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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디 러브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줄거리는 간단하다.
유괴당한 다섯살 짜리 아이가 성적 학대와 사육을 당하며 살다가, 6년만에 탈출하여 부모님께 돌아간다.
가족을 찾아갔으니, 해피 엔딩일까?
(잘은 모르지만) 그렇다면 조이스 캐럴 오츠가 아닐 듯.
작가는 많은 물음을 던진다.
상상하기도, 입에 담기도 싫은 더러운 범죄에 한 번 놀라고, 인간과 악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 또 한 번 놀라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입부부터 예사롭지 않다.
쇼핑몰 주차장에서 아이를 유괴당하던 순간이 조금씩 변주되며 반복되어 서술된다.
아이(로비)를 잃고, 다이너(엄마)는 얼마나 많이 그 장면을 다시 떠올리며 죄책감에 몸부림쳤을까.
장도리로 머리를 맞고, 차에 치여 양다리, 팔, 갈비뼈, 쇄골, 턱, 치아가 부서지고, 얼굴의 반이 훼손되면서까지 쫓으려했던 유괴범.
총3부 중, 1부는 아이가 유괴당한 뒤 반년의 시간이 그려진다.
온 몸과 마음이 부서진 다이너는 아들을 찾겠다는 일념 하에 재활치료를 하고, 아이를 잃은 부부사이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겨난다.
유괴범 체트는 로비에게 '기드온'이라는 새 이름을 붙여주고, 자신을 '대디 러브'라 명명한다.
2부는 6년 뒤로 넘어간다. 대디 러브에게 길든 기드온은 학교에 다니게 되고, 사회성 없고 수줍음 많은, 사악한 분위기의 수채화를 기막히게 그려내는 열한 살 소년이 된다.
기드온은 대디 러브가 자신에게 싫증나 새 아이를 데려오고 자신을 죽이려는 것을 직감한 순간, 그에게서 도망친다.
3부. 체트는 체포되고, 부모에게 돌아온 아이는 아직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심리치료 상담을 받은 어느 날, 다이너는 아들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겨우 다섯살의 나이에 끌려가 정신적, 육체적 학대를 당하며 살아온 아이가 평범한 소년으로 자라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어린 기드온에게 가해지는 상과 벌의 묘사는 차마 옮길 수도 없다.
"대디 러브가 진심으로 사랑을 주면, 아이는 안도하고 고마워했다. 발길질당하다가 이제는 귀여움과 사랑을 받는 개처럼."
"대디 러브가 말했다. 넌 대디 러브에게 목숨을 빚졌어. 숨 한 번 쉬는 것도 다 빚이지."
열한 살이 된 아이는 별다른 죄책감 없이 세번의 방화사건을 저지르고, 또 다른 폭발 계획을 세우며 짜릿함을 느낀다.
폭탄을 설치한 장소에 있는 아이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기대감에 전율이 흘렀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살아온 이 아이를, 비난할 수 있을까.
싸이코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유괴범 체트 캐시(체스터 체키).
로비가 처음이자 마지막 아이도 아니었다!
어린 아이들을 유괴해 입에 담기도 싫고, 상상하기도 싫은 성적학대를 하며 사육하고, 그들이 자라 제 취향에 맞지 않게 되면 죽여 암매장하는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자.
그는 디트로이트의 대부분의 신도가 흑인인 교회의 객원 설교자이기도 하다.
신도들은 열정적으로 그리스도를 설파하는 그를 우러러 마지 않고, 이웃들도, 선생들도, 모범적인 그를 좋아한다.
사람들은 그에게 쉽게 속는다.
스스로를 1%의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그. 여러 종교를 제멋대로 해석하고, 자신을 순례자라 믿는 인간.
그가 스스로의 범죄를 합리화하는 대목은 섬뜩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자신이 "아이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오히려 아이의 부모를 '대리 부모'라고 생각한다. 마리아와 요셉을 들먹이며.
"너를 불구덩이에서 구하는 것은 신이 맡기신 내 사명이었지."
다른 아이들을 죽인 것은 "신에게 심판받게 보낸" 것이다.
이런 그를 변호하고 싶은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지만, 그의 인생은 어떠했나.
열두살에 실수로 사촌동생을 죽인 죄로 9년간 소년원에 복역. 석방된 이래 26년간 가족을 만난 적이 없다.
철저히 혼자였던 체트. 그는 어떻게 악인이 되었을까.
로비가 이상 행동을 보인다 해도 악인이라고 가볍게 단정지을 수 없듯, 이 남자에겐 과연 재고의 여지가 없을까.
그는 언제부터 비뚤어지기 시작했을까. 과연 처음부터 정해진 악(惡)이었을까.
그의 편이 되어줄 사람이 없었다는 것, 그 역시 홀로 생존했어야 했다는 것을 짐작해 본다.
그에겐 또 다른 대디 러브가 있던 것은 아닌지. (마더 러브, 시스터 러브, 브라더 러브도 가능하다.)
본인은 사촌을 죽인 것이 분명 실수였다고 말하지만, 애초에 가까이하기 끔찍한 악 자체였을 가망성 역시 있다.
