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여행 에세이, 개정판
김형경 지음 / 사람풍경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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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이십대 중반부터 정신분석을 하고, 심리학을 탐독한 경험과 사십대에 접어들며 떠난 여행이 버무러져 쓰여진 책이다. 

진솔한 자기 고백과 20여가지 '마음'에 대한 이야기, 그것들과 어우러진 여행기가 참 좋았다.

그녀의 말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가장 좋았던 점은, 내 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이다.

수 차례 울컥하면서도, 나를 들여다보는 것을 멈추지 않게 했다.


"우리 삶의 중요하면서도 어처구니없는 비밀 한 가지는 우리 대부분이 세 살까지 형성된 인성을 중심으로, 여섯 살까지 배운 관계 맺기 방식을 토대로 하여 살아간다는 점이다. 정신분석가들은 인간 정신이 생후 3년에 이르기까지 60퍼센트, 여섯 살까지 95퍼센트 형성된다고 한다. 그들은 대체로 다섯 살까지가 아주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평생 그 말을 부인하고 싶었다. 전문가가 말했든 말든, 나는 아니라고.

그 어린 나이에 거의 모든 것이 형성된다는 것은 곧 부모 '때문'이란 말로 들렸고, 세상의 모든 성격상의 문제들에 부모 탓을 하면, 대체 그 끝은 어디까지 갈텐가, 비아냥댔다. 

그 부모의 부모, 그 부모의 부모의 부모. 왜, 선생과 가까이 지낸 이웃과 이웃의 부모와 그의 부모의 부모도 따져봐야겠네, 하며. 


나의 거부감엔, 내 부모의 양육 방식에 대한 내밀한 저항과 동시에, 그들을 탓하는 것은 곧 그들 나름대로의 숭고했던 희생을 감히 내멋대로 판단하는 것이라는, 스스로에 대한 불필요할 정도의 경계였고 과한 통제였음을 인정하는 순간이 왔다.

내가 이해하는 바, 스스로의 문제와 원인을 돌아보는 것은 결코 누구를 탓하기 위함이 아니다. 

"세상에는 완벽한 어머니도 없고 완벽한 자식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참자기가 생겨나서 독특하고 자율적인 자기에 통합되기 시작하는 생후 첫 3년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많은 사람들이 성인이 되어 겪는 어려움이 어린 시절의 사소했던 갈등의 잔재 때문이고 그 결과 창조성과 자율성, 성적 친밀감에서 경미한 문제를 일으킨다는 뜻이다." (본문에 실린 제임스 F.매스터슨의 <참자기> 재인용) 

내면의 문제를 똑바로 마주해 스스로를 더 이해하고, 끌어안을 수 있고, 그리하여 타인도 끌어안을 수 있으며,  보다 나은 사람으로서, 보다 편안하게 인생의 흐름을 거칠 수 있게 하는 방법일 테다. 


저자는 늘 "생이 안정되면..." 이라는 막연한 꿈을 꾸어왔다고 밝힌다. 그러나 그 욕망이, 자신의 불안감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말이었다는 것을 여행 중 알아차렸다고.

"생이란 본디부터 그렇게 유동적이고 불안정하고 소란스럽고 깨어지기 쉬운 것이라는 것을. 본래 그런 삶을 유독 불안정하게 느꼈던 것은 내면의 불안감 때문이었으며, 그것 때문에 정상적인 삶조차 불안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을.

 내면의 불안감을 인식하고 수용하자 오히려 불안정하다고 느껴온 삶의 조건들을 파도타기하듯 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삶의 안정을 꿈꾸는 대신 어떻게 파도타기의 중심을 잘 잡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것은, 적어도 내게는, 소중하고 의미있는 발견이었다."


자신과의 새로운 조우를 하고 나서 저자는 삶이 바뀌었다고 고백한다. 

"인간과 세상을 보는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삶의 태도에도 변화가 왔다. 유아적 환상에 가득 차 있던 내면세계에서 빠져 나와 비로소 객관적 실체로서의 외부 현실을 인식하게 된 것 같았다. 타인의 사랑을 구걸하는 대신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고, 타인을 돌보는 것으로 나의 가치를 삼는 이타주의 방어기제를 포기했다. 외부의 인정과 지지를 구하는 대신 내가 나 자신을 인정하고 격려하는 훈련을 했다."


저자의 생각에 빠짐없이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그것이 중요히 여겨지지 않는 책이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는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그것만으로도 참 고마운 책이다. 


<사람 풍경 - 김형경 심리/여행 에세이/ 아침바다>



"‘혼자 있기‘의 병리적 측면은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극단적 방어의식, 또는 분노의 표현‘일 수 있다. (...) ‘혼자 있기‘의 건강한 측면은 독립된 인격체로서 분리와 개별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상태를 말한다.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은 채 충만함 속에서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 그것은 정신 건강의 중요한 척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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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걸스
에마 클라인 지음, 정주연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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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생에 바라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이비.

며칠간 가까이 하게 된 십대 청소년을 보며, 자신의 옛 기억을 떠올린다. 

조금은 방황했고 철 없던, 그러나 풋풋한 옛 시절이냐. 

그녀의 회상은, 1969년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살인 사건까지 이어진다. 

어린아이를 포함한 무고한 사람 여럿을 잔악무도하게 난도질해 죽인 희대의 살인 사건. 

(역자 후기를 통해, 그 해 실제 발생했던 찰스 맨슨 살인사건이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책의 핵심은 그 사건을 파헤치는데 있지 않다. 

그 사건에 연루될 뻔했으나 가까스로 빠져나올 수 있었던 열네 살 소녀 이비를 중심으로, 

아직 어른도, 어린 아이도 아닌 소녀들의 동경, 질투, 욕망, 피지배욕구, 불안정함, 타락의 과정 등이 치밀하게 묘사된다.

이비와 엄마의 감정 묘사도 탁월했다. 바람 난 아빠를 미워하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엄마 또한 미워하는 이비. 

