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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은 무엇인가.
누군가는 상상력의 보고라고 하지 않던가.
꿈을 꾸게 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것은 꿈이다.
이야기는 끊임없이 반복되고, 중첩되고, 모순되며, 변주된다.
굳이 줄거리를 말하자면 이렇다.
1부. 이십대 후반의 전직 배우 아야미는 폐관을 앞둔 오디오 공연장의 사무직원으로 일한다.
아야미에게 독일어 교습을 하는 극장장의 여자 후배 여니는, 아야미에게 한국에 처음 방문하는 어떤 작가를 도와주길 부탁한다.
마지막 공연 후, 아야미는 극장장과 '보이지 않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함께 여니를 찾아가지만 여니는 부재중이다.
아야미와 극장장은 포도주를 먹기로 한다.
2부. 약을 배달하는 '부하'는 오래전부터 마음에 둔 시인을 쫓아 갔다가, 그에게 정기적으로 약을 배달받는 고객으로부터 시인이 독일어를 배우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종종 대화를 해서 돈을 버는 '프리랜서 여니'에게 전화한다.
시인의 기록을 찾아보지만, 오래전 그녀 나이 49세에 이미 사망했다고 나온다.
시인이 일하는 극장에 찾아가 "우리는 오랫동안 아는 사이"라고 말하나, 경비원에 의해 제지당한다.
3부. 아야미는 여니의 부탁으로 한국에 도착한 볼피를 공항에서 데려왔고, 추리소설을 쓰는 볼피는 아야미를 여니라고 오인해 따라왔다.
사진전에 갔다가 아야미는 김철썩 시인을 만나고, 아야미와 볼피는 광장의 스크린으로 아야미가 나온 가족찾기 방송 프로그램을 본다.
4부. 아야미와 극장장은 광장에서 포도주를 마신다.
극장장은 과거에 버스 운전을 했던 일을 이야기한다...
애써 이렇게 요약하며, 시간상 1부와 2부-4부-3부 순으로 봐야한다는 말도 덧붙일 수 있겠지만,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 어느 페이지부터 읽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다.
꿈에 논리적 흐름이 있던가, 합리성이 있던가.
극장장은 한 때 버스 운전을 했고, 시인이었고, 마을의 약사였고, 과일행상을 하던 아야미의 아버지이기도 했고, 추리소설을 쓰는 볼피이기도 하다.
아야미는 스물 여덟살의 전직 배우이기도 했고, 시인이기도 했으며, 부모가 잃어버린 여니였고, 제약회사 영업사원이었으나 얼마 전에 사망한 남자의 부인이었으며, 마흔 아홉살의, 북쪽 사막에서 온 여니, 술 파는 여자 마리아이기도 하다.
모든 것은 불가능하고, 그래서 또 가능하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는 꿈이 있다면 각색을 의심하겠다.
아야미가 듣는 뱃사람을 위한 바다의 일기예보는 어디서나 들려온다.
공연장에 오는 음향기사는 흰 버스를 타고 오고, 그 버스 안에는 책 읽는 누이들이 있다.
어디서나 등장하는 거친 질감의 흰 무명 한복 차림의 시각장애인 소녀, 마치 맥박을 측정하듯 아야미의 손목 안쪽 어딘가를 지그시 누르던 소녀 또한 아야미이기도 하다.
책 안에서 뿐인가. 이야기는 소설 안팎을 넘나든다.
2부 초반 부하가 익사할 뻔한 위기에서 구해낸 남자는, <눈먼 부엉이>의 저자 헤다야트를 떠올리게 하고 만다.
"아야미는 미래의 아야미 혹은 과거의 아야미였다. 또는 동시에 존재하는 둘 다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아야미는 닭이고 노파였다. 그것은 동시에 존재하는 밤과 하루의 비밀이었다."
이야기의 흐름을 좇던 나는 느슨해진다. 그저 맡기면 됐다. 어떻게 흘러가든 상관없었다. 그 반복의 운율에 눈과 마음을 뺏겼다.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꿈이기 때문에, 아무 의미도 없는 공상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꿈인 동시에, 현실이다.
내가 사는 현실은 이렇다.
너의 어제와 나의 어제는 다르다. 우리가 함께 한 순간일지라도.
너와 나의 이야기는 언제나 다르다.
"나를 꿈꾸고 있는 자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어떤 신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라면, 내가 당신 상상의 산물이라면."
"우리가 서로의 상상의 산물이라는 사실에 건배."
또한 작가로서의 고민을 본다. 극장장은 추레한 시인들을 묘사한다.