그래서 가족과 친척들에게도 내쳐졌는지도.
그것은 도덕적인가. 우리는 가족을 선택할 수 있나.
또한, 그 악이 선으로 변할 수는 없었을까. 아기 천사였던 로비가, 변할 수밖에 없었듯이.
악 앞에서 선은 무력하기만 한가.
이 미친 '대디 러브'는 자신의 훈육이, 기드온이 자신을 신뢰하도록 만들기 위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사랑하는 자식이 사랑하는 아버지를 신뢰하듯 그렇게."
사랑? 자식? 아버지?
어처구니 없는 그의 착각, 그러나 그의 행동은 뜻밖에도, 자꾸만 다이너를 떠올리게 한다.
유괴한 아이를 공공장소에 데리고 가는 체트. 이 행위는 그에게 짜릿한 쾌감을 선사한다.
"여느 아빠처럼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여느 아빠처럼 조용한 자부심을 느끼며 걸었다. 봤지? 난 정상적인 남자라고. 이 녀석이 내 어린 아들이지."
다이너는 어떠했나.
"이국적인 약물에 취한 것처럼 엄마 노릇에 흠뻑 빠진 젊은 어머니의 너그러움이었다."
그녀는 아이에게 주차한 차를 찾는 책임을 지운다. 이것은 그들만의 게임이었다.
게임. 대디 러브가 반복해 말하던 게임이 떠오르고 만다.
다이너는 스스로를 혹독한 부모가 아니라고 자부하며, 아이를 쉴 새 없이 관찰하고 평가하고 통제하려 한다.
합리적 교육으로 "능동적인 아이"로 키우려고 한다.
체트는 자신이 아이를 구원했다고 믿으며, 자신의 입맛에 맞는 아이로 훈육하고자 했다.
체트가 자신의 범죄를 합리화하는 것은 분명 혐오스럽다.
다이너는 어떠한가. 구체적으로 그날의 기억을 반복해 꺼내놓을 때도, 그녀가 건물을 나오자마자 "산소라도 되는 듯이" 급하게 담배를 빨아들였음을, 그리고 "경멸하는 듯한 몸짓으로 담배를" 던져버렸음은 한 번도 말하지 않는다. 세부적인 장면 묘사가 목격자들을 고무시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흡연에 도덕 혹은 부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아니고, 그녀를 탓할 의도 역시 조금도 없다.
다만 인간의 자기합리화를, 넓은 의미에서의 평범한 악을 떠올리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진실은 얼마나 입맛에 맞게 활용되는지. 그녀는 말하지 않은 것뿐, 거짓을 말한 것은 아니다.
아들이 돌아온 뒤, 다이너는 그의 눈에서 사랑을 읽는다.
소년의 눈빛은, 제대로 독해된 것일까.
아들은 "그년이 내 손을 놨"고, "그년이 내 얼굴에 담배 연기를 내뿜었"으며, "그년이 날 팔아서 '입양'보냈"다고 세뇌되어 있는데.
그 세뇌는 엄마를 만나자마자 즉각 지워질 수 있었을까.
다이너는 6년 전의 주차장 게임이 "어린 아들의 머릿속에 장치 같은 것을 심어놓았"을지도 모른다고 우려한다.
하물며 6년간 내내 계속된 세뇌의 힘은 어떻겠나.
설교자로 분한 대디 러브를 보며 기드온은 경악했다. 대디 러브는 두 사람으로 보였으므로.
보호해주는 대디 러브와 훈육 하는 대디러브가 각기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그런 기드온은 어떤가.
기드온(로비)은 스스로를 두개의 자아로 나누게 된다. 착한 (착해야만 하는) 아들과 또 다른 기드온.
"아들이 말했다. 네, 아빠.
기드온은 속으로 중얼댔다. 웃기고 있네. 당신은 악마 아빠고,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아."
살기 위한 본능일테다. 그저 생존하기 위한.
동시에, 어느 순간 대디 러브를 닮아버린 것은 아닌지.
폭탄을 준비하며 "기절할 것 같은 기대감"을 느끼는 기드온 역시, 범죄를 앞두고 희열을 느끼는 대디 러브를 떠올리게 한다.
처참히 부서진 다이너의 몸은 더이상 최선이란 없을 정도로 아이를 뺏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는 걸 보여줌에도, 남편, 심지어 다이너의 엄마 마저도 그녀를 비난한다.
사악하고, 계획된 악 앞에서, 대체 어떻게 하면 당하지 않을 수 있나.
그들에겐 희생양이 필요한가.
아이가 유괴되고, 다이너의 엄마는 관심의 중심이 된 것을 즐긴다. "이제 이 어머니의 삶에는 드라마가 생겼다."
머리를 손질하고, 새옷을 사고, "비탄에 잠긴 할머니"로서 지역방송에 출연한다. 위트(남편)는 이를 비난한다.
"당신 어머니는 이 일로 완전히 신났군! 그 양반 입장에서는 지루한 일상을 잊게 해줄 일종의 취미 같은 거겠지."
정작 위트는 어떠한가. 그 역시 로비 이상으로 유명인이 되어 오만방송에 출연하고, 다이너를 방치한 채 바쁜 생활을 누린다.