십오년 간 살아온 남편과 헤어지고 다시 세상과 만나기 위해 발악하는 엄마. 그 모녀의 애증. 

이비가 나중에 살인을 저지른 그 집단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은 수전에 대한 동경에 기인한다는 것 또한 눈이 간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상류층 소녀 이비의, 가진 것이라곤 옷 한 장도 없어 쓰레기통을 뒤지며 살아가는 비쩍 마른 수전을 향한 동경.

살인자가 되어버린 소녀들이, 왜 러셀이라는 사이비 교주같은 인물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는지도. 

러셀이 어떻게 세치 혀로 소녀들을 열광적인 살인자로 만들 수 있었는지도.

전세계 어디에나, 아픈 십대들. 


"수전과 소녀들은 판단을 내릴 수 없게 되어버렸다. 사용되지 않는 자아의 근육이 점점 더 늘어지고 쓸모없어졌던 것이다. 그들 모두 옳고 그름이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에 살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됐다. 언젠가 그들에게 있었던 직감의 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약간의 통증을 일으키던 인식 같은 것들조차도. 설사 그것들이 미약하게나마 느껴졌다고 해도 이제 뭐가 뭔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비는 자신 또한 그녀들과 다르지 않았을 수 있음을 인지한다.

수전 덕분에 그 자리를 피할 수 있었지만, 어쩌면 그녀 역시 살인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그리하여 가질 수 있었던 그 후의 인생은 선물인 동시에, 형벌이었다.

"나는 방관자의 망가진 인생을 얻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까 봐 두려운, 죄 없는 도망자."


책은 성장소설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남들보다는 거친 성장기를 보낸, 이제는 여인이 된 소녀의 이야기. 

끝내 누구도 성장하지 않는 성장소설일까봐, 두려웠다.

그러나 소설의 말미, 이비는 달라질 수 있음을, 이제는 세상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내게 기쁨을 주었다.


삶엔 언제나 복병이 등장한다.

내가,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 할 줄 알았어? 너를 마냥 행복하게 두지 않겠어! 하며 튀어나오는 뛰어넘기 버거운 허들. 

깊게 심호흡 할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책이다. 

까짓 거, 못 넘으면 어때. 다치기 밖에 더하겠어.

 

인상 깊었던 두 구절을 옮기는 것으로 리뷰를 마친다. 


"죽음은 나에게 호텔 로비 같은 것이었다.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좀 세련되고 불이 환하게 켜진 곳. 시내에서 어떤 남자애가 위조 복권을 팔다가 잡힌 뒤 지하실 방에서 총으로 자살했다. 나는 피가 엉긴 축축한 방 안이 아니라 방아쇠를 당기기 전의 편안한 순간만을 생각했다. 세상이 얼마나 깨끗하고 정제된 것처럼 보였을까. 모든 실망스러운 일들, 처벌과 모욕이 있는 보통 삶의 모든 것이 한 번의 정연한 동작으로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

"나 자신의 자아만이 숨막히게 변치 않고 있었다. 그 어리석고 필사적인 동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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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디 러브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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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줄거리는 간단하다. 

유괴당한 다섯살 짜리 아이가 성적 학대와 사육을 당하며 살다가, 6년만에 탈출하여 부모님께 돌아간다. 


가족을 찾아갔으니, 해피 엔딩일까?

(잘은 모르지만) 그렇다면 조이스 캐럴 오츠가 아닐 듯. 

작가는 많은 물음을 던진다. 

상상하기도, 입에 담기도 싫은 더러운 범죄에 한 번 놀라고, 인간과 악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 또 한 번 놀라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입부부터 예사롭지 않다. 

쇼핑몰 주차장에서 아이를 유괴당하던 순간이 조금씩 변주되며 반복되어 서술된다.

아이(로비)를 잃고, 다이너(엄마)는 얼마나 많이 그 장면을 다시 떠올리며 죄책감에 몸부림쳤을까.

장도리로 머리를 맞고, 차에 치여 양다리, 팔, 갈비뼈, 쇄골, 턱, 치아가 부서지고, 얼굴의 반이 훼손되면서까지 쫓으려했던 유괴범.


총3부 중, 1부는 아이가 유괴당한 뒤 반년의 시간이 그려진다.

온 몸과 마음이 부서진 다이너는 아들을 찾겠다는 일념 하에 재활치료를 하고, 아이를 잃은 부부사이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겨난다.

유괴범 체트는 로비에게 '기드온'이라는 새 이름을 붙여주고, 자신을 '대디 러브'라 명명한다. 

2부는 6년 뒤로 넘어간다. 대디 러브에게 길든 기드온은 학교에 다니게 되고, 사회성 없고 수줍음 많은, 사악한 분위기의 수채화를 기막히게 그려내는 열한 살 소년이 된다. 

기드온은 대디 러브가 자신에게 싫증나 새 아이를 데려오고 자신을 죽이려는 것을 직감한 순간, 그에게서 도망친다.

3부. 체트는 체포되고, 부모에게 돌아온 아이는 아직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심리치료 상담을 받은 어느 날, 다이너는 아들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겨우 다섯살의 나이에 끌려가 정신적, 육체적 학대를 당하며 살아온 아이가 평범한 소년으로 자라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어린 기드온에게 가해지는 상과 벌의 묘사는 차마 옮길 수도 없다.

"대디 러브가 진심으로 사랑을 주면, 아이는 안도하고 고마워했다. 발길질당하다가 이제는 귀여움과 사랑을 받는 개처럼."

"대디 러브가 말했다. 넌 대디 러브에게 목숨을 빚졌어. 숨 한 번 쉬는 것도 다 빚이지."

열한 살이 된 아이는 별다른 죄책감 없이 세번의 방화사건을 저지르고, 또 다른 폭발 계획을 세우며 짜릿함을 느낀다. 

폭탄을 설치한 장소에 있는 아이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기대감에 전율이 흘렀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살아온 이 아이를, 비난할 수 있을까. 


