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1
윌리엄 포크너 지음, 김명주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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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서, 나가사와는 작가 사후 삼십 년이 지나지 않은 책은 읽지 않는다고 했다.
현대 문학을 신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인생은 짧으므로, 시간의 세례를 받지 않은 작품을 읽는데 시간을 소모할 수 없다고. 
오래 전 그 문장이 떠오르는 순간. 이 작품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읽다가.

책의 내용을 말하자면 간단하다.
시골 마을, 오남매의 엄마 애디가 사망하자, 남편 앤스와  다섯 자녀가 그녀를 고향 제퍼슨에 묻어주기 위해 떠난 아흐레 간의 장례 여행기이다. 
그 여정은 물론 평탄치 않다. 폭우로 목숨을 걸고 강을 건너야 했고, 한여름의 무더위 아래 시체는 썩어가고, 화재 사건까지 일어난다. 
그도 간단치 않은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독자를 사로잡는 독특한 화법과 끊임없이 호기심을 자아내는 내용전개, 오롯이 개인적인 감상을 할 수 있는 시간까지.
대중소설과 순수소설, 그런 분류가 과연 가능한 것이라면, 이 책은 그 모든 요소를 한껏 충족시킨다고 생각한다. 


고향에 묻히고 싶다는 그녀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목숨을 걸만큼, 애디를 향한 그들의 사랑은 애절한가.
애디가 병석에 누워 있는 동안, 남편 앤스는 왕진비가 아까워 의사를 부르지 않는다. 희망적 기대일랑 일말도 없이, 그녀가 죽을 것을 확신한다. 
맏아들 캐시는 아직 살아 있는 그녀가 쓸 관을 짜느라 여념이 없다. 아직 살아 있는 어머니를 위한 관이라니. 
둘째 아들 달은 "난 엄마가 없기 때문에 엄마를 사랑할 수 없다" 말하고, 3달러를 벌기 위해 임종을 앞둔 그녀를 두고 집을 떠난다. 
외동 딸 듀이 델은 엄마의 죽음일랑 안중에도 없다. 이참에 읍내에 나가 원치 않게 하게 된 임신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급급할 뿐.
막내아들 바더만은 아직 어려 엄마의 죽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이 죽인 물고기와 어머니를 동일시하며 뒤죽박죽 되는 그의 사고 역시 흥미롭다.)

매정한 그 가족보다 남이 낫다고 여겨질 정도. 
알량한 제 기준에 의해서였을지언정, 이웃집 코라는 진심으로 애디를 위해 무릎꿇고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고, 그녀의 남편 툴 역시 일하지 않는 앤스를 도우며 살아왔다. 

물론 모든 남이 같으랴. 여기 직업정신이라고는 일말도 찾아볼 수 없는 의사 피바디도 있다.
그는 애디에게 왕진을 가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고, 내참, 죽어가는 사람을 되살려 놔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당당하기까지. "자네 마누라 따위가 내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생명을 우습게 여기는 작자가 그래도 의사랍시고 어찌됐든 환자를 도우러왔건만, 애디는 실낱같이 남은 생명력으로 의사를 거부한다. 
피바디의 통찰은 눈여겨볼 만하다.
"동정심과 연민에서 우러나와 진짜 도움을 주려고 하는 사람을 방에서 쫓아내고, 그 대신에 자기를 고작해야 마차 끄는 말로밖에 여기지 않던 짐승 같은 인간들에게 매달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이 바로, 이해 불능의 사랑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결국 애디는 죽는다. 
듀이 델이 죽은 엄마를 붙들고 하는 통곡은 한 편의 쇼와 같고, 피바디는 부인과 엄마를 잃은 그 가정의 식탁 앞에 앉아 음식 투정을 한다. 
앤스는 그녀의 죽음이 하느님의 뜻이라며 기다렸다는 듯 받아들이고,  "난 이제 새 이빨을 해넣을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한다. 
남편 앤스의 캐릭터는 단연 돋보인다. 22세 때 병을 앓은 이후로 한번도 일을 하지 않은 앤스. 
툴의 표현을 보자. "모든 일에 그러하듯이, 자신은 능력이 없어서 시도조차 할 수 없기를 마치 바라는 것 같다."
장남 캐시가 지붕에서 떨어져 여섯 달 동안 누워 있는 동안, 아들 대신 자신이 노동해야 했음에 분개하는 작자. 
일하지 않고 멍청하게 들판을 바라보는 달을 사람들이 정신병원에 보내라고 하자 역시 분노를 표한다. 
"법을 내세워 내 일손 하나를 빼앗으려고 한 것이다."
부르지 않았는데 의사가 오자 치료비를 내야 할 것을 한탄한다. 
이 모든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는 타인의 불운은 당연하지만 자신의 불운은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자신은 죄를 지은 일이 없으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읖조리는 말, "난 도무지 아무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다."
피바디가 그를 평하길, "나무에게는 뿌리를 주시면서 앤스 번드런에게는 발과 다리를 주시다니, 이건 하느님의 실수다."


