을 EU와 IS의 공통요소로 보고 있다. 

EU의 탄생 목적은 내셔널리즘의 억제에 있다. 

두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전쟁만큼은 하고 싶지 않다는 강한 염원이 EU라는 형태의 결정체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으로 종교적인 가치관을 중심으로 한 결합에는 민족이나 내셔널리즘을 초월하는 방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IS 또한 글로벌 이슬람주의를 통해 국가나 민족이라는 틀을 극복하고자 한다. 

단, EU와 IS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IS가 국가나 민족이라는 틀을 초월해 인간을 살해하는 사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슬람원리주의의 폭주를 저지할 방안으로, 

에스니를 자극함으로써 이슬람교에 대한 귀속의식보다도 민족의식을 강화시키는 것을 효과적으로 보고 있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자본주의가 세계화를 향해 나가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빈곤과 격차 확대라는 현상이 나타난다. 

부와 권력의 편재가 초래하는 사회불안과 정신의 공동화는 사회적 유대를 해체하고, 분리된 개인을 고립시킨다. 

그러면 국가는 내셔널리즘을 통해 국민 통합을 꾀하게 되고, 동시에 제국내 소수민족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민족 자립을 향해 움직인다. 


책은 현대의 신제국주의가 너무 큰 희생을 치르지 않고 모두가 공생하는 법을 모색하는 것으로 맺어지고 있다. 

구제국주의는 두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너무나 큰 희생을 치르고 끝났다. 

현대 신제국주의는 제3차 세계대전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우크라이나·팔레스타인·이라크·시리아 등지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전쟁과 분쟁을 해결하려면 단 하나의 방법, 더는 죽고 죽이고 싶지 않다고 여기는 것밖에 없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번째, 다시 한 번 계몽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인권·존엄·사랑·신뢰같은 오래된 개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이야기하는 것, 즉 바르트가 말하는 '불가능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것. 

두번째, 전근대의 정신,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감각을 연마해 국제사회의 수면 아래 벌어지는 일을 꿰뚫어야 한다.

'보이는 세계'를 중시하는 근대의 정신은 구제국주의 시대에 전쟁이라는 파국을 초래했다. 

또한, 국가나 민족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있음을 철저히 가르쳐야 한다. 세계에는 다양한 역사가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감각을 연마하려면 아날로지적으로 사고해야 하고, 

"근대의 종교인 자본주의와 내셔널리즘에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아날로지를 숙지하고 역사를 이야기하는 이성을 충분히 단련해야 한다."


책 내용이 매우 흥미로운데 정리해두지 않으면 금세 잊을 것 같아 작정하고 요약을 했다.

오랜만에 공부하는 기분, 쏠쏠하다. 


저자는 거듭 일본의 교과서와 다른 나라(러시아, 영국 등)의 교과서를 비교하며 

"역사 교과서를 비교해서 읽어보는 일은 역사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강조한다. 

또한, "일본의 교과서가 가치관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서 필요한 요소를 누락시키지 않을 정도로만 기술되어 있"다고 평가하며,

냉전이 종결된 후 역사교육이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개탄하기도 한다.

"그 결과 빈곤하고 조잡한 역사관이 제멋대로 날뛰고 있으며, 이는 헤이트스피치나 극단적인 자국지상사관으로 나타났다."


일본의 교육관련비용이 2013년 기준 OECD 국가 가운데 최하위라는 사실과 이로 인한 인재 유출을 우려하고 있다. 

한국도 좌시하지 말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합리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내셔널리즘은 근현대인의 종교"라고 말한다.

종교인 이상, 누구나 품고 있다고. 그러므로 내셔널리즘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역사의 다양한 견해를 깨달아야 한다고. 

누군가는, 우리는 모두 차별주의자라고 했다. 그것을 어떻게 드러내는지에 우리 사회의 행복이 달렸다고.

우리 안의 내셔널리즘과 차별주의자라. 

편견과 이기주의에 의한 폭력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생각해볼 만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에겐 상식적인 이야기일테지만 나처럼 세계사에 퍽 무지한 사람이라면, 

그렇지만 흐름을 한번쯤 이해하고 싶은 욕심이 있던 사람이라면, 흐릿하게나마 그 윤곽을 더듬을 수 있게 하는 좋은 책일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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