싸이코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유괴범 체트 캐시(체스터 체키).

로비가 처음이자 마지막 아이도 아니었다!

어린 아이들을 유괴해 입에 담기도 싫고, 상상하기도 싫은 성적학대를 하며 사육하고, 그들이 자라 제 취향에 맞지 않게 되면 죽여 암매장하는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자. 

그는 디트로이트의 대부분의 신도가 흑인인 교회의 객원 설교자이기도 하다. 

신도들은 열정적으로 그리스도를 설파하는 그를 우러러 마지 않고, 이웃들도, 선생들도, 모범적인 그를 좋아한다.

사람들은 그에게 쉽게 속는다.

스스로를 1%의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그. 여러 종교를 제멋대로 해석하고, 자신을 순례자라 믿는 인간.

그가 스스로의 범죄를 합리화하는 대목은 섬뜩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자신이 "아이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오히려 아이의 부모를 '대리 부모'라고 생각한다. 마리아와 요셉을 들먹이며. 

"너를 불구덩이에서 구하는 것은 신이 맡기신 내 사명이었지."

다른 아이들을 죽인 것은 "신에게 심판받게 보낸" 것이다. 


이런 그를 변호하고 싶은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지만, 그의 인생은 어떠했나. 

열두살에 실수로 사촌동생을 죽인 죄로 9년간 소년원에 복역. 석방된 이래 26년간 가족을 만난 적이 없다.

철저히 혼자였던 체트. 그는 어떻게 악인이 되었을까. 

로비가 이상 행동을 보인다 해도 악인이라고 가볍게 단정지을 수 없듯, 이 남자에겐 과연 재고의 여지가 없을까.

그는 언제부터 비뚤어지기 시작했을까. 과연 처음부터 정해진 악(惡)이었을까. 

그의 편이 되어줄 사람이 없었다는 것, 그 역시 홀로 생존했어야 했다는 것을 짐작해 본다. 

그에겐 또 다른 대디 러브가 있던 것은 아닌지. (마더 러브, 시스터 러브, 브라더 러브도 가능하다.)

본인은 사촌을 죽인 것이 분명 실수였다고 말하지만, 애초에 가까이하기 끔찍한 악 자체였을 가망성 역시 있다.

그래서 가족과 친척들에게도 내쳐졌는지도. 

그것은 도덕적인가. 우리는 가족을 선택할 수 있나.

또한, 그 악이 선으로 변할 수는 없었을까. 아기 천사였던 로비가, 변할 수밖에 없었듯이. 

악 앞에서 선은 무력하기만 한가. 


이 미친 '대디 러브'는 자신의 훈육이, 기드온이 자신을 신뢰하도록 만들기 위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사랑하는 자식이 사랑하는 아버지를 신뢰하듯 그렇게." 

사랑? 자식? 아버지?

어처구니 없는 그의 착각, 그러나 그의 행동은 뜻밖에도, 자꾸만 다이너를 떠올리게 한다. 

유괴한 아이를 공공장소에 데리고 가는 체트. 이 행위는 그에게 짜릿한 쾌감을 선사한다. 

"여느 아빠처럼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여느 아빠처럼 조용한 자부심을 느끼며 걸었다. 봤지? 난 정상적인 남자라고. 이 녀석이 내 어린 아들이지."

다이너는 어떠했나. 

"이국적인 약물에 취한 것처럼 엄마 노릇에 흠뻑 빠진 젊은 어머니의 너그러움이었다."

그녀는 아이에게 주차한 차를 찾는 책임을 지운다. 이것은 그들만의 게임이었다. 

게임. 대디 러브가 반복해 말하던 게임이 떠오르고 만다.

다이너는 스스로를 혹독한 부모가 아니라고 자부하며, 아이를 쉴 새 없이 관찰하고 평가하고 통제하려 한다. 

합리적 교육으로 "능동적인 아이"로 키우려고 한다. 

체트는 자신이 아이를 구원했다고 믿으며, 자신의 입맛에 맞는 아이로 훈육하고자 했다.  

체트가 자신의 범죄를 합리화하는 것은 분명 혐오스럽다.

다이너는 어떠한가. 구체적으로 그날의 기억을 반복해 꺼내놓을 때도, 그녀가 건물을 나오자마자 "산소라도 되는 듯이" 급하게 담배를 빨아들였음을, 그리고 "경멸하는 듯한 몸짓으로 담배를" 던져버렸음은 한 번도 말하지 않는다. 세부적인 장면 묘사가 목격자들을 고무시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흡연에 도덕 혹은 부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아니고, 그녀를 탓할 의도 역시 조금도 없다.

다만 인간의 자기합리화를, 넓은 의미에서의 평범한 악을 떠올리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진실은 얼마나 입맛에 맞게 활용되는지. 그녀는 말하지 않은 것뿐, 거짓을 말한 것은 아니다. 


아들이 돌아온 뒤, 다이너는 그의 눈에서 사랑을 읽는다. 

소년의 눈빛은, 제대로 독해된 것일까.

아들은 "그년이 내 손을 놨"고, "그년이 내 얼굴에 담배 연기를 내뿜었"으며, "그년이 날 팔아서 '입양'보냈"다고 세뇌되어 있는데.

그 세뇌는 엄마를 만나자마자 즉각 지워질 수 있었을까.  

다이너는 6년 전의 주차장 게임이 "어린 아들의 머릿속에 장치 같은 것을 심어놓았"을지도 모른다고 우려한다. 

하물며 6년간 내내 계속된 세뇌의 힘은 어떻겠나. 


설교자로 분한 대디 러브를 보며 기드온은 경악했다. 대디 러브는 두 사람으로 보였으므로. 

보호해주는 대디 러브와 훈육 하는 대디러브가 각기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그런 기드온은 어떤가. 

기드온(로비)은 스스로를 두개의 자아로 나누게 된다. 착한 (착해야만 하는) 아들과 또 다른 기드온. 

"아들이 말했다. 네, 아빠. 