애디의 죽음 앞에, 오직 셋째 아들 주얼만이 인간적인 반응을 보인다. 마지막 순간까지 애디가 보고 싶어한 아들, 주얼. 
그녀의 죽음을 준비하는 가족에게 "엄만 그 정도로 아프진 않아." 외치는 주얼.
살아 숨쉬고 있는 엄마가 보고 있는 앞에서 관을 짜는 캐시의 비정함과 숨조차 쉴 수 없도록 부채질 해대는 듀이 델의 무성의함에 분개한다. 
"하느님이 있다면, 도대체 하느님은 왜 있는지 모르겠군. 높은 언덕에 엄마와 나 단 둘이 서서, 저자들의 얼굴 위로 바위를 마구 굴려버리고 싶다. (...) 엄마가 조용히 지낼 수 있을 때까지."

그런 그에게 아버지 앤스가 하는 말은 코웃음이 나온다. "넌 엄마에 대해 애정이나 다정함이 조금도 없어. 넌 그래 본 적이 없지."
다른 형제들보다 키가 훌쩍 큰 주얼. 애디에게 유난히 많이 맞고, 유난히 예쁨받은 아들.  
코라 역시 애디가 주얼에게 가장 각별했음을 간파한다. "독살해 버리고 싶을 만큼 미워하는 앤스를 그래도 참아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주얼 때문이었다."

소설은 각 챕터마다 화자를 달리하는 독특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단 한 번 등장하는 애디의 독백은 강렬하고, 그녀의 깊은 비밀을 고백한다.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는 오랫동안 죽어 있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라고" 아버지께 들어온 애디는, 생명이 움트는 봄이 견디기 힘든 감수성 풍부한 여인이다.
앤스와 결혼하고, 캐시에 이어 달을 낳자, 그는 앤스에게 보복할 것을 결심하며, 자신을 고향 제퍼슨에 묻어줄 것을 요구한다. 
마음도 통하지 않고, 모든 노동까지 중단한 앤스와의 결혼생활은 고통이었다. 

"원한다면, 앤스나 그 단어를 쓰라고 해. 앤스 혹은 사랑, 아니면 거꾸로 쓰더라도 전혀 상관없었다." 
"앤스 혹은 사랑,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나의 고독은 이미 깨졌고, 깨졌기에 고독은 다시 완전하게 되었다. 앤스 혹은 사랑, 어떤 것이든 나의 완결된 고독의 테두리 바깥에 존재했다."
"그(앤스)는 내게 있어 이미 죽은 존재였다." 
그녀의 비밀은 "죄를 창조한 다음 그 죄를 정당화한 하느님이 임명한 도구" 휘트필드 목사와의 사이에서 주얼을 낳은 것이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 아무도 속이려고 하지 않았다. 발각된다 할지라도 난 그다지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들은 모두 나만의 자식들이다. 땅 위에서 거칠게 들끓는 피에서 나온 아이들이다. 나와, 살아있는 모든 존재로부터 나왔다. 누구의 자식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두의 자식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당당하다. 
아버지가 말했던, 살아 있는 이유가 죽을 준비를 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며, 동시에 그녀는 아버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남자란 일이 끝난 후 집을 청소하는 것에 대해서 알지 못하니까."

