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더 걸스
에마 클라인 지음, 정주연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인생에 바라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이비.
며칠간 가까이 하게 된 십대 청소년을 보며, 자신의 옛 기억을 떠올린다.
조금은 방황했고 철 없던, 그러나 풋풋한 옛 시절이냐.
그녀의 회상은, 1969년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살인 사건까지 이어진다.
어린아이를 포함한 무고한 사람 여럿을 잔악무도하게 난도질해 죽인 희대의 살인 사건.
(역자 후기를 통해, 그 해 실제 발생했던 찰스 맨슨 살인사건이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책의 핵심은 그 사건을 파헤치는데 있지 않다.
그 사건에 연루될 뻔했으나 가까스로 빠져나올 수 있었던 열네 살 소녀 이비를 중심으로,
아직 어른도, 어린 아이도 아닌 소녀들의 동경, 질투, 욕망, 피지배욕구, 불안정함, 타락의 과정 등이 치밀하게 묘사된다.
이비와 엄마의 감정 묘사도 탁월했다. 바람 난 아빠를 미워하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엄마 또한 미워하는 이비.
십오년 간 살아온 남편과 헤어지고 다시 세상과 만나기 위해 발악하는 엄마. 그 모녀의 애증.
이비가 나중에 살인을 저지른 그 집단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은 수전에 대한 동경에 기인한다는 것 또한 눈이 간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상류층 소녀 이비의, 가진 것이라곤 옷 한 장도 없어 쓰레기통을 뒤지며 살아가는 비쩍 마른 수전을 향한 동경.
살인자가 되어버린 소녀들이, 왜 러셀이라는 사이비 교주같은 인물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는지도.
러셀이 어떻게 세치 혀로 소녀들을 열광적인 살인자로 만들 수 있었는지도.
전세계 어디에나, 아픈 십대들.
"수전과 소녀들은 판단을 내릴 수 없게 되어버렸다. 사용되지 않는 자아의 근육이 점점 더 늘어지고 쓸모없어졌던 것이다. 그들 모두 옳고 그름이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에 살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됐다. 언젠가 그들에게 있었던 직감의 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약간의 통증을 일으키던 인식 같은 것들조차도. 설사 그것들이 미약하게나마 느껴졌다고 해도 이제 뭐가 뭔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비는 자신 또한 그녀들과 다르지 않았을 수 있음을 인지한다.
수전 덕분에 그 자리를 피할 수 있었지만, 어쩌면 그녀 역시 살인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그리하여 가질 수 있었던 그 후의 인생은 선물인 동시에, 형벌이었다.
"나는 방관자의 망가진 인생을 얻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까 봐 두려운, 죄 없는 도망자."
책은 성장소설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남들보다는 거친 성장기를 보낸, 이제는 여인이 된 소녀의 이야기.
끝내 누구도 성장하지 않는 성장소설일까봐, 두려웠다.
그러나 소설의 말미, 이비는 달라질 수 있음을, 이제는 세상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내게 기쁨을 주었다.
삶엔 언제나 복병이 등장한다.
내가,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 할 줄 알았어? 너를 마냥 행복하게 두지 않겠어! 하며 튀어나오는 뛰어넘기 버거운 허들.
깊게 심호흡 할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책이다.
까짓 거, 못 넘으면 어때. 다치기 밖에 더하겠어.
인상 깊었던 두 구절을 옮기는 것으로 리뷰를 마친다.
"죽음은 나에게 호텔 로비 같은 것이었다.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좀 세련되고 불이 환하게 켜진 곳. 시내에서 어떤 남자애가 위조 복권을 팔다가 잡힌 뒤 지하실 방에서 총으로 자살했다. 나는 피가 엉긴 축축한 방 안이 아니라 방아쇠를 당기기 전의 편안한 순간만을 생각했다. 세상이 얼마나 깨끗하고 정제된 것처럼 보였을까. 모든 실망스러운 일들, 처벌과 모욕이 있는 보통 삶의 모든 것이 한 번의 정연한 동작으로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
"나 자신의 자아만이 숨막히게 변치 않고 있었다. 그 어리석고 필사적인 동반자."