 기드온은 속으로 중얼댔다. 웃기고 있네. 당신은 악마 아빠고,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아."

살기 위한 본능일테다. 그저 생존하기 위한.

동시에, 어느 순간 대디 러브를 닮아버린 것은 아닌지. 

폭탄을 준비하며 "기절할 것 같은 기대감"을 느끼는 기드온 역시, 범죄를 앞두고 희열을 느끼는 대디 러브를 떠올리게 한다. 


처참히 부서진 다이너의 몸은 더이상 최선이란 없을 정도로 아이를 뺏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는 걸 보여줌에도, 남편, 심지어 다이너의 엄마 마저도 그녀를 비난한다.

사악하고, 계획된 악 앞에서, 대체 어떻게 하면 당하지 않을 수 있나.

그들에겐 희생양이 필요한가. 


아이가 유괴되고, 다이너의 엄마는 관심의 중심이 된 것을 즐긴다. "이제 이 어머니의 삶에는 드라마가 생겼다."

머리를 손질하고, 새옷을 사고, "비탄에 잠긴 할머니"로서 지역방송에 출연한다. 위트(남편)는 이를 비난한다. 

"당신 어머니는 이 일로 완전히 신났군! 그 양반 입장에서는 지루한 일상을 잊게 해줄 일종의 취미 같은 거겠지."

정작 위트는 어떠한가. 그 역시 로비 이상으로 유명인이 되어 오만방송에 출연하고, 다이너를 방치한 채 바쁜 생활을 누린다.

그렇다면 다이너는. 다이너는 어떠한가. 

"고통에 빠진 사람은 고통이 어떤 목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고통에 빠진 명랑한 사람이야말로 최고의 인기를 누린다. 다이너는 불행이 사람들을 끌어들인다는 것을 배웠다." 

과연, 그것이 즐거움일까.

"그녀(다이너)는 죽고 싶은, 어둡고 애타는 감정을 숨겼다. 로비를 소리쳐 부르고 싶은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을 숨겼다."

위트도 다르지 않다. "이것이 그가 제정신을 유지하는 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그 고통을 버텨내고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 칠 뿐이다. 

그러나 서로를 비난하게 만드는, 이겨내기 힘든 고통.

고통 앞에서 생겨나는 상대를 향한 비난. 이것은 결국 희생양 찾기일까. 선은 정말 연약하단 말인가.


설교자 체트는 생각한다.

"성도들은 그들에게는 천국이, 다른 저 인간들에게는 지옥이 마련되어 있다고 예상할 권리가 있었다. 똑똑한 하느님의 사람은 성도들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었다."

지옥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천국이라면, 이것은 순수한가.


이웃들은 어떠한가. 

체트는 네 명의 아들들 모두 지적 장애가 있다 말하고, 그 아들들은 모두 차례로 나타났다 차례로 사라지지만 이웃 중 누구도 그에게 의구심을 갖지 않는다. 그 중 한 명은 인종마저 달랐음에도. 

체트는 추앙받는 설교자이자, 사랑받는 이웃일뿐.

토크쇼의 진행자들은, 도망갈 수 있었던 아이가 왜 도망치지 않았는지 멋대로 떠들어댄다. 원래 가족보다 새로운 생활을 좋아했던 것 아니겠냐고.

인터넷에서 익명으로 유괴 사건에 대해 떠드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그년이 체포돼야 했는데. '방치'죄로." 

또 하나의 질문이 던져진다.

당신은 정말로 선량한 이웃이냐고. 

혹은, 당신은 당신 이웃의 선량함, 적어도 평범함을 믿느냐고. 


무수히 많은 기회가 있었을 때, 소년이 왜 도망가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

처음엔, 그 질문이 비인간적이라 생각했다. 

다이너가 말하듯, "로비가 살았던 지옥에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어. 심판할 수도 없"다고. 

그 질문은 있어서는 안된다고. 

기드온에겐 어떠한 열정도 의지도 가질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거라고.

그러니 기드온이 도망은커녕, 오히려 버림받을까 두려워한 것은 당연할 뿐이라고.

그러나. 그는 결국 도망쳤다. 

대디 러브의 판단은 맞았다. 다른 아들들에 비해 기드온이 똑똑하다는 것. 코앞의 죽음 앞에서 도망칠 수 있었으니까. 

그를 도망치게 한 결정적 이유는 죽음에 대한 본능적 직감이었지만, 

대디 러브의 사랑을 갈구하고 이것이 무너질까 전전긍긍 두려워했다는 것, 언뜻 내비치는 다른 존재에 대한 질투심 역시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나를 흠칫하게 했다. 

그리고 이것은 입을 떡 벌어지게 하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과도 이어진다. 


다이너와 위트 부부는, 이제 사형제도를 찬성한다. 

"난 이제 사형제도가 있어야 한다고 믿어. 내가 직접 약을 주사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나는 맨손으로 그놈을 죽일 수도 있어."

다이너는, 그가 구치소에서 다른 수감자에게 살해되길 바라기까지 한다. 

개별적 경험과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에 따라 바뀌는 신념이라면, 그것을 신념이라 할 수 있을까.

제도는 개별적 경험에 따라 휘둘리지 않는, 정당성을 획득해야만 한.. 

개인의 아픔에 반응하지 않는 법과 제도란.. 정당한 것인가.

조이스 캐럴 오츠. 계속해서 던져지는 화두에, 머리가 아플 지경.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무수히 많이 나온다.

다이너의 엄마는 스스로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딸이 혼혈인과 엮였다며 나무란다.

사위가 신의를 지키지 못할 거라고, "그런 인간은 유전자가 그래."라고 말하며,

딸의 역정 앞에도 당당하다.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라고,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말했을 뿐이라고."

유색인인 위트조차,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 셋 중 적어도 한 명은 아시아인이라고 농담"한다.

체트의 설교는 "경이로운 백인의 설교"다(본문의 '백인'은 고딕체로 강조되어 있다).

체트 역시 스스로를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하며, 인종문제를 "원시적인 생각"으로 폄하하고, 그가 점찍은 아이가 혼혈임을 알았을 때 행복에 겨운 (역겨운) 전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화가 난 순간 내뱉는 것은 "배은망덕한 검둥이 새끼"라는 욕설.

뿌리깊은 인종문제에 대한 저자의 깊은 관심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모르는 척 하는 것만이, 자신만은 절대 고결한 척 하는 것이 능사일까 하는 질문도. 


책이든, 영화든,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작품이 좋다. 삶에 영감을 주는 고마운 존재들.  

행복한 두통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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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아무도 아닌
황정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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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표지를 넘기면 처음 나오는 문구는 이렇다. 

"아무도 아닌, 을 사람들은 자꾸 아무것도 아닌, 으로 읽는다."


특정한 누군가가 아닌 모두의 이야기라고, 모두는 아닐지언정 다수의 이야기라고,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가 아니라고, 지나쳐도 되는 사소함이 아닌, 사람이 살고 죽는 중요한 이야기라고, 

그렇게 각성을 바라는 메시지로 읽혔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여덟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한 편도 빠짐없이 슬펐다. 

얇은 책을 읽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내 몸은 천근만근 무거워져갔다.


<上行>

'나'는 오제와 그의 어머니와 함께 '새 고모'로 불리는 아주머니가 있는 시골에 고추를 따러 간다. 

잘 여문 배추와 콩과 고추가 지천에 널려 있어도 수확할 사람이 없어 그대로 버려지고 있는 곳. 

새 고모와 그녀의 노모는, 곧 그 곳의 집과 밭에서 쫓겨날 위기이고, 

오제는 도시에 비하면 싼값의 시골 땅이지만, 그마저도 살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그러면서도 오제는, 부동산 경기가 침체되었다는 이유로 정책자들을 비난한다.

소설의 말미, 뉴스에서는 월식이 예고된다. 

달을 가려버리는 그것.


<양의 미래>

목이 메였다. '나'는 겨우, 고등학교 졸업반이다. 

"밤엔 손발이 다 녹아내리는 것처럼 피곤했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잠자리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으면 어른 두세명이 밟고 올라선 것처럼 가슴이 뻐근했다."

상업계 고등학교의 졸업반에 마트 계산원으로 취직한 '나'. 

어찌 이것을 파릇파릇한 젊음의 말이라 하겠나. 삶의 부담감에 눌린 중년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녀가 읽는 책은 "서른다섯 나이에 강에 투신해 목숨을 끊은 소설가의 단편들"이다.

그 소설들을 "병신 같았다"고 말하면서도, 반복해서 읽는 그녀. 

십년 째 암 투병중인 어머니가 이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녀는, 평생 아이를 갖지 않겠다 한다. 

서점에 취직해 만났던 호재는 학사학위를 위해 학교로 돌아가고 졸업하지만, 취직은 쉽지가 않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는 청춘들. "다시는 연애를 못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기회를 더는 상상할 수 없었다."


삼포세대, 칠포세대, 흙수저라는 말들.

그 단어들을 풀어 설명하자면, 이 소설이 되지 않을까. 더이상 뺏길 것도 없어, 꿈마저 뺏겨버린 세대.

사랑하든 말든, 가족을 잠재적 짐으로 취급하게 되어버린 세대.


어느 날, 진주라는 소녀가 서점에서 '나'와 대화한 것을 마지막으로 실종되고, 그녀는 지하터널에 진주가 있진 않을까 생각한다.

망치를 찾아 벽 앞에 서지만, 그녀는 깨보지 못한다.

"요즘도 나는 그 순간에 내가 어느 쪽을 더 두렵게 여겼는지를 생각해보고는 한다. 나무 벽의 구멍을 통해 검은 공동을 확인하는 것과 진물 같은 곰팡이로 덮인 또다른 벽을 확인하는 것. 어느 쪽이 더 섬뜩하고 소름 끼치는 일일까. 나는 그걸 알 수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삶에 아무런 기대할 것이 없는, 그 적응된 절망. 희망도 그것이 익숙한 자들만의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 숨이 막힌다. 


진주를 찾기 위해 서점 앞 땡볕 아래 엎드려 있는 진주의 어머니, 지하 서점에서 일하느라 삼십분도 햇볕을 보지 못하는 '나'.

서점 주인은 영업 방해가 되니 진주 어머니를 설득해보라고 지시하고, '나'는 진주 어머니를 바라보다 그 길로 서점을 떠난다.

"나는 여전하다. 여전히 직장에 다니고 사람들 틈에서 크게 염두에 두지 않을 정도의 수치스러운 일을 겪는다. 못 견딜 정도로 수치스러울 때는 그 장소를 떠난 뒤 돌아가지 않는데, 그런 일은 물론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다."


<상류엔 맹금류>

제희의 부모님은 사기를 당해 빚더미에 앉는다. 도망갈 수도 있었으나, 그 자리에서 천천히 그 빚을 갚아가며 사는 것을 택했다.

그들에겐 아이 다섯을 포기하지 않고 가족으로 유지하며 살아온 자부심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부도덕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빚을 갚기 전에 늙어버렸고, 그 빚은 고스란히 다섯 남매에게 나누어졌다.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고자 하는 것은 자신들의 욕심일 뿐이라는 생각은 안 해보았을까. (...) 자신들의 양심과 도덕에 따랐지만 딸들의 인생을 놓고 봤을 때는 부도덕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도망가버린 사람의 부도덕함이 아니라, 도망가지 않고 감당한 자의 부도덕함이라.

모든 곳에 진실이 있다. 제희의 어머니가 전쟁고아이기도, 햅번스타일로 머리를 만 아름다운 여인이기도, 관절염으로 다리를 저는 노부인이기도 한 것처럼.


'나'는 제희와 제희의 부모님과 수목원에 놀러가고, 제희의 부모님 때문에 원치 않는 물가에 앉아 도시락을 먹는다.