그렇다면 다이너는. 다이너는 어떠한가.
"고통에 빠진 사람은 고통이 어떤 목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고통에 빠진 명랑한 사람이야말로 최고의 인기를 누린다. 다이너는 불행이 사람들을 끌어들인다는 것을 배웠다."
과연, 그것이 즐거움일까.
"그녀(다이너)는 죽고 싶은, 어둡고 애타는 감정을 숨겼다. 로비를 소리쳐 부르고 싶은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을 숨겼다."
위트도 다르지 않다. "이것이 그가 제정신을 유지하는 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그 고통을 버텨내고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 칠 뿐이다.
그러나 서로를 비난하게 만드는, 이겨내기 힘든 고통.
고통 앞에서 생겨나는 상대를 향한 비난. 이것은 결국 희생양 찾기일까. 선은 정말 연약하단 말인가.
설교자 체트는 생각한다.
"성도들은 그들에게는 천국이, 다른 저 인간들에게는 지옥이 마련되어 있다고 예상할 권리가 있었다. 똑똑한 하느님의 사람은 성도들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었다."
지옥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천국이라면, 이것은 순수한가.
이웃들은 어떠한가.
체트는 네 명의 아들들 모두 지적 장애가 있다 말하고, 그 아들들은 모두 차례로 나타났다 차례로 사라지지만 이웃 중 누구도 그에게 의구심을 갖지 않는다. 그 중 한 명은 인종마저 달랐음에도.
체트는 추앙받는 설교자이자, 사랑받는 이웃일뿐.
토크쇼의 진행자들은, 도망갈 수 있었던 아이가 왜 도망치지 않았는지 멋대로 떠들어댄다. 원래 가족보다 새로운 생활을 좋아했던 것 아니겠냐고.
인터넷에서 익명으로 유괴 사건에 대해 떠드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그년이 체포돼야 했는데. '방치'죄로."
또 하나의 질문이 던져진다.
당신은 정말로 선량한 이웃이냐고.
혹은, 당신은 당신 이웃의 선량함, 적어도 평범함을 믿느냐고.
무수히 많은 기회가 있었을 때, 소년이 왜 도망가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
처음엔, 그 질문이 비인간적이라 생각했다.
다이너가 말하듯, "로비가 살았던 지옥에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어. 심판할 수도 없"다고.
그 질문은 있어서는 안된다고.
기드온에겐 어떠한 열정도 의지도 가질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거라고.
그러니 기드온이 도망은커녕, 오히려 버림받을까 두려워한 것은 당연할 뿐이라고.
그러나. 그는 결국 도망쳤다.
대디 러브의 판단은 맞았다. 다른 아들들에 비해 기드온이 똑똑하다는 것. 코앞의 죽음 앞에서 도망칠 수 있었으니까.
그를 도망치게 한 결정적 이유는 죽음에 대한 본능적 직감이었지만,
대디 러브의 사랑을 갈구하고 이것이 무너질까 전전긍긍 두려워했다는 것, 언뜻 내비치는 다른 존재에 대한 질투심 역시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나를 흠칫하게 했다.
그리고 이것은 입을 떡 벌어지게 하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과도 이어진다.
다이너와 위트 부부는, 이제 사형제도를 찬성한다.
"난 이제 사형제도가 있어야 한다고 믿어. 내가 직접 약을 주사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나는 맨손으로 그놈을 죽일 수도 있어."
다이너는, 그가 구치소에서 다른 수감자에게 살해되길 바라기까지 한다.
개별적 경험과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에 따라 바뀌는 신념이라면, 그것을 신념이라 할 수 있을까.
제도는 개별적 경험에 따라 휘둘리지 않는, 정당성을 획득해야만 한..
개인의 아픔에 반응하지 않는 법과 제도란.. 정당한 것인가.
조이스 캐럴 오츠. 계속해서 던져지는 화두에, 머리가 아플 지경.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무수히 많이 나온다.
다이너의 엄마는 스스로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딸이 혼혈인과 엮였다며 나무란다.
사위가 신의를 지키지 못할 거라고, "그런 인간은 유전자가 그래."라고 말하며,
딸의 역정 앞에도 당당하다.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라고,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말했을 뿐이라고."
유색인인 위트조차,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 셋 중 적어도 한 명은 아시아인이라고 농담"한다.
체트의 설교는 "경이로운 백인의 설교"다(본문의 '백인'은 고딕체로 강조되어 있다).
체트 역시 스스로를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하며, 인종문제를 "원시적인 생각"으로 폄하하고, 그가 점찍은 아이가 혼혈임을 알았을 때 행복에 겨운 (역겨운) 전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화가 난 순간 내뱉는 것은 "배은망덕한 검둥이 새끼"라는 욕설.
뿌리깊은 인종문제에 대한 저자의 깊은 관심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모르는 척 하는 것만이, 자신만은 절대 고결한 척 하는 것이 능사일까 하는 질문도.
책이든, 영화든,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작품이 좋다. 삶에 영감을 주는 고마운 존재들.
행복한 두통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