뒤이은 휘트필드의 독백은 역겹기 그지없다. 그는 애디가 죽기 직전에 변심해 그들의 죄를 사람들에게 고백할까 두려워한다. 
서둘러 애디의 집으로 가는 동안 홍수로 위험한 상황에 처하자 "나는 용서받았음을 분명히 깨달았다"고 말한다. 이 자에게 신앙과 용서는 얼마나 편리한가. 
그녀의 집에 도착해 애디가 이미 죽었음을 알자, 주님이 그의 속죄를 받아주셨다고 판단한다. 
그녀가 죄악을 발설하지 못하고 죽은 것이, 무한한 지혜를 지닌 하느님 덕분이라며 칭송하는 것.
"하느님의 손길이 나를 지켜주는 가운데, 거센 물살의 위험을 겪음으로써 나의 죄악은 용서된 것이다. 주님, 풍성하고 전능하신 사랑이여. 오, 찬양합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상가에 찾아 온 휘트필드를, 사람들은 존경할 것이다.

코라와 생전의 애디가 나눈 대화 또한 의미심장하다. 
인간은 하느님을 섬기고 찬양해야한다고 굳게 믿는 코라에게, 하루하루 스스로의 죄악을 깨닫고 속죄한다는 애디의 태도는 오만함일 뿐이다. 
"하느님이 아니라 당신이 죄악과 구원을 결정한다는 것은 오만이에요. 고통받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고, 고통속에서도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인간들이 해야 할 일이지요."
덧붙여 말하길, "휘트필드 목사님처럼 거룩하시고 하느님의 숨결을 가까이 느끼면서 사는 분이 당신을 위해 그토록 기도하고 애쓰셨는데도 아직도 그런 생각을 버리지 못했나요?"
코라는 생각한다. "그녀가 지은 죄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 주얼을 편애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징벌인 셈이다." 
애디가 답한다.
"그(주얼)는 나의 십자가이고 동시에 나의 구원일 거예요. 그는 나를 물과 불에서 구해낼 거예요. 비록 내가 삶을 포기할지라도 그가 나를 구할 거예요."


장례 여정 중, 홍수로 불어난 강을 건너다가 관은 물에 휩쓸려 갈 위기에 처하고, 화재사건으로 불에 타버릴 위기에도 처한다. 
이때, 목숨 걸고 어머니의 관을 물에서, 불에서 구해낸 것은, 바로 주얼이었다.
무더위에 견딜 수 없는 냄새를 풍기며, 온 동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온 가족 각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어 썩어가며 제퍼슨으로 향하는 그녀의 육신. 
그 여정을 멈출 수 있는 기회의 박탈. 그렇다. 그것은 벌이자, 곧 구원이었다. 

원제는 <As I Lay Dying>이다.
나는 민음사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읽었고, 다른 출판사(부북스)에서 <내가 누워 죽어갈 때>로 나온 판본도 있다.
철저하게 영문법상으로만 따지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용상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가 더 맞겠다 생각하다가,
어쩌면 <내가 누워 죽어갈 때>가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녀는 관 속에 누워서도 평화를 맞이하지 못하고 다시금 죽어가고 있는지도. 그렇게 고통을 자처함으로써 스스로 죄사함을 내리는 지도. 


여행의 마지막, 앤스는 의치와 새 부인을 얻는다. 문자 그대로, 부인을 땅에 묻자마자 새 부인을 들인 것. 
코라 역시 목화 수확이 끝나기도 전에 앤스가 새 여자를 얻을 것을 간파했지만, 이리도 빠를 줄은 몰랐을 것이다.
강을 건너다 다리를 다친 맏아들 캐시는 불구가 되지만, 새 엄마가 들고 오는 소형 축음기에 만족감을 표한다.
듀이 델은 낙태를 하려다가 능욕 당한다. 바더만은 다시 바나나를 먹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미친 장례 여정을 견딜 수 없던 달은 이를 멈추기 위해 화재 사건을 내고, 그 방화사실은 듀이 델에 의해 알려지게 된다. 그녀의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임으로. 그로 인해 달은 정신병원으로 보내진다.
엄마의 비밀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것 또한 달이었다. "나는 엄마 스스로가 속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과 주얼을 미워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왜냐하면 주얼을 사랑하기 때문에 엄마는 계속 속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숨겨야 하는 자신을 미워하면서, 숨겨야 하기 때문에 주얼 또한 미워하면서 말이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어머니 애디를 사랑한 달과 주얼, 다른 결말. 
어쩌면 삶의 비정함과 허무함을 일찍이 간파해버린 달이 애디를 가장 많이 닮은 자식이 아닐까 한다.