관리인의 제지로 그 자리를 벗어나며 바로 위에 맹금류 축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제희 가족에게 "저 물이 다. 짐승들 똥물이라고요" 말한다.

그 후 별다른 일 없이 제희와 헤어졌고, 다른 사람과 살고 있다.


그 이별에 대해 딱히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나'는 가끔 생각한다. "어째서 제희가 아닌가."

"그럴 땐 버려졌다는 생각에 외로워진다. 제희와 제희네. 무뚝뚝해보이고 다소간 지쳤지만, 상냥한 사람들에게."

"나는 그날의 나들이에 관해서는 할말이 많다고 생각해왔다.

 모두를 당혹스럽고 서글프게 만든 것은 내가 아니라고 말이다."


사물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다. 누구도 버린 사람은 없지만, 모두가 버림받은 기분.

도덕의 정의가 다른 그들, 영 동화될 수 없을지도. 


<명실>

실리를 그리워하는 명실의 이야기라고만 정리하고 마음에 와닿은 부분들을 옮긴다. 


"수면 위로 드러난 이름 아래 차갑게 잠겨 있는 이름들이 있었고 그 중에 실리가 있었다. 실리가...... 그것을 생각하면 그녀는 얼음처럼 차가운 물 아래 잠긴 실리를 정말 본 듯했고 거기 갇힌 실리를 어쩌지 못해 숨이 막혔다."

"사람이 죽은 뒤에도 끝나지 않는 뭔가가 있다는 것, 너와 내가 죽은 뒤에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은 얼마나 위안이 되나.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죽어서, 실리를 만날 것이다. 실리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실리는 죽었지만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어떤 것, 어떤 상태로든 남아 있을 테고 내가 죽은 뒤, 실리와 나는 서로 그런 상태로, 그런 상태로라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 세계가 있을 것이고 그런 세계에 실리가 있을 것이다. 이런 상상은 얼마나 위안이 되는가.

 그러나 없다.

 없다.

 점차로 없고 점차로 사라져가는 것이 있다. 그뿐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다 없어진다. 나와 더불어서. 나의 죽음과 더불어 조만간, 아마도 곧...... 아무도 실리를 모르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고 실리는 영원히 잠길 것이다. 망각으로. 

 실리는 마침내 죽는 것이다."


세월호를 떠올렸다.

먹먹했다. 


<누가>

"그녀는 그때 자신이 계급적 인간이라는 것을, 자신이 속한 계급이라는 걸 알았다. 이런 거였구나. 이웃의 취향으로부터 차단될 방법이 없다는 거. 계급이란 이런 거였고 나는 이런 계급이었어."

조용한 집을 찾아 이사온 여자는 노인이 세들어 살던 집에 들어오고 왠지 노인을 내쫓은 기분이 든다. 

"노인은 방을 유지할 능력이 없었을 뿐이고 내게는 있었을 뿐. 그냥 그것뿐. 만사가 그뿐."

만사가 그뿐일까. 그뿐이라고 생각하고 잊으면 그만일까. 

만사가 그뿐이 아니라면, 그녀는 무엇을 했어야 하나. 


이사온 집에서도, 계급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하지. 대체 이 사람들이 나한테 왜 이렇게...... (...)

 나는 평생 누군가에게 특별하게 해를 끼친 것도 없는 사람인데."

모두가 하는 생각 아니던가. 나는 해끼친 적이 없는데.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계급이 문제지. 

한 밤,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던지며 그녀가 외치는 절규는 가슴이 아프다. 

"나는 그 노인보다 낫지만 지금의 나하고 그 노인 사이엔 거의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으니까 언제고 나는 그 노인이 있었던 곳에 스무스하게 당도할 것이다."


세상을 날카롭게 들여다보고 보이는 그대로 말하는 작가를 마주하며, 여러번 놀란다. 

누가 한국 소설에 사담(私談)만이 가득하다 했나. 


"니들은 다를 줄 알지? 다른 줄 알고 다를 것 같지? 그런데 니들하고 나하고는 다른 게 없지. 완전 같지."


<누구도 가본 적 없는>

첫 해외 여행을 떠난 중년의 부부.

십사 년 전, 심장 발작으로 아이가 물에서 사망했다. 

그들이 삶에서 잃어버린 것은 여권 뿐이 아니다. 

역무원에게 말하려 언어를 찾는 남자의 부서진 말들. 

"익스큐즈 미, 아이, 아이......"


<웃는 남자>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어. 컴컴한 모퉁이에서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이 사람이 이해할 수 있다는 나를, 나는 왜 이해할 수 없는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삶을 생각해야 한다는 자기혐오. 


무언가 끊어내지 않으면, 다른 듯 닮아버리는 부자지간처럼, 영원히 변하지 않음을. 


<복경>

'나'는 가난한 머리통을 가졌다. 

"비둘기가 있고 강낭콩이 있고 버찌가 있는 것처럼 아니야 그보다 휘슬러가 있고 버버리가 있는 것처럼 있어 그런 게. 왜냐하면 내가 그거거든. 가난한 머리통."

충분한 돈이 없어 엄마의 지독한 통증 앞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던 여자. 

"인간다움의 조건은 여력의 여부가 아닙니까."

"살려내고 싶어도 살릴 수 없는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고통으로 괴로워하는데 진통조차 해줄 수 없는 형편이라면 그 마음은 뭐가 되겠습니까. 짐승 아니겠습니까. 짐승이 되어버린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돈을 벌어. 그 짐승이 되지 않으려고 돈을 법니다."


그녀가 일하는 백화점에서, 미화원은 판매원과 계산원을 증오하고 판매원과 계산원은 미화원을 미워하고 그들 모두는 식당 조리사들을 미워하고 조리사들은 그 모두를 두루두루 미워하는.. "영원한 돌림노래처럼" 늘 서로를 미워한다. 

차라리 "고객과의 관계가 훨씬 산뜻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고객과의 관계는 괜찮습니다.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괜찮아요."

