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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 - 평생을 수치심과 싸워온 우리의 이야기
로라 베이츠 지음, 황가한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9월
평점 :
내가 세상에 나오자 엄마는 막막해졌다. 큰딸은 살림 밑천이라며 할머니가 몸조리를 도왔지만 둘째 딸까지 그렇게 해줄 생각은 없었으니까. 할머니는 서울에 올라오지도 않았다. 나는 태어난 순간부터 엄마에게 실망과 고통을 안겼고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흔해 빠진 일이다.
아들을 낳고서야 엄마는 당당해졌다. 집에 놀러 온 어른들은 "어디 고추 좀 보자"를 재밌는 말처럼 주고받았고 가끔은 행동으로 옮겼다. 그때마다 강경하게 거부하는 동생이 안쓰러웠지만 어딘가 모르게 부럽기도 했다. 왜들 그렇게 고추에 집착하는 걸까 의아해하며.
학창 시절, 한 남자 선생님은 십 대 소녀인 우리들을 앉혀놓고 말했다. 여자가 강력하게 저항하면 강간은 일어날 수 없다고.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정확히 무엇이 잘못됐는지는 알 수 없는 채로 그 말을 곱씹었다. 지금까지 기억할 정도로 아주 오래.
그 학창 시절, 젊은 선생님이 아이를 가져 배가 불룩해졌다. 우리는 물었다. "선생님! 딸을 원하세요, 아들을 원하세요?" 선생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들!"이라 했다. 누군가가 되물었다. "왜요? 선생님도 딸이잖아요!" 선생님은 득달같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들을 낳고 싶지!"
나는 이미 여러 곳에서 꽤 자주, 내가 여자로서 보고 겪어 온 것들을 말하고 또 써왔다. 그런데도 아직 할 말이 남았다는 것이, 앞으로도 계속 쌓여갈 거라는 것이, 이게 현실이라는 것이, 여전히 기막히다.
우리가 제일 먼저 취해야 할 가장 작고 간단하고 시급한 저항의 행동은 목록을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앉아서 생각하고 써라. 스스로 느껴라. (...) 각각의 경험이 더 큰 이야기의 일부임을 깨달아라. (28쪽)
책은 저자의 '목록'으로 시작한다. 그녀의 경험은 나와 같고 또 다르다. 그녀는 당신도 이 목록을 작성해 볼 것을 권한다. 이는 인종차별, 동성애 혐오, 연령 차별, 계급 차별, 장애인 차별, 트랜스젠더 혐오, 무슬림 혐오, 반유대주의 등과 뒤섞여 있을 수 있다. 그것을 인식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무엇이 됐든, 이것이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리는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말한다. 어떤 일은 명백할 것이고 어떤 것은 모호할 것이라고. 내 잘못은 아니었나, 내가 유난을 떤 것인가, 운이 나빴던 게 아닌가 혼란스러울 것이라고. 우리는 잘못된 것을 인정하거나 말하고 신고하는 대신, 무시하라고 훈련되고 유도되고 심지어 압력까지 받아왔기 때문이다. 수치심과 함구는 뒤엉켜 있다. 그렇기에 목록은 중요해진다. 침묵이 계속되면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억압을 영속시키게 되므로.
"우리가 이 목록들을 우리의 역사, 우리의 유산, 우리의 일부로 간주하기 시작하면 그것의 어마어마하고 방대한 영향력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떻게 우리 이야기에 침투하는지, 그 영향력이 원래 사건의 영향력보다도 얼마나 멀리 뻗어 나가는지를 보게 된다." (29쪽)
저자가 '일상 속 성차별 프로젝트' 사이트를 개설하고 전세계 각지의 목소리들을 모으자, 남자들은 성차별이 없다고 주장하며 온갖 폭언을 보내왔다고 한다. 그들이 바로 그녀가 폭로하려고 한, "일상화되고 만연한 여성혐오의 증거"(26)다. 그럼에도 한데 모인 수십만 명의 목록은 시스템과 불평등, 구조적 억압이라는 패턴을 드러냈다.
저자는 우리가 서로에게 계속해 말해야 한다고, 슬퍼하고 화내고 애도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스스로를 피해자화하기 위함이 아니라 역경을 견디고 살아남은 생존자로서, 여기까지 온 힘과 용기, 회복력을 인정하고 부당한 비난과 수치심을 떨쳐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문제는 우리가 아님을 우리 자신에게 보여줄 수 있다.
물론 억압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문제를 가시화하고 인정하는 것부터가 해결의 기본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이를 시작으로 잘못된 시스템을 해체하고 재건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태도와 문화적 규범을 바꿔야 한다. 그 과정은 복잡하고 어렵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성폭력 및 가정폭력 피해자를 위한 안정적 재원, 지원 지역 간의 격차 철폐, 소수인종 후원, 포르노의 위험성을 알리고 성적 합의와 건강한 연애에 대해 가르치는 교육프로그램, 성폭력 사건에는 특별훈련을 받은 경찰관을 배치하기 등등. 무수히 많은 대안이 있다. 바꿀 수 있는 게 없다는 말은 하지 말자.
이렇게 제도적 변화를 모색하는 동안 각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목록을 만드는 것이다. 경험을 인정하라. 그것이 내 삶을 형성한 방식을 느껴라. 이 일엔 남자도 참여할 수 있다. 태도를 바꾸고 주위 환경을 바꿔라.
저자는 교육계, 경찰계, 사법계, 정치계, 언론계 등에 넓고 깊게 퍼져 있는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짚는다. 성차별을 당연시하며 성불평등을 악화시키는 문화들 말이다. 특히 학교가 성 고정관념과 여성혐오, 괴롭힘을 강화하며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는 분석에는 치가 떨릴 정도였다.
여성의 우울과 불안지수가 남성보다 높다는 통계는 언젠가부터 의아함이 아니라 당연함으로 다가온다. 더이상 여성에게 행동거지를 조심하라고, 스스로를 보호하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잘못된 시스템과 남성에 의한 폭력을 말해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목록을 작성해 보자는 제안은 무척 의미있게 다가온다. 우울한 일을 떠올리고 말하는 것이 때로는 지겹고 힘겹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저자의 말마따나 실재한 일을 존재한 적 없는 것처럼 취급해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 목록을 만들어보자. 공유하든, 하지 않든, 그 경험들을 기록하자. 있었던 일을 없었다고 말하지 말자.
우리가 인식해야 할, 단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다음과 같다. 시스템이 문제라면 시스템을 고쳐야 한다는 것. (231쪽)
"당신의 목록을 만들어라. 그것은 당신의 이야기다. 그것으로 뭘 할 건지는 당신에게 달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좋은 의도 또는 성차별적이고 구시대적인 핑계로 그것을 당신에게서 빼앗아 가거나 부정하거나 무시하거나 묵살하거나 없애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당신의 것, 당신만의 것이다. 그것은 진짜다. 그리고 그것은 중요하다. 우리가 이 목록들을 우리의 역사, 우리의 유산, 우리의 일부로 간주하기 시작하면 그것의 어마어마하고 방대한 영향력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떻게 우리 이야기에 침투하는지, 그 영향력이 원래 사건의 영향력보다도 얼마나 멀리 뻗어 나가는지를 보게 된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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