캐시의 독백,
"누가 미치고 누가 정상인지 말할 권리를 가진 사람이 있는지, 난 확신할 수 없다. 정상적이거나 비정상적인 갖가지 일을 저지른 후, 다시금 똑같은 공포와 놀라움으로 자신의 광기 어린 행위를 지켜보는 누군가가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주얼이 그토록 절박하게 엄마를 강물에서 건져낸 것은 어쩌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일지도 모른다"며 달의 행동에 정당성을 인정하면서도, 생각하기를 멈춘다. 달은 정신병원에 가게 된 처지를 비관하며 정녕 미친 듯이 웃어댄다.

책의 말미, 한 챕터의 제목은 화자가 "달"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내용은 마치 제삼자가 말하는 것만 같다. 
가령 "달은 잭슨에 갔다. 낄낄 웃고 있는 그를 기차에 집어 넣었다. 낄낄거리면서 기다란 기차 안에서 걸어다녔다." 
위의 캐시의 독백이 다시금 생각나는 대목. "(...) 자신의 광기 어린 행위를 지켜보는 누군가가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해석되었으므로, 절대 번역이나 편집의 실수는 아니길.)

이 훌륭한 소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다층적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윌리엄 포크너에게 페미니즘적 시각이 있었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여성의 삶을 각별히 바라보는 인식과 통찰이 있었음은 확실하다.
직접적인 화자로서는 단 한 번 등장하지만 제목부터 내용까지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애디의 인생, 그리고 듀이 델, 또한 코라도. 
애디의 말을 보라. "캐시가 태어났을 때, 모성이란 말은, 그 단어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고, 홀로 전전긍긍하는 듀이 델의 모습은 어떠한가.
"난 내가 걱정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 한다. 걱정할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울 줄도 모른다. 내가 울려고 애쓰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뜨거운 흙 속에 아무렇게나 떨어진 젖은 씨앗이 된 것 같다."  
무엇도 명확히 알아낼 수 없고, 볼 수도 없다고 말하는 듀이 델의 절망적 심리상태. 
"내가 누구인지, 내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여자인지도 모르겠고,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내가 깨어나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깨어나는 것의 반대가 무엇인지도 기억할 수 없었다. 그런데 무엇인가 스쳐가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을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애디도, 듀이 델도, 코라도, 다른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원초적 불행 속에 살아간 것은 아닌가.


신앙에 대한 것 역시 여러 해석이 가능할 테다. 전편 가득 모든 등장인물은 하느님을 말하고, 신앙을 고백한다. 신앙을 의심하는 것은 죽은 애디 뿐.
애디와 간음하여 주얼을 낳은 것은 하느님 가까이 있다는 휘트필드 목사이고, 애디가 앤스를 참고 살 수 있게 한 것은 사생아 주얼이라는 삶의 아이러니.
캐시가 다리를 다치게 된 것이 하필 교회 지붕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나로선 신앙을 찬양한다고도, 부정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녀를 살게 한 것도, 그녀를 두 번 죽게 한 것도, 주얼이었다. 그녀의 십자가이자 구원. 

작품 해설에서, 의외의 부분이 감명 깊고, 밑줄을 긋고 싶었다.
"머리는 명석한데 삶에 대한 성찰과 느낌이 없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상상력도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 포크너를 권하고 싶다. 한 점으로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하며 존재가 확대되는 기쁜 체험이 있길 바란다."

덧.
1. 바나나가 몇 번 등장하는데, 가령 "오로지 바나나를 먹기 위해서 그 모든 위험을 무릅쓰는 거다." 
평범한 일, 하찮은 일을 의미하는 정도로 이해되면서도, 나로선 생소한 표현이라 혹시 어떤 어원이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2. 200페이지에 "처녀 적 내 몸의 모양은   이다."라고 나온다. 
편집상 실수일까, 원문이 정녕 그러할까. 공백이 매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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