고객에게 당한 분풀이를 지하상가의 고객이 되어 쏟아내는 매니저는, 그녀에게 '도게자'를 가르쳐준다.

"꿇으라면 꿇는 존재가 있는 세계. 압도적인 우위로 인간을 내려다볼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경험. 모두가 이것을 바라니까 이것은 필요해 모두에게. 그러니까 나한테도 그게 필요해. 그게 왜 나빠?"


이런 세상에서, 인간의 존귀함이란 말장난이 되어간다.

"가만히 있어도 존나 귀하다면 그것은 일단 인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냥 있는 것 자체로 존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선 인간에 속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요."

미친 듯 웃고 있는 그녀. 웃는다는 말로는 적당하지 않아 그 웃음을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야 하는 그녀. 

슬픈 와중에, 특유의 유머는 곳곳에 있었다. 

가령, "재수없는 새끼...... 고객 같은 놈......" 

그 어느 웃음도, 아프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 편도 빠짐없이, 지금 이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소설집을 읽는 내내 마음에 눌려 몸까지 묵직해질 정도로 슬펐는데,

더 견딜 수 없는 슬픔은, 이 모든 것이 눈물을 짜내기 위한 억지 신파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사실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우리네 삶을 이야기하는 소설.

분명 창작이지만, 창조가 아닌 관조라고 여겨져, 그게 견딜 수 없이 슬펐다. 

읽어내기 쉽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우리네 이야기라니. 

여기, 이렇게 사람이 살고 있다니. 


작가를 흠모하면서도, 그녀의 다른 소설을 찾기 겁이 난다. 현실을 마주하기엔 비겁하여. 

그러면서도, 현실을 직시하는 그녀의 시선이 고맙다. 

제대로 조준해야, 타격할 수도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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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심리학 - 유쾌한 심리학자의 기발한 여행안내서
김명철 지음 / 어크로스 / 2016년 7월
평점 :
품절


좋은 책을 만날 가망성을 높일 순 있다.

내 취향을 아니까 그에 맞는 걸 찾으면 되고, 여러 경로로 검증된 책들을 찾으면 된다. 

그런다고 100%가 될 순 없겠지만, 어쨌든 확률은 높아진다.

하지만 다른 길을 택했다. 

고른 섭취. 내가 자진해서 집어들 일이 없는 책, 심지어 제목부터 못마땅한 책들도, 한 번 읽어본다.

그렇게 해서 좋은 책을 만날 때의 짜릿한 맛. 

캬! 이맛이야!


스물아홉에 첫 여행을 떠난 저자는 곧 베테랑 여행가가 되었지만, 오히려 그 여행에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심리학자로서 여행과 여행자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고, 

심리학과 여행학,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더해 만든 결과물이 바로 이 책, <여행의 심리학>이다. 


"씩씩하고 싹싹한 배낭여행"만이 참된 여행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저자는, 

앙코르와트의 땡볕 아래 왕복 40킬로미터 거리를 자전거로 오가는 등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다가 문득 의심하게 됐단다. 

조금 더 편한 방법을 택했다면 앙코르와트가 덜 인상적이었을까,로부터 시작되는 스스로에 대한 솔직한 질문들.

곧, "행복하고 의미 있는 여행을 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따져보고 어떻게 여행을 해야 할까?" 하는 것.

결론은,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 다르며, "여행은 다양한 사람들의 성격과 취향과 목표를 만족시킬 수 있는 다양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고로, 우리 모두는 각자에게 맞는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 오예!

몸소 겪은 경험들을 바탕으로, 여행은 한없이 다양해질 수 있다는 것을 설파하는 심리학자.

저자는 여행을 이야기하지만, 우리 모두의 다양한 인생을 응원하는 것으로 여겨져 더욱 신나기도 했다.


책은 개개인의 성격에 맞는 여행을 고르는 팁을 말해주기도 하고, 여행을 위한 노하우와 규칙을 말해주기도 한다.

저자는 사람들은 왜 여행을 떠날까,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왜 여행을 떠날까? 순으로 자문해볼 것을 권한다. 

이소 아홀라Iso-Ahola는 행동주의 심리학에서 유래한 접근-회피 동기 개념을 이용해, 여행 동기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접근-회피 동기 개념이란, 인간은 무언가를 얻고 무언가를 하려는 '접근 동기'에 따라 행동에 나서기도 하지만, 

무언가를 피하고 무언가를 하지 않으려는 '회피 동기'에 따라 움직이기도 한다는 것.

대부분의 경우 접근 동기와 회피 동기는 언제나 동시에 나타나 일정한 비율로 조합된다고. 

이소 아홀라는 여행 역시 무언가를 피하려는 회피 활동인 동시에 무언가를 얻으려 하는 접근 활동이라 말한다.

"여행은 도피이자 탐색이며 탈출이자 추구이다."

회피 동기가 매우 높은 대신 접근 동기가 불명확할 경우엔 방랑자 유형의 여행(1960-70년대 히피 여행자, 니코스 카잔차키스),

반대로, 접근 즉 추구욕구가 강할 경우에는 탐험이나 교육적 여행(표트르 대제)이 나올 수 있다. 


스탠리 플로그Stanley C. Plog는 자기 내면에 집중하는 여행자와 타인 및 환경에 중점을 두는 여행자를 구분했고, 

에릭 코언Erik Cohen은 친숙성을 중시하는 여행자와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추구하는 여행자를 구분했다. 

이는 각각 성격심리학의 '외-내향성'과 '개방성'을 통한 여행 동기 구분법이다. 

결국, 자신의 여행을 논하려면 스스로의 성격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책엔 성격5요인 테스트가 실려 있다. 그 5요인은 외-내향성 및 개방성, 성실성, 우호성, 신경증 성향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행 동기 연구와 성격 5요인 외에도, 저자는 '자기상'이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자기'라는 개념은,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느끼고 생각하는 내용을 말하며, 우리 삶에 전반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저자가 던지는 질문.