"(...) 오랜 시간 동안 좌절과 서글픔을 억누르는 모양새로 굳어진 안면 근육, 게다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흉함, 예외 없이 평균 이하로 왜소하거나 뚱뚱한 육체, 가난을 상징하는 모든 종류의 외모들(...) 그래요 그들은 그들은 마치 죽은 사람들 같았습니다!"
극장장이 만난 시인은 자신의 이름을 김철썩이라고, "자신의 관 위로 흙을 퍼붓는 소리"로 필명을 지었다 한다.
김철썩 시인은 "자신은 타인을 설득하는 일에 한 번도 성공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그래서 항상 뭔가 말을 걸면, 그 대답으로 세상은 흙을 한 삽 떠서 그의 무덤에 퍼부었다는 거지요. 그래서 자신은 깊이깊이 묻히게 되었다고(...)" 한다.
시인의 무덤에 흙을 파묻는 것. 유치한 감상일지라 해도, 설득과 소통의 실패로 인한 절망으로 읽고 만다.
그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아야미를 극장장은 제지하지만, 그 역시 다르지 않다.
"나는 곧 그들이었던 셈이죠. (...) 그들이 곧 나 자신의 환영이었으므로, 혐오하는 것 말고 나에게 다른 대책이 남아있지 않았던 겁니다. 나는 스스로의 유령, 아마도 내 미래의 유령과 이야기를 나눈 겁니다."
"타인에게서 인정과 사랑을 받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말과 개념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처럼 자아의 세계에서도 과연 그만큼 결정적일까요... 왜냐하면... 당신이 말한대로 우리는 시인이 아니니까요. 언어로 타인을 설득하는 일이 우리의 소명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타인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슬픈 자의식조차도 마침내 느끼지 않게 된다면, 그건 너무나 고독해요, 아야미."
소통. 나와 닮은 사람을 사랑하는 모두의 소명.
우리 서로 통하지 못했다는 의식조차 없다면, 그것은 서로 통하지 못했다는 사실보다 더 절망적이다.
'부하'는 여니에게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한다. 여니는 답한다.
"그럼요, 당신 말을 듣겠어요. 그리고 내 말도 들어주세요. 그러기 위해서 당신은 전화한 거잖아요, 아닌가요?"
화자와 청자가 바뀌며 여러번 등장하는 말. "나를 다른 세계로 데려다줘요."
"당신도 이제 알고 있겠죠, 세개의 동굴은 나에게 속한 육신의 세개의 구멍에 해당한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은 곧 당신에게 속한 장소이기도 하답니다. 왜냐하면 그 장소는 당신에 의해서 비로소 성격을 부여받았기 때문이에요. 육체가 교통하는 요소들이 없다면 우리는 그 어떤 다른 통로를 통해서도 지금 내가 당신을 아는 것처럼, 그리고 당신이 나를 아는 것처럼 존재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열락의 거울상이 없다면, 우리의 원형은 존재하지 않아요."
이야기 자체의 즐거움, 작가로서의 정신, 잠깐의 작법까지.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을 떠올리기도 했다.
"아직 구체적으로 스토리를 구축한 건 아닙니다. 책을 쓸 때 나는 머릿속에 동시에 몇 가지의 시나리오를 만들어놓고 그걸 모두 글로 표현하려고 시도를 해요. 그래서 하나의 이야기가 여러가지 버전을 갖게 되지요. 그렇게 써놓은 모든 버전을 직접 읽어보고 그중에서 한가지로 선택을 해요."
더위를 묘사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나도 모르게 다가오는 여름을 떠올리며 몸서리치기까지.
"한여름의 대도시는 수천 년 전 열대의 컬트 종족이 세워놓고 사라져버린 혼몽의 사원이었다." "사람들의 꿈을 잠식했다."
"그 집은 열대성 무더위를 섬기기 위한 사원이나 마찬가지였다. 더위는 그 집에서 늪처럼 부풀면서 팽창했다. 그래서 몬순병이라고 불리는 정신의 어떤 고통스러운 몽환 상태를 생성했다."
'부하'는 시인이 되고 싶었으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단지 되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는 꿈과 현실이 동떨어진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전혀 모순으로 느끼지 않았다."
독서를 할 때 감정적 소모가 크고, 그걸 즐기면서도 경계하는 나는, 한 작가의 책을 완독해본 적이 없다.
여전히 그럴 계획은 없지만, 만일 완독하기 가장 두려운 작가를 꼽으라면 이 사람, 배수아 작가의 글을 택하겠다.
그녀 작품에 대한 내 방식의 환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