"사람들은 현재의 자기상에 부합하는 여행을 하려할까, 아니면 미래의 이상적 자기상에 부합하는 여행을 하려할까?" 

그 답이 무척 궁금했는데, 아직까진 이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지 않다고. 

소수의 연구에 따르면 현재 혹은 미래의 자기상, 그 어떤 것을 충족시키는 여행이든 모두 만족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와 미래의 자기상이 많이 다를 때는 어떤지 연구가 부족하고, 세계 각국 문화에 따라 차이를 보일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여행을 말하는데, 여행 예찬이 나오지 않으랴. 

기대감. 어떤 기대든간에 그것이 충족되리라는 희망적 예측. 

긍정 정서와 행복감 체험. 짜릿함이건, 평온함이건, 놀라움이건간에. 

여러 연구에 따르면, 여행은 자신의 건강상태뿐만 아니라, 직장과 일, 경제 수준, 주거환경에도 보다 더 만족하게 한다. 

여행의 경험학습은 생생한 지식과 경험을 능동적으로 얻는 학습과정으로, 짐 꾸리기, 각국 비자 준비 등 여행 기술과 노하우뿐 아니라 일반적인 의사소통 기술과 적응력 또한 차곡차곡 쌓게 한다.

정서 지능의 상승!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이유로, 어떤 정서를 경험하는지 여행경험으로 확실히 깨닫게 된다. 

각종 정서를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고, 그 원인을 추론할 수 있고, 그 정서가 낳는 결과가 무엇인지도 이해하게 된다. 

또한 정서를 강하게 표현하는 타인을 보며 타인의 정서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법도 익힐 수 있다. 

"정서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수준이 높아지면 자연히 자신의 정서를 조절하고 타인의 정서에 대처하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며, 이와 관련된 기술이 향상된다."

문화 지능의 상승은 말해 무엇하랴.

이 모든 것은 자존감 상승에 일조한다. 


저자는 세니자 코셰비치와 폴 린치가 정의한 '불사조 여행'도 소개한다. 

여행자들이 여행지의 사회공동체가 잿더미를 딛고 다시  피어나도록 돕는 여행을 말한다.  


여행의 순기능을 말하면서도, 저자는 분명 여행 자체만으로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오직 꾸준히 여행하며 자주자주 행복을 경험하는, 그리하여 자신과 소중한 사람들의 삶에 주기적으로 활력을 불어넣는 '여행하는 삶'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여행의 만족이나 행복을 항상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좋은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잘 알아야 한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돌아간다. (성격, 욕망, 가치관, 여행의 방법 등)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그만큼 공동체의 복지를 증진하고 문명의 진화를 촉진할 수 있는 다양한 대안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먼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항상 문화적 접촉과 교류를 통해 다채로운 대안을 섭취하고, 이를 변용하거나 자신의 문화와 연결함으로써 새로운 발명품, 새로운 지식과 이론, 새로운 사회제도를 창조해왔다."

뜻하지 않게, 나의 의도된 잡독마저 설명해주는 저자의 말씀. 


저자는 비문명에 대한 환상을 비판하기도 한다. 가난과 비문명의 경험을 진정성과 동일시하며, 현지인의 경제발전 요소(스마트폰 등)를 반가워하지 않고, 가난에서 순수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행위들. 

대충 만든 환상에 넘어가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직접 느껴보길 권하고 있다. 

저자는 '가난하지만 마음이 풍족한 사람들'을 찾는 행위가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말한다. 

가난이란 먹을 것이 없고, 가족을 유지하기가 힘든 것이라는 진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음에도. 

시골 마을의 해맑은 아이를 보며 제3세계의 환상을 보지만, 가난해서 죽어가는 아이를 보며 그 사회에 환멸을 느낀다. 

저자는 경계해야 할 여행자의 자세를 말하는 동시에, 혐오 요소가 여행을 방해하지 않도록 할 것을 조언한다. 


윤리적 여행, 다시 말해 '지속 가능한 여행'은 모두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이는 여행지의 환경을 보호하고 현지 문화를 존중하며 여행지 경제에 정의로운 기여를 하는 세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이를 설명하기 위한 6가지 인지 부조화 해소 양상(결과 부정, 하향 비교, 책임 부정, 통제 부정, 예외 형성, 보상)도 흥미로웠다.


그 외 여행을 하기 위한 실질적인 팁과 심리학자로서의 조언들이 제시된다.

여행을 다녀와서 그것을 재미난 이야기로 정리하라는 것도 인상깊었다.

모든 여행은 여행기로 쓰인 뒤 아름다워진다고,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야기를 썩히면 죄가 된다. 우리 자신의 경험에 충실하지 못한 죄, 행복하고 의미있는 경험을 망각의 강으로 떠내려보낸 죄"


책은 자신에게 맞는, 자신이 더 행복해질 수 있는 여행을 찾도록 돕고 있지만, 여행 자체가 영 싫은 사람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 역시 저자가 존중해마지 않는 개인의 다양한 특성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정녕 무엇을, 어떤 이유로 싫어하고 좋아하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참 좋은 시간이 될 것 같다.

결론적으로 여행이 싫어진다해도 상관없다. 

난 사람은 영원히 스스로를 배워간다고 믿는 편이다. 


책은 너무 좋았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에세이들은 더없이 반갑다. 

무엇보다.. 잠자고 있던 내 여행 본능을 미친듯이 펌프질했다. 

한참을 세계 날씨를 검색했다.

결국 떠나든, 떠나지 않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여행은 시작됐다. 여기, 내 책상 앞에서. 


전술했지만, 나는 저자가 말하는 '여행'을 계속해 '삶'으로 확장시켜 읽었다. 나도 모르게. 

"자신에게 잘 맞는 여행 방법을 발견하는 동시에 이와 같은 여행의 기술을 익힌다면 누구나, 언제나, 어디서나 행복한 여행을 할 수 있다." 

"여행은 우리의 능력을 증명하는 활동이 아니다. 여행의 목표는 행복과 성장이다."


